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 신탁시장 700조 전쟁 : 금융권의 승부]
은행·증권·보험·부동산신탁 등 56개 금융사 ‘각축전’ 벌여

[한경비즈니스=정채희 기자] 700조원대 ‘신탁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금융위원회가 올 1월 신탁업 제도 전면 개편을 통해 신탁을 종합 자산 관리 서비스로 키우겠다는 포부를 밝히면서 그간 자본시장법에 묶였던 신탁시장이 금융권의 신규 수익원으로 떠올랐다.

시장에선 이미 ‘금싸라기’를 선점하기 위한 신탁회사들의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점유율을 확대하려는 은행과 증권, 신규 수익 창출을 노리는 보험사는 물론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부동산 신탁회사의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는 것이다.

저금리와 고령화 시대, 규모를 점차 확대하는 신탁시장에 깃발을 꽂을 이는 누구일까.
저금리·고령화 시대의 ‘블루오션’, 신탁시장 주도권 잡아라
◆규제 풀리며 ‘폭풍성장’ 가능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현재 국내의 신탁회사 수는 총 56개다. 업권별로 은행(외은지점 포함 19개), 증권(20개), 보험(6개), 부동산 신탁회사(11개) 등이 있다. 이들 회사의 수탁액은 지난해 9월 기준으로 총 708조6861억원이다.

업권별 점유율을 보면 은행이 49%(348조97억원)로 신탁시장의 절반을 장악하고 있다. 이어 증권사 28%(197조1791억원), 부동산 신탁회사 22%(154조6278억원) 순이다. 보험사는 8조8695억원으로 점유율이 1%에 불과하다.

이들 신탁회사가 주목하는 것은 향후 시장의 성장성이다. 저금리·고령화 시대에 종합 자산 관리를 책임질 주역으로 신탁이 떠오르면서 자산가들의 투자 자금이 신탁으로 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입증하듯이 최근 신탁시장의 수익이 2013년 9월 말 481조원에서 3년 새 32.1% 늘어난 708조원으로 불었다. 작년 11월 말 기준으로는 739조원까지 늘었다.

업계에선 오는 10월 금융위원회가 국회에 제출할 신탁업법 제정안이 통과되면 시장 규모가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새로운 제정안에는 현재 금전·증권·채권·부동산 등 7가지 종류로 한정돼 있는 수탁 재산을 부채·영업·담보권·보험금청구권까지 확대한다는 방침이 담겨 있다.

또한 생전신탁과 유언신탁 등의 새로운 신탁 업무 기준을 마련한 것은 물론 신탁회사가 제3의 신탁회사에 다시 맡길 수 있도록 하는 등의 수탁 자산의 영업 규제를 완화하는 방안도 담았다.

◆은행권, 전담 조직 운영 ELT·맞춤형 확대

가장 큰 기대를 거는 곳은 신탁시장의 절반을 차지하는 은행이다. 저금리 기조가 장기화하면서 예대마진이 줄어들고 있는 은행권은 새로운 수익처로 신탁시장을 지목하고 있다. 비이자 부문을 강화해 종합 자산 관리의 ‘명가’로 거듭나겠다는 계획이다.

지난해 말부터 주요 은행들이 신탁 전담 조직을 확대하거나 신규 개설하는 등 조직 개편에 나선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우리은행은 기존의 연금신탁사업단을 연금신탁그룹으로 한 단계 끌어올렸고 KB국민은행과 신한은행 또한 각각 기존의 신탁본부를 신탁연금그룹으로 격상했다. KEB하나은행 역시 올 초 조직 개편에서 신탁본부를 신탁사업단으로 강화하는 등 신탁 사업에 힘을 싣고 있다.

김재영 KEB하나은행 신탁사업단장(전무)은 “최근 은행들이 신탁 사업을 강화하는 것은 신규 수익원을 기대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며 “신탁 시장이 커지면서 신규 상품도 만들어야 하고 이에 따른 시스템 구조도 갖춰야 하는 등 할 일이 매우 많아졌다”고 말했다.

김 단장은 “그간 신탁 사업에서 캐시카우 역할을 하던 기존 상품의 라인업은 보다 강화하고 미래 먹거리를 위한 상품 개발에도 적극 나설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은행권의 주력 상품은 주가연계신탁(ELT)이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가 펴낸 ‘부자 보고서(2017, Korean Wealth Report)’에서도 올 한 해 자산가들이 투자하고자 하는 금융 상품 1순위로 주가연계증권(ELS)과 ELT를 뽑았다.

