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상법개정안 일부 합의…집중투표제·다중대표소송제에 기업 ‘비상’ (사진) 여야는 2월 임시국회에서 전자투표제 의무화와 다중대표소송제 등을 통과시키기로 잠정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경제신문
[한경비즈니스=김정우 기자] 국회의 상법개정안 처리 여부가 정치권을 비롯한 재계의 ‘뜨거운 감자’다. 국회가 경제민주화 명목으로 추진하고 있는 상법개정안은 대기업 등 상장회사의 지배구조와 투명성을 개선하고 소액주주들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취지에서 마련됐다.
하지만 우리 기업의 지배구조를 약화시켜 해외 투기 자본의 먹잇감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어서 논란이 일고 있다.
현재 국회에서 논의 중인 상법개정안은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바른정당·정의당 등 야당 측에서 발의한 내용이다. 개정안을 살펴보면 세부적으로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집중투표제(주식 1주에 대해 선임하려는 이사의 수만큼 의결권을 부여해 특정 이사에게 몰아줄 수 있는 제도) 의무화 ▷전자투표제 의무화 ▷다중대표소송제(자회사 임원을 상대로 모회사 주주가 손해배상 소송을 낼 수 있는 제도) ▷감사위원 분리 선출(감사위원을 사내외 이사와 별도로 뽑되 대주주 의결권을 3%로 제한) 등 4가지를 시행하자는 쪽으로 대체적인 의견이 모아졌다.
바른정당만 집중투표제를 개정안에 넣지 않았다.
◆상법개정안 당별로 특징 지녀
민주당에서는 김종인 전 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대표 발의를 맡아 개정안을 발의했다. 여야 의원 총 122명이 모여 지난해 7월 개정안을 제출했다. 민주당을 주축으로 일부 국민의당 의원과 여당인 새누리당 의원 1명도 발의에 참여했다.
이른바 ‘민주당표’ 개정안은 집중투표제 의무화 등 위 4가지 내용을 기본적으로 포함한다. 가장 큰 특징은 사외이사의 기능을 강화하자는 것이다.
그동안 사외이사는 선임할 때부터 해당 기업의 최고경영자(CEO) 또는 사내 인사들이 관여해와 거수기 역할을 하는 데 그쳤는데 이를 개선하자는 주장이다. 경영진으로부터 독립된 사외이사가 반드시 선임되도록 법을 개정하자고 했다.
이에 따라 우리사주조합 및 소액주주들에게 사외이사 추천권을 부여하고 이들이 선임한 1인은 반드시 사외이사로 선임하도록 규정했다.
국민의당에서는 채이배 의원이 지난해 8월 20명의 야당 의원들과 상법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개정안은 사외이사 강화에 대한 조항은 없지만 4가지 핵심 내용에 대한 기준을 보다 강화했다.
다중대표소송제는 앞서 김 의원이 지분율 50%를 초과하는 상법상 자회사로 적용 대상을 규정한 반면 채 의원은 지분율 30%를 초과하는 계열사까지로 범위를 넓혔다. 집중투표 역시 상장사에 한해 적용하자고 한 김 의원과 다르게 모든 회사에 적용하자는 내용을 넣었다.
정의당에서는 노회찬 대표가 지난해 9월 10명의 여야 의원들과 함께 개정안을 냈다. 4가지 기존 핵심 내용에 더해 부실 경영을 저지른 임원이나 이사가 스스로 경영 판단 원칙을 준수했다는 증명 책임을 지도록 한 것이 눈에 띈다.
그간의 법원 판례를 보면 주주 등의 원고가 이사에게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때 이사가 ‘경영 판단 원칙’을 위반한 사실을 증명해야 했다. 그런데 이를 뒷받침할 자료들은 대개 회사 내부에 존재해 사실상 증명이 쉽지 않은 실정이다.
김봉우 법무법인 우리 변호사는 “해당 개정안은 회사 손실에 대한 입증 책임을 이사에게 전환함으로써 주주들이 부실 경영을 저지른 이사들의 책임 소재를 묻는 것을 용이하게 했다”고 해석했다.
여당에서 분리돼 올해 1월 출범한 바른정당에서는 지난 2월 14일 오신환 의원 등 10명이 개정안을 발의했다. 기존 발의된 개정안과 다른 점은 집중투표제를 포함하지 않은 부분이다.
그 대신 대기업들이 지분율을 늘리는 데 활용되는 ‘자사주 신주 배정’을 제한했다. 일반적으로 자사주는 의결권이 없다. 하지만 회사 인적 분할 시 신주를 배정받으면 의결권이 생긴다. 대기업들은 이런 점을 이용해 대주주의 지배력을 높여 온 게 사실이다.
오 의원은 기업이 분할 또는 합병 시 분할회사가 보유하는 자기주식에 대해 신주를 배정할 수 없도록 해 이런 관행에 제동을 걸었다.
◆기업 경영 활동 위축 우려 상법개정안이 논란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선거 후보 시절 지금과 비슷한 내용의 상법 개정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취임 첫해인 2013년 법무부는 상법개정안을 입법 예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에도 논란이 거세게 일었고 결국 도입이 중단됐다. 그러다 최근 들어 최순실 사태로 재벌 개혁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논의가 다시 진행 중이다.
반기업 정서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상황이어서 대주주 경영권 제한을 목적으로 한 상법개정안의 국회 통과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 보인다.
