[Life&] 조지 오웰
동물농장에서 인간을 만나다
[박숙자 경기대 교양학부 조교수] 조지 오웰의 은 스탈린주의를 비판한 최초의 문학작품이자, 정치 풍자소설로는 이후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모든 동물이 평등’한 이상사회를 설계하지만 결국, 또 다른 독재자와 전체주의적 공포사회가 등장하는 역설은 출판 후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간담을 서늘하게 할 만큼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1960년 12월 한 일간지에 실린 광고가 요란하다. ‘어린이나 어른이나 다함께 즐길 수 있는 총천연색 장편 만화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오리온 캐러멜 1갑을 선물로 특별 증정한다’고 얘기할 뿐만 아니라 ‘문교부장관(현 문화부장관) 학생 관람 인정’이라는 권위를 내세워 중고등학생들이 꼭 봐야 하는 대단한 영화로 선전한 것.

바로, 1954년 영국에서 만든 장편 애니메이션 의 광고 문구다. 사실 당시만 해도 책이 귀하던 시절이었고, 학생들이 볼 만한 영화는 더 희귀한 시대였다. 그런데 외국 영화를 문교부장관이 학생 관람으로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언감생심(焉敢生心) 애니메이션이라니! 떼를 쓰거나 강짜라도 부리고 싶은 기회였다.

이 ‘어른과 아이’가 함께 볼 만한 영화로 소개된 것은 전후 냉전체제 속에 ‘반공’이 야기한 시대적 분위기가 한 몫 했다. 원래 조지 오웰의 은 1944년 탈고됐지만 실제 출판된 것은 1945년 이후였다.

당시 연합국은 구소련을 풍자한 것으로 알려진 이 소설 때문에 동맹국 구소련과 사이가 나빠질 것을 우려해 출판을 제지했기 때문이다. 종전 이후에서야 세상에 빛을 보기 시작한 이 책은 냉전체제 속에서도 날개 돋친 듯 읽히기 시작했다.

한국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구소련은 하나의 국가이기 이전에 세계의 절반을 잠식하는 적색의 이데올로기 그 자체였다. 교육용으로 인기가 높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의 이야기 구조는 비교적 간단하다. 메이너 농장에서 고된 노동에도 헐벗은 채로 살아가는 동물들이 인간을 쫓아내고 스스로 농장을 운영한다는 내용이 주요 골자다.

핵심은 동물들이 ‘동물농장’의 주인이 됐다는 사실이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소설 속 동물들은 농장 운영의 7계명을 정한다. ‘모든 동물들은 평등하다’도 그중 하나인데 이 약속에 따라 농장 안에서 일하던 동물들이 모여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한다.

같이 모여 이야기하고 농장 운영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동물들은 일찍이 상상도 못했을 만큼 행복하다고 느낀다. 한 그릇의 밥을 먹어도 예전과는 달랐다. 주인이 동냥 주듯 던져주는 먹이가 아니라 같은 음식이라도 내 몫의 음식을 먹는다는 즐거움을 알기 시작했다.

또 모든 동물들은 자기 능력에 따라 일하고 일요일에는 모두 쉬며 여가를 즐겼다. 그러나 행복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돌연 동물공화국에서는 미스터리한 일들이 하나 둘씩 생겨났다.

바람이 서늘해지면서 잘 익은 사과가 툭툭 떨어져서 나뒹굴었지만 정작 사과를 식탁에서 찾아보기 어려웠고, 그 많던 우유가 죄다 어디로 사라지는지 알 수 없었다.

심지어, 우유와 사과가 돼지들에게만 돌아간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점차 동물들 사이에서 공화국 내 수확물이 평등하게 나누어질 거라는 믿음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이때 나폴레옹의 대변인인 스퀼러(돼지)는 궤변으로 선의에 가득찬 다른 동물들을 설득했다.

“이 농장의 경영과 조직은 전적으로 우리 돼지들에게 달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적으로 농장 경영을 위한 ‘여러분의 이익’을 위한 충심으로 돼지의 체력을 보강했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그러면서 “(혹시) 여러분들 중에 설마 존즈(예전 주인)가 되돌아오길 바라는 분은 없겠지요”라고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약간의 특권을 누리는 돼지와 주인 존즈 중에 누군가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네 발 달린 동물’의 편을 들어주는 게 나았다.

◆ “누가 돼지고, 인간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문제는 스퀼러의 특권이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는 것이다.

단지 우유나 사과의 문제가 아니었다. 주인 존즈에게 꼬리치며 동물을 겁박했던 사나운 개들이 ‘나폴레옹’(돼지) 곁에 바싹 붙어 꼬리를 흔들기 시작했고, 나폴레옹과 균형을 이루면서 농장을 주도적으로 운영했던 스노블(돼지)이 쫓겨났다.

이후 농장 운영의 근간이었던 ‘회의’도 폐지됐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논의하는 공론장이 사라지고, 나폴레옹이 옳다는 허망한 외침이 반복됐다.

끊임없이 외부의 적을 환기시키는 겁박, 차별적 분배, 정보와 권리의 독점, 대표를 옹위하는 힘(군대) 등 나폴레옹이 운영하는 농장은 이전과 비슷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동물들은 농장을 포기할 수 없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동물들이 운영하는 농장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약간의 불의와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감내했던 것은 적어도 인간 존즈보다는 나을 것이고, 적어도 ‘동물들에 의한, 동물을 위한’ 유례없는 농장이라는 최소한의 믿음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묻지 않았던 것이 잘못된 것일까.

선의는 오래가지 않았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던 ‘복서’(말)의 건강이 나빠지자 ‘말 도살업’이라고 쓰인 마차가 농장에 슬며시 들이닥쳤다. 돼지들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오비이락(烏飛梨落)도 이쯤 되면 약효가 먹히지 않는다.

심지어 이날, ‘돼지들이 어디에선가 돈이 생겨 위스키를 한 상자나 사서 마셨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동물들은 한두 마디의 말로 진실이 가려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짐작하고 의심했지만 묻지 않았다. 농장 안에서 말이 통하지 않은 지 오래됐다.

농장 안에서 통용되는 말은 나폴레옹의 말뿐이었다. 어느 날 나폴레옹은 인간을 데려와 다른 농장들과 호혜적 관계를 갖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농장 안에서 흔하게 통용되던 ‘동무’라는 말까지 쓰지 말라고 했고 결국 ‘동물농장’이라는 이름 대신 ‘메이너 농장’이라고 쓰자고 했다.

이렇게 말하는 돼지들은 인간처럼 ‘두 발’로 걸으며 뒤뚱거렸다. 돼지에게서 그 못된 인간 주인의 모습이 보인 것이다.

책은 “누가 돼지고 누가 인간인지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이미 분간할 수 없었다”로 끝난다. 인간에서 돼지로 주인이 바뀌는 동안 권리의 문제가 권력의 욕망으로 둔갑했다. 이렇게 의 상상력은 근 70여 년 동안 국가, 사회, 그리고 인간을 되비추는 거울로 여겨졌다.

최근에는 ‘동물농장’ 이후 ‘동물장터’가 됐다는 상상이 제기되고 있다. 동물장터라니. 그 속에서 또 동물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우화가 보여주는 세계는 때로 어떤 메시지보다 강렬하고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