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국의 심리학 카페]
기존 정보 활용·단순화 선호…고대 절대군주는 무력으로 관철
합리적인 '도로명 주소', 뇌의 귀차니즘 앞에 '백기'
(일러스트 김호식)

[김진국 문화평론가·융합심리학연구소장] 사람들은 항상 가장 좋은 것만 고르고 사용할까. 그렇다면 세상에는 늘 최상의 것만 통용됐을 것이다. 물론 세상은 그렇게 굴러가지 않는다.

1980년대를 가장 뜨겁게 달군 극심한 마케팅 전쟁이 있다. 이른바 ‘비디오테이프 표준 전쟁’이다. 당시 가정용 비디오테이프 시장은 소니의 베타맥스와 JVC의 VHS의 각축장이었다.

결과는 소니의 완패였다. 문제는 소니가 JVC에 비해 화질을 포함해 더 뛰어난 기술을 갖고 있었다는 것. 양사의 마케팅 전략 차이와 가정용 VCR 시장을 둘러싼 특수한 시장 상황이 있었지만 어쨌든 시장은 최상의 것을 선택하지 않았다.


◆ 항상 ‘최상’이 선택되는 건 아니다

‘도로명 주소 논쟁’를 보면 ‘비디오테이프 표준 전쟁’이 떠오른다. 지난 10여 년간 수천억원의 예산을 쏟아붓고 본격 시행한 지 여러 해가 됐지만 도로명 주소 정책은 아직도 제자리걸음이다. 더 나은 기술을 가진 소니의 베타맥스가 JVC의 VHS에 맥을 못 추는 형국이다.

예컨대 지번(地番) 주소로 서초구 서초동 1538의 10 서초 아트자이 101동 ○○○호를 찾아가는 것보다 도로명 주소인 서초구 반포대로 58, 101동 ○○○호로 찾아가기가 훨씬 쉽다.

도로명 주소 생성 원리에 따르면 반포대로의 기점인 예술의 전당에서 종점인 반포대교 쪽으로 진행하면서 각 20m마다 왼쪽에는 홀수, 오른쪽에는 짝수 번호를 가진 건물이 교대로 자리한다.

따라서 반포대로 58은 예술의 전당을 등지고 볼 때 길 오른쪽에 있고 대략 1km 이내에 자리하고 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반포대로는 도로명이 지역 이름을 포함하고 있고 서초동에만 있는 4.7km에 불과한 짧은 도로다.

하지만 ‘남부순환로 2406’이라는 도로명 주소를 가진 사람이 같은 장소인 ‘서초동 700’이라는 지번 주소를 갖고 목표 지점 A를 찾아가기는 그리 쉽지 않다.

남부순환로는 김포공항에서 시작해 수서 나들목까지 31.8km나 된다. 2406 숫자만 봐서는 이 건물이 신림동·사당동·방배동·서초동 어디쯤일지 짐작조차 하기 힘들다(참고로 A는 예술의 전당이다).

아차산로 76이라는 주소를 보고 그곳이 성동구인지, 광진구인지, 구리시인지 짐작할 수 있을까. 더구나 아차산로 대부분의 구간은 아차산과 별로 관계가 없는 곳을 지난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죠. 아차산로에는 아차산이 없어요!” 서울 시내 한 퀵서비스 운전사의 말이다. 도로명 주소가 생각만큼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말이다.

사회심리학에 ‘인지적인 구두쇠(cognitive miser)’라는 용어가 있다. 사람들은 어떤 의사 결정을 할 때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모아 그것을 토대로 논리적인 추론을 하지 않는다.

가능하면 상황을 단순화하고 자신의 기존 정보를 이용해 직관적으로 빠르게 의사 결정을 내린다. 우리 먼 조상들이 생사의 기로에서 가능하면 빨리 적은 정보만으로 선택을 강요받던 사바나 초원 시절부터 생긴 습성이라고 한다.

서울이 초행도 아닐 터이니 서울 시민들의 대부분은 이미 오래전부터 서울 지리에 익숙하다. 그들에게 편리하다는 이유로 기존 정보(지번 주소)를 폐기하고 새로운 정보(도로명 주소)를, 그것도 공부까지 해 사용하라고 강요하니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더구나 지번 주소를 통해 이미 습득한 기존의 정보가 새 정보인 도로명 주소를 배우려는 뇌의 활동을 방해하기도 할 것이다. 이것을 인지심리학자들은 ‘순행 간섭(proactive interference)’이라고 한다.

고대에 제국이 통일을 하면 도로를 닦고 도량형부터 통일했다. 진시황의 진나라가 그랬고 로마제국이 그랬다. 순행 간섭에 시달리는 인지적 구두쇠들인 민초들의 저항에 부닥치기도 하지만 절대군주들은 무력을 동원해 관철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당연하게도 모든 정책은 단순히 하나의 정책이 아니다. 그 이면에는 각자의 역사적·문화적 배경이 있고 심리학적인 문제가 바탕에 깔려 있다.

우리의 지번 주소도 사실은 일본 제국주의 작품이다. 하지만 이미 100년 가까이 지나면서 지번 주소는 이미 우리 생활의 일부분이 됐다는 것을 인정하고 시작해야 한다.

고대 제국의 절대군주처럼, 논리적으로 좋은 정책이라고 무력으로 밀어붙일 수도 없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정책을 수립할 때마다 문화 전문가, 심리학 전문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준비 과정에서부터 철저하게 자문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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