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집의 인문학 속으로]
‘上疏(상소) 문화’를 재현하라
비판을 거부하면 그 사회는 망한다
[한경비즈니스=김경집 인문학자, 전 가톨릭대 인간학교육원 교수] 상소(上疏) 문화는 동양 문화에서 그 역사가 길다. 명나라 13대 황제인 만력제 때 정치인 장거정은 황제의 신임을 얻어 수보(일종의 총리)로 국정을 다뤘고 많은 개혁을 이뤄냈다. 그는 대규모의 행정 정비를 단행했고 무엇보다 궁정의 낭비를 줄이는 데 힘썼다.

그는 황제의 권위를 침범하지 않았고 끊임없이 어린 황제에게 성군이 되도록 가르쳤다. 하지만 황제는 점점 자라면서 그런 장거정의 간섭이 싫었다. 장거정은 황제에게 불편한 존재였다.
장거정이 죽자 20세가 된 황제는 마음껏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데에만 몰입했다. 황제를 제어할 사람들이 없었고 그의 주변에는 환관들만 들끓으며 황제의 욕망을 지원해 주고 그 대신 권력은 자신들이 농단했다.

장거정의 후배였던 대리시 좌평사 낙우인이 마침내 목숨을 걸고 황제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삶에 연연하여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위력과 권세가 무서워 감히 직언을 올리지 못하나, 충성을 가슴에 품고 외로움을 지키는 직신들은 설사 눈앞에 펄펄 끓는 솥과 도끼를 놓는다 해도 그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만약 폐하께서 신의 말을 기꺼이 받아들이신다면, 설령 신을 죽이실지라도 그 죽음은 살아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오로지 폐하께서 미루어 살펴만 주십시오.”

문장 하나하나가 황제의 폐부를 찌르는 것들이었다. 그 상소를 읽은 황제는 펄펄 뛰며 낙우인을 삭관탈직하고 서민으로 강등시켰다. 그러니 어느 누가 감히 상소를 올려 황제를 비판할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봉양 순무 이상재를 비롯한 많은 관리와 학자들이 상소를 올려 “상황을 방치하면 끝내 변란이 터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황제는 오불관언이었다. 마침내 백성들이 들고일어났다. 하지만 환관들은 잔혹하게 그들을 진압했다. 결국 명나라의 쇠락이 찾아왔다.

◆ 상소는 조선의 힘

조선은 상소의 정치 문화가 가득했다. 모자라고 어리석은 군주가 있을 때 상소가 많았다는 것은 그만큼 매운 소리가 많았다는 뜻이다. 협량한 군주에게 걸리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위험스러운 것이 상소였다.

하지만 조선의 관리들과 선비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를 올렸다. 약포 정탁은 정유재란 때 옥중의 이순신을 위해 상소를 올렸다. 선조에게 ‘찍힌’ 이순신을 구명한다는 것은 자칫 화를 자초할 일이었다. 하지만 정탁은 주저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진실로 장수의 재질을 지녔고 해전과 육전의 재주를 겸비했습니다. 이러한 인물은 쉽게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의지하는 바가 크고 적이 무서워하는 사람이옵니다.

만일 죄명이 엄중하여 조금도 용서할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여 공과 허물을 서로 비겨볼 만한 점도 묻지 않고 앞으로 더 큰 공을 세울 만한 능력의 유무는 생각지 않으며 그간 사정을 천천히 살펴볼 여유도 없이 끝내 큰 벌을 내린다면 공 있는 자와 능력 있는 자들은 스스로 국가를 위해 더 이상 애쓰지 않을 것입니다.”

이순신이 그대로 하옥된 상태로 갇혔거나 죽었다고 상상해 보라. 왜적의 재침을 어찌 막을 수 있었을까. 명량대첩의 대승은 불가능했을 것이고 조선은 다시 비참한 전쟁과 퇴각의 길을 걸어야 했을 것이다. 임금이 이순신을 마뜩하게 여기지 않음을 뻔히 알면서도 사직과 백성을 위해 마땅히 해야 할 것이라고 여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늘 대한민국의 권부에서 일어나는 파렴치와 퇴락을 보고 있자면 가슴이 미어진다. 이 지경으로 망가지고 온갖 농단과 타락이 일어났는데도 권력의 중심에 있는 이도 주변의 학자들도 모두 침묵했다. 선공후사는커녕 각자도생하며 자기 잇속 챙기기에 혈안일 뿐이었다.

편협한 학문이라고 폄훼되고 왜곡되는 주자의 학문이 전제군주의 권력 강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에 대한 깊은 통찰과 개혁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새삼 깨닫는다면 문제의 발단은 주자학을 통해 권력을 획득한 권력 집단이 기득권을 지속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았기 때문이라는 점이 새삼 도드라진다.

곡학아세를 일삼는 관변 학자들이나 좋은 머리로 높은 자리를 차지한 관리들이나 모두 정신 차리지 않고 진실을 애써 외면했다. 다수의 자본가들은 자기 이익에만 매달렸고 진실을 파헤쳐야 할 언론은 스스로 권력이 되려고 하기 때문에 지금 대한민국이 망가지고 있다.

당당히 상소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유연하고 관대하게 수용할 수 있는 리더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 내부 고발자를 지켜내고 그들에게 불이익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천박한 문화와 풍토를 하루빨리 버려야 한다.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이다.

그걸 의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대한민국을 다시 재건해 미래의 가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