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족 함께하는 시간 좋지만 아내 눈총에 주말 ‘N빵 골프족’ 되기도”
- 명절 선물은 조심 또 조심 (사진) 강원도의 한 골프장. /한국경제신문
[한경비즈니스=최은석 기자] ‘김영란법’은 기업 홍보맨들의 삶을 바꾸고 있다. 주말에도 골프장·워크숍·세미나 등에 다니느라 바빴던 40, 50대 홍보맨들이 집으로 돌아왔다.
비교적 젊은 홍보맨들은 저녁 술 약속이 줄어든 대신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져 좋다는 의견이 많다. 하지만 주말이면 이른바 ‘삼식이(집에서 세 끼를 먹는 남편)’에 대한 부인의 눈총이 무서워 일부러 밖에 나간다는 외로운 가장도 있다.
김영란법이 바꾼 기업 홍보 문화를 소개한다.
◆홍보맨들 ‘본보기 안 되려면 주의해야’
김영란법이 시행되기 전 거의 매번 주말마다 골프장을 찾았던 모 기업 A 홍보담당 임원은 요즘 주말이 싫다. 수십 년간 대화할 시간조차 부족했던 아이들 눈치에다 주말마다 집에서 세 끼를 해결하는 남편 때문에 부쩍 스트레스를 받는 부인 때문에 좌불안석이다.
A임원은 몇 주 전부터 사내 직원과 주말마다 이른바 ‘N빵 골프(각자 계산)’를 즐기고 있지만 후배도 주말 골프를 썩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다.
A 임원은 “골프가 거의 유일한 취미 활동이었는데 주말 골프 약속이 뚝 끊기면서 마땅한 즐거움을 찾지 못하고 있다”며 “이번 기회에 등산으로 취미를 바꿔 볼까 싶다”고 말했다.
모 홍보담당 B 팀장은 최근 부인과의 관계가 눈에 띄게 돈독해졌다.
김영란법 시행 전에는 거의 매일 만취해 집에 돌아오기 일쑤였지만 최근엔 귀가 시간이 부쩍 빨라졌기 때문이다. 저녁 약속이 전보다 크게 줄었고 술자리를 갖더라도 ‘반주를 곁들인 1차’ 정도로 간단하게 끝나는 게 대부분이다.
B 팀장은 “평일엔 술, 주말엔 골프로 도무지 쉴 시간이 없었지만 요즘엔 주말에 늦잠도 자고 외동딸과 가까운 공원 등을 찾으면서 삶의 활력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모 기업 홍보담당 C 부장은 요즘 약속 장소에 나가기 전에 해당 식당의 메뉴를 미리 파악하는 습관이 생겼다. 요리 하나에 2만원 내외로 즐길 수 있는 메뉴를 살펴보는 등 인원수에 따라 식사 규정 상한액을 넘기지 않는 적당한 요리를 미리 정해 두고 나간다.
C 부장은 “김영란법 시행 초기 일부 기업에선 식사 규정 상한액을 초과하면 식사 자리에 없던 직원을 끼워 넣어 회사에 증빙하는 편법을 동원한다고 들었지만 최근엔 본보기로 걸려들지 않기 위해 대부분의 기업이 조심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김영란법은 기업들의 대관 업무 환경도 바꿨다.
기업 대관 업무는 정부 부처 공무원이나 국회 보좌관 등과 접촉, 회사와 관련한 중요 정보를 수집하거나 기업의 생각을 전달하는 게 주된 업무다. 하지만 김영란법 시행 이후 선물은 물론 식사 등 만남 자체를 극도로 꺼리는 케이스가 증가하면서 기업들의 고충도 늘고 있다.
모 기업에서 대관 업무를 담당하는 D 부장은 “김영란법 이후 공무원 등과의 만남 자체가 어려워졌다”며 “식사보다 간단한 티타임이나 전화·메일 등으로 소통하기를 원하는 사례가 늘면서 속내를 터놓고 얘기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배우자 직업 철저히 파악 중
김영란법은 금융업계의 영업 활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다.
은행원들은 김영란법 대신 지난해 7월부터 개정된 은행법을 적용받는다. 개정 은행법은 은행 임직원이 고객에게 정상적 수준을 초과해 재산상 이익을 제공하는 등 불건전 영업 행위를 하지 않도록 내부 통제를 강화한 내용을 담고 있다. 고객을 대상으로 한 식사와 선물은 3만원, 경조사비는 20만원을 넘으면 안 된다.
시중은행들은 개정 은행법과 김영란법 시행 이후 고액 자산가 등 VIP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명절 선물에 더욱 신경을 쓰고 있다.
모 시중은행 홍보팀 E 과장은 “명절 선물을 은행법에 따라 철저히 3만원 한도에 맞추고 있다”며 “김영란법 시행 이후엔 각 영업점에서 고객 및 배우자 등의 직업을 사전에 파악해 법에 저촉되지 않도록 조치 중”이라고 말했다.
시중은행들은 PB센터를 통해 진행하던 투자 세미나 등 고객 초청 행사도 김영란법 시행 이후 거의 열지 않고 있다. 행사 때 제공하는 식사나 선물이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증권업계도 고객 대상 선물 등에 대해 극도로 조심하는 분위기다. 업계는 다만 명절 선물 운영 규모를 유지하되 김영란법 저촉 여부 등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파악한 후 제공할 방침이다.
모 증권사 홍보팀 F 차장은 “영업상 명절 선물은 고객과의 접점을 찾을 수 있는 중요한 요소”라며 “1년에 두 번 보내는 선물을 없앴다가 마음 상한 고객이 거래를 중단할 수도 있다는 우려 등으로 5만원 이내의 선물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동차업계는 김영란법이 시행되면서 제품 홍보에 특히 애를 태우고 있다.
업계는 김영란법 저촉 시비를 피하기 위해 기자단 주말 시승이나 개별 시승을 제한하는 대신 단체 시승 행사를 진행 중이다. 차량 한 대에 두 명이 탑승해 두 시간 정도 시승한 다음 시승기를 쓰는 방식이다.
기자들 사이에서는 최소 2~3일의 시승 기회가 있던 예전과 달리 단체 행사를 통해 한두 시간 차량을 운행하는 방식으로는 독자에게 충실한 정보를 제공할 수 없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모 자동차 회사 홍보팀 G 부장은 “자동차업계에서는 시승기 등을 통한 차량 홍보 효과가 가장 크지만 김영란법으로 인해 관련 행사를 축소하고 있다”며 “시승기가 줄면서 차량 정보 제공에도 제한이 생기는 등 자동차 회사와 소비자, 언론이 모두 손해 보는 게 아쉽다”고 말했다.
choie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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