우리은행은 외화 자산에 대한 이용자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외화 ELT 상품을 출시할 계획이다. 이 은행은 지난해 말 국내 최초로 위안화 특정금전신탁(MMT) 상품을 내놓았다. 위안화 MMT는 기존의 위안화 상품이 0.1%대 저금리인 것과 달리 1.5% 수준의 금리를 제공하는 것이 특징이다.

‘ELT의 강자’ KB국민은행도 차별화된 ELT 상품을 출시해 이용자들이 중수익 이상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그간 ELT에 다소 약한 모습을 보였던 신한은행 또한 ELT 영업을 강화해 수익성을 제고하겠다는 전략이다.

‘맞춤형 신탁’으로 신규 시장 선점에 나선 곳도 있다. KB국민은행은 반려동물을 위한 ‘펫신탁’을 출시했다. 이 상품은 고객이 은행에 자금을 맡기면 고객 본인 사망 후 새로운 부양자에게 반려동물(개·고양이) 보호·관리에 필요한 자금을 지급하는 금융 상품이다.

KEB하나은행 또한 2010년 금융권 최초로 종합 재산 관리 신탁인 ‘하나 리빙 트러스트’ 신탁을 출시한 데 이어 지난해 말 치매에 종합적으로 대비하는 ‘치매안심신탁’과 정신적인 제약으로 성년후견심판 등을 받은 성년을 위한 ‘성년후견 지원신탁’을 출시했다.

이 역시 금융권 최초로 KEB하나은행은 ELT 외 신탁 상품 수익원의 다변화를 위한 신상품 개발을 지속할 계획이다.

◆증권사, ‘고액 자산’ 유언대용신탁 관심

신탁시장에서 점유율 2위를 달리는 증권업계 또한 신탁의 성장세에 기대를 걸고 있다. 특히 복잡한 증여와 상속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 고액 자산가들이 관심을 두고 있는 유언대용신탁 시장에 관심이 많다.

유언대용신탁은 고객(위탁자)이 금융회사(수탁자)에 자산을 맡기면 생전에는 고객의 자산 관리를 도와 재산을 불리게 해주고 사망 후에는 유언장을 대용해 재산 분배까지 해결해 주는 금융 서비스다.

증권업계는 2013년부터 유언대용신탁 상품을 출시했지만 상품에 대한 저조한 인지도와 세제 혜택의 부재 등으로 은행에 시장 선점의 자리를 내준 바 있다.

하지만 올해 초 금융위원회가 유언대용신탁 등 새로운 신탁 상품에 대해 세제 혜택을 검토하겠다는 방침을 밝히면서 또다시 유언대용신탁 시장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를 개인 자산 관리(WM)와 연계해 장기적으로 우량 고객을 확보하고 시장을 키우겠다는 취지다.

증권사 중 올 들어 첫 포문을 연 것은 신영증권이다. 이 회사는 지난 1월 종합 자산 관리와 자산 승계, 특별 부양, 공익 기부 등을 한 번에 해결하는 ‘신영 패밀리 헤리티지 서비스’를 내놓았다. 이 중 핵심은 자산 승계 서비스로, 일반적인 상속·증여와 달리 생전에 종합 자산 관리를 받고 사후에 고객의 뜻에 따라 유산 배분 설계를 할 수 있는 유언대용신탁이 포함돼 있다.

이 밖에 현재 대신증권을 비롯해 하나금융투자·한국투자증권·NH투자증권 등 증권사들이 앞다퉈 관련 상품을 개발하거나 출시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유언대용신탁 시장은 아직 인식이 부족한 만큼 WM 고객 대상으로 한 상품에 집중될 가능성이 높다”며 향후 세제 혜택 등의 제도적 지원이 강화된다면 보다 폭넓은 고객층을 대상으로 상품의 활용도가 확대될 것”이라고 말했다.