현재 여야는 이달 임시국회에서 상대적으로 이견이 적은 전자투표제 의무와 다중대표소송제 두 건을 먼저 통과시키기로 잠정 합의한 것으로 알려진 상태다. 만약 두 안건의 처리가 예정대로 이뤄진다면 기업들이 어떤 영향을 받게 될지 알아봤다.
우선 전자투표제 의무화는 그나마 논란의 여지가 낮은 안건으로 분류된다. 한국은 2009년부터 전자투표제를 도입해 왔다. 실시 여부는 각 기업이 자율적으로 판단하도록 하고 있는데, 지난해 전체 1900여 개 상장사 중 25% 정도만이 시행 중이다.
이를 모든 상장사가 반드시 이행하도록 하자는 것이 개정안의 취지다. 여기에 대해서는 재계 일각에서도 찬성 여론이 있다. 우리 기업들은 주주총회가 일정한 시기에 몰리기 때문에 여러 회사에 투자한 주주들에게 유용한 제도가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주주들의 의견이 왜곡될 수 있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루머에 주주들이 의사결정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번 의결권을 행사하면 철회나 변경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많은 해외 국가들도 전자투표제를 도입했지만 의무화한 곳은 홍콩 정도에 불과하다. 기술적인 문제도 상존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오정근 건국대 금융IT학과 특임교수는 “현재 완벽한 본인 인증을 할 수 있는 시스템 자체가 없다”며 “공인인증서와 전자투표가 연계된 상황에서 이의 의무화를 도입하면 일부 세력들이 해킹을 통해 기업 자체를 장악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진단했다.
다중대표소송제는 재계를 중심으로 반대 목소리가 거세다. 도입되면 상장사에 대한 소송이 급증하면서 기업의 정상적인 경영 활동을 방해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행법상 자회사는 모회사로부터 독립적인 법인격을 갖는 주체로 여겨져 다중대표소송이 인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를 인정하면 대기업은 물론 중견·중소기업들에 대한 소송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관측된다. 한국상장회사협의회가 자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대기업은 많게는 10배 이상, 중견·중소기업은 3배 이상 소송이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상장회사협의회 관계자는 “다중대표소송을 도입한다면 미국이나 일본과 같이 100% 완전 자회사에 대해서만 적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가운데 나머지 안건들마저 처리되면 기업들이 입을 타격은 정도를 넘어설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특히 집중투표제와 감사위원 분리 선출 두 가지 안건이 통과된다면 외국계 투기 자본들의 무차별 공격이 예상된다.
◆흐름에 역행…기업 죽이기 논란 신석훈 한국경제연구원 기업연구실장은 두 개 안건 모두 세계적 흐름에 역행하는 방안이라고 지적했다.
집중표제가 도입되면 지분율이 높지 않은 외국계 투기 자본도 연합을 통해 특정 인물을 이사로 선임, 경영진에 투입할 수 있게 된다.
미국·일본 등 20여 개국에서도 한때 집중투표제를 도입했지만 이런 우려가 커지면서 의무화 조항을 없앴다는 설명이다. 현재까지 의무화하고 있는 나라는 러시아·멕시코·칠레 등 손에 꼽힌다.
감사위원 분리 선출도 마찬가지다. 주주와 특수관계인 의결권이 3%로 제한된 상태에서 투기 자본들이 연합하면 감사위원 대부분을 자신들이 원하는 이들로 선임할 수 있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를 기반으로 회사 주요 자산을 매각하거나 기술을 빼내고 주가를 끌어올려 차익을 취득하는 전략을 쓸 수 있다.
신 실장은 “이 같은 투기 자본의 공격으로부터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수많은 해외 국가들이 ‘차등의결권’ 등의 제도를 택하는 추세지만 한국은 오히려 반대로 가는 모양새”라고 했다.
차등의결권은 창업자 등 장기 주식 보유자에게 주당 1표 이상의 의결권을 주는 제도다. 단기 투자자보다 장기 투자자를 우대해 경영권 방어가 용이해진다.
또한 지난 2월 발의된 자사주 신주 배정 제한이 현실화되면 삼성·롯데 등 지주회사 전환을 추진하는 대기업에 족쇄가 될 전망이다. 현행법상 지주사는 사업 자회사가 상장사면 주식 20%를, 비상장사면 40% 이상을 보유해야 한다.
해당 안건이 통과되면 지주사 스스로 자금을 투입해 자회사의 주식 20%를 취득할 수밖에 없다.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 결국 지주사 설립을 포기할 수 있다는 관측이다. 순환 출자를 해소하기 위해 그동안 대기업에 지주사를 만들라고 권유한 정부 정책도 무색해질 게 자명해 보인다.
가뜩이나 어려운 환경에 직면한 중소·중견기업의 경영을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규제 대상이 상장회사인데 상장회사의 86%가 중소·중견기업이고 대기업은 14%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이 상법개정안이 통과되면 신규 상장을 꺼리는 기업들이 늘어날 것이라고 보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오정근 교수는 “이번 상법개정안은 기업들을 국민들이 직접 경영하는 방식으로 전환하자는 사회주의적 발상”이라며 “투자를 통한 성장보다 경영권 방어가 초미의 과제로 대두되면서 경영 환경이 더욱 악화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enyou@hankyung.com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