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하고 ‘대화’하는 식물들…공생을 통한 상호이익 추구 (일러스트 김호식)
[한경비즈니스=김경집 인문학자, 전 가톨릭대 인간학교육원 교수] 얼마 전 먼 곳으로 강연하러 가면서 스테파노 만쿠소와 알레산드라 비올라가 지은 ‘매혹하는 식물의 뇌’를 읽었다. 우리가 몰랐던 식물의 진실을 만나는 것은 매혹적이었다.
식물이 제대로 생물의 한 종으로 인정받은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움직이는 생물인 동물만 생물로 여겨 왔다.
장 바티스트 라마르크와 찰스 다윈 덕택에 식물이 체계적인 생명의 반열에 들어설 수 있었다. 이 책은 다양한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며 사람들이 잘 몰랐고 굳이 알려고 들지도 않았던 식물의 역동적 본성에 대해 다루고 있다.
특히 식물의 ‘뇌’라는 개념은 경이 그 자체다. 만쿠소는 식충식물에 대해 기술하면서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육식식물이라고 해야 하는데 그 용어 하나 인정하는 데 걸린 세월의 역사를 비판한다.
익숙하다는 것, 그것은 사고의 비용을 절감하는 경제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매력적이지만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늘 경계해야 한다.
과학자들은 파리지옥과 같은 식충식물이 곤충을 잡아먹는 것은 식물이 곤충을 살해할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없다는 등 요즘의 시각으로 보면 코미디 수준이지만 당시의 과학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받아들였다.
1875년 찰스 다윈이 ‘식충식물’을 출판한 이후에야 비로소 식충식물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됐다. 그제야 비로소 과학자들은 식물이 곤충을 잡아먹는다고 공공연히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식충식물 혹은 육식식물은 동물을 잡아먹을까. 바로 진화적 요인 때문이다. 육식식물이 오래 살아온 습지 토양에는 질소가 부족해 단백질을 합성하기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신기한 것은 감자나 담배 혹은 참오동나무의 잎에 작은 곤충들이 무수히 달라붙어 있다는 점이다.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 왜 그 식물들은 곤충들을 유인해 죽이는 걸까.
먹을 수도, 소화할 수도 없는데? 의외로 답은 간단하다. 곤충을 직접 소화하지 못해도 곤충의 시체가 땅에 떨어져 분해되면 질소가 방출돼 식물이 그것을 섭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놀랍지 않은가.
◆ 벌이 방문한 꽃잎은 파랗게 변색
이 점을 잘 이용하면 우리의 삶이나 비즈니스에서도 좋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누구나 이익을 추구한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이 직설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을 택한다. 아무리 마케팅 기법을 동원해도 아직은 넓게 그리고 은유적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각자의 입지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을 어떠한 방식으로 취할까. 식물은 결코 사냥하거나 육식하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으면 식충식물의 생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의 고정관념과 타성적 사고는 올무에 갇혀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이 책은 식물의 다양한 생태에 대해 기술하는데 식물의 신체 언어에 대한 예리한 관찰과 분석도 눈여겨 읽을 만하다. 식물들이 몸짓을 통해 의사소통을 한다는 사실은 놀랍다.
수관기피(나무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더라도 서로의 수관을 건드리지 않는 현상)도 그렇고 식물과 곰팡이의 공생도 그렇다. 진화적 관점에서 이기적 행동과 이타적 행동에 대한 고민 또한 주목할 대목이다.
식물들은 곰팡이가 내뿜는 화학 신호를 받아들여 곰팡이의 의도를 파악하는 화학적 대화를 통해 공생할지, 배척할지를 결정한다. 그것은 공생을 통해 상호이익을 추구하는 방식이다. 우리의 삶이나 비즈니스도 그런 관계를 발전시켜야 성장한다는 점을 깨우쳐야 한다.
작은 꽃들을 무수히 피우는 콩과 식물인 루핀도 재미있다. 식물에 수분 행위는 절대적이다. 번식을 위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 식물이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꽃이 하도 많다 보니 벌이 착각을 일으켜 똑같은 꽃을 두 번 방문하는 불상사가 벌어질 수 있다.
한 꽃을 두 번 방문하는 것은 꽃이나 벌에게도 낭비다. 그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 루핀은 간단하고도 효과적인 전략을 개발했다. 벌이 한 번 꽃을 방문하고 나면 꽃잎 색깔이 파란색으로 변한다.
그러면 벌은 그 꽃은 방문하지 않는다. 벌은 헛수고를 덜게 되고 꽃은 수정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생태계의 종충성(種忠誠, species loyalty)이다.
충성도를 이미지로만 혹은 조작된 정보로만 이끌어 내려는 방식은 하지하(下之下)의 방책이다. 이젠 기업도 긴 호흡으로 직원들이나 소비자들에게 신뢰와 선한 결실을 제공해야 한다.
그래야 멀리 간다. 그게 상생의 힘이다. 세상에 배울 것은 너무 많다. 그러니 이 가을 한 권의 책이라도 더 읽고 더 많이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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