◆보험사, 보험금청구권신탁 군침

보험사는 이번 신탁업법 제정안이 신탁시장에서 점유율을 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보험사의 수탁액 점유율은 작년 9월 말 기준으로 단 1%다. 지금까지 신탁을 거의 취급하지 않았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

하지만 금융위원회가 지난 1월 ‘2017년 금융 개혁 5대 중점 추진 과제’에 신탁 재산의 대상 범위를 ‘보험금청구권’까지 확대하는 안을 내놓으면서 보험사들의 시장 선점을 위한 상품 출시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이전까지는 현재의 자본시장법과 신탁법에서 보험금청구권을 신탁 자산으로 하는 신탁이나 보험증권에 대한 금전 운용을 허용하지 않아 신탁을 통한 보험금 관리를 할 수 없었다.

금융위 관계자는 “신탁 대상에 보험금청구권을 포함하는 것은 보험업계의 숙원 사업이었다”며 “과거에도 수차례 상품을 개발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아 출시까지 못 간 사례가 여러 번”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실제 상품 출시가 현실화된다면 업계에서도 다양한 모델을 출시해 신탁의 활용 가능성을 높일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김진영 신한은행 신탁연금본부장 또한 지난해 은행연합회에 기고한 ‘신탁업 부활’ 칼럼을 통해 “해외에선 이미 일본 등의 선진국들이 보험금을 신탁 자산으로 허용해 신탁을 통한 보험금의 관리가 가능하다”며 “일본의 사례 등을 적극적으로 고려해 업권 간 이해관계를 떠나 전향적으로 생명보험을 신탁 자산에 넣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러한 전략으로 고령화 시대의 자산 관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보험사들은 보험금청구권신탁이 허용되면 피보험자가 생명보험 지급 청구권을 생전에 신탁한 후 사망 시 신탁회사가 보험금을 수령해 자녀에게 분할 지급하는 등의 방식으로 이뤄질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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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신탁회사, ‘토지신탁 전업’ 현행 체제 유지 희망

부동산 신탁회사는 이번 신탁업법 제정안으로 현재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안간힘이다. 현재 부동산 신탁회사가 전업으로 취급하고 있는 부동산개발신탁(토지신탁) 등은 현행 체제를 유지해 달라는 것이다.

부동산 신탁회사는 부동산 산업에 대한 전문성을 토대로 부동산 자산을 수탁 받아 관리·처분·개발하는 것을 주요 업무로 하는 신탁회사다. 금융 당국으로부터 전업 부동산 신탁회사로 인가받은 곳은 한국토지신탁·한국자산신탁 등 총 11개사다.

은행과 증권 등의 신탁회사들도 부동산 신탁을 취급하고 있지만 부동산 개발 사업을 진행하기 위한 부동산개발신탁은 현재 부동산 신탁회사가 전담해 이를 취급하고 있는 전업 체제다.
이러한 전업 체제에 힘입어 부동산 신탁회사는 작년 호황을 누렸다.

지난해 9월 말 기준 부동산 신탁의 전체 수탁액은 188조1454억원으로 1년 전에 비해 13.2% 증가했다. 이 중 은행이 겸업하고 있는 담보신탁이 60%(94조5044억원), 부동산 신탁회사가 전업하고 있는 토지신탁이 28%(44조6012억원) 수준으로 집계됐다.

아직까지는 담보신탁의 수탁액이 2배 정도 많지만 신탁 수수료가 비교적 낮은 편이기 때문에 앞으로 시장의 무게는 토지신탁 부문이 될 것이란 게 업계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그러나 금융위가 신탁의 진입 문턱을 낮추는 것을 목표로 하면서 향후 은행과 증권 등 신탁 겸영 회사 또한 토지신탁을 겸영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에 따라 부동산 신탁회사들이 관련 협회 등을 통해 ‘전업 체제를 유지해 달라’는 업계의 의견을 전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부동산 신탁회사의 한 관계자는 “대형 은행과 같은 자금력이 큰 회사가 (토지신탁 업무 등을) 겸업할 수 있게 된다면 영업력과 규모 등이 비교가 안 되는 부동산 신탁회사가 부담을 안을 수밖에 없다”며 “은행이 영업을 통해 수탁하고 다시 신탁회사에 재하청을 주는 구조, 즉 부동산 신탁사가 은행의 하청업체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는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금융투자협회 관계자는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나 방향성에 대해 알려진 것이 전혀 없다”며 “앞으로 어떻게 변화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우려를 논의하는 것은 이른 감이 있다”고 말했다.

다만 이 관계자는 “추후 논의 과정에서 (인가 요건이) 구체화되고 대외적으로 공표된다면 당연히 회원사(부동산 신탁회사)와의 논의를 통해 다시 공론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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