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집의 인문학 속으로]
어느 길로 갈지보다 어느 방향으로 갈지가 중요하다
길을 간 사람에게 길을 묻지 마라
(일러스트 전희성)


[한경비즈니스 칼럼=김경집 인문학자, 전 가톨릭대 인간학교육원 교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 가면서 길을 물었다. “예루살렘까지 아직 멀었습니까.” 마차를 끌고 가던 남자가 대답했다. “한 삼십 분쯤 가면 됩니다.”

그는 거의 다 왔다는 안도감을 느끼며 다시 물었다. “마차에 태워 줄 수 있나요.” 마차의 주인은 흔쾌히 그렇게 하라고 응했고 그는 마차를 타고 천천히 풍광을 바라보며 편안하게 예루살렘 가는 길을 즐겼다.



그렇게 한참을 갔다. “이제 다 왔습니까. 여기서 시간이 얼마만큼 더 걸리나요.” “아니오. 한 시간쯤 더 가야 합니다.” 그는 깜짝 놀라 반문했다. “아까는 삼십 분쯤 걸린다고 했잖소. 그런데 이제는 한 시간쯤 걸린다니 말이 됩니까.”

그러자 마차의 주인이 대답했다. “나는 예루살렘 반대편으로 가는 중이라오.” ‘탈무드’에 나오는 얘기다.


골프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거리’와 ‘방향’ 중 어느 게 더 중요하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거리라고 대답한다. 힘차게 친 공이 빨랫줄처럼 쭉쭉 뻗어가는 것만큼 호쾌한 일은 없다. 어쩌면 그 맛에 골프를 즐기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프로 골퍼들은 주저하지 않고 방향이 중요하다고 대답한다. 거리는 끊어서 로드맵을 짤 수 있지만 거리를 욕심내다가 방향이 어긋나면 훨씬 더 많은 값을 치러야 한다.

사실 방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다 안다. 하지만 기분은 거리가 훨씬 더 짜릿하니 10야드만 더 칠 수 있다면 기꺼이 비싼 돈을 들여 새 채를 바꾸고 싶은 게 주말 골퍼들의 심리다.



◆ 앞선 사람의 발자국은 내 것이 아니다


경로 의존성(path dependence)이라는 개념이 있다. 과거의 하나의 선택이 관성 때문에 쉽게 변화하지 않는 현상이다. 흔히 경로 의존성의 사례로 자판의 키 배열을 언급한다.

예전 수동 타자기 시대에 잘 쓰지 않는 활자를 상하 귀퉁이에 배열했던 것은 활자의 팔이 엉키지 않도록 하려는 배려였다. 하지만 전동 타자기나 컴퓨터의 자판은 그런 팔이 없기 때문에 굳이 그런 배열이 필요 없다.

하지만 굳어진 관습은 새로운 배열을 익히는 노력을 불편하게 여기게 만든다. 그래서 여전히 ‘쿼티(QWERTY)’의 자판 배열이 존속한다. 그렇게 우리는 경로 의존적이다.


동물은 훨씬 더 경로 의존적이다. 늘 일정하게 오가는 길을 택한다. 하나는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기 위해서고 다른 하나는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다. 그 경로를 벗어나거나 길을 잃게 되면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동물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다.

여행을 떠날 때 앞서 다녀간 사람의 답사기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은 그런 의존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행이 주는 ‘모험성’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일상의 안전성과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이 되니 그 여행은 낯설되 낯설지 않은 공간과의 해후만을 맛볼 수 있게 되기 쉽다.



◆ 열린 눈 가지면 새 길이 보인다


초행자는 길을 모른다. 하지만 과감하게 앞서 그 길을 갔던 이가 가르쳐 준 길을 포기하고 길을 찾으면 다른 길을 얻는다.

초행자들끼리 함께 어울려 여러 길을 찾으면 더 멋진 골목길과 샛길도 찾아낸다. 함께 길을 찾는 즐거움도 가볍지 않다.

여러 생각과 짐작이 모여 녹고 풀어지며 뜻밖의 길을 찾아내는 기쁨을 나누는 것은 앞서 걸었던 사람의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여정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일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익숙한 것이 주는 편안함을 이기는 것이 여행의 묘미고 가치다. 여행이라는 게 꼭 어디 다른 공간을 찾아가는 것만은 아니다. 생각이 바뀌고 열리는 것이 가능한 모든 것이 여행이다. 그때에도 누군가 일러준 지식에만 의존할 이유는 없다.


경로 의존성을 탈피하려면 열린 시각을 가져야 한다. 열린 시각은 다양한 생각이 허용되고 그것들이 자유롭게 발현될 때 가능하다.


정치적 사유 또한 그렇다. 왜냐하면 정치는 우리의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정치는 바로 그러한 자유를 허용하고 장려하는 사회적 장치여야 한다.

정치란 백성들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 것이라고 공자도 맹자도 가르쳤다. 아무리 공자와 맹자를 배우고 따르며 익혀도 고루한 생각, 선인들이 걸어간 발자국만 그대로 따라 걸으려는 건 시대착오의 지름길이며 결국 나 자신을 상실하는 방황일 뿐이다.

곧게 난 길을 따라 걸으니 방황이 아니라 안정되고 확고한 길인 듯하지만 자신의 시대와 미래의 길을 읽어내지 못하면 그것은 갇힌 훈고학에 불과할 뿐이다.

당시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사람들과 사건들을 씨줄 날줄로 읽어 내는 일은 다양한 길들을 찾아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내가 머무르고 있는 곳과 가야 할 곳에 대한 다양한 영감을 이끌어 준다. 열린 눈에만 새 길이 보인다.


길고 힘겨운 도보 여행 끝에 운 좋게 얻어 탄 수레에 앉은 사람은 잠시 편안하게 주변을 바라보며 즐거웠을지 모르지만 엉뚱한 방향으로 떠내려갔다. 먼저 방향을 물었어야 한다. 그건 길을 걸었던 이의 여정을 묻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열린 눈으로 자신이 가야 할 미래의 길을 가되 자기의 길을 자신의 방식으로, 때론 자기처럼 길을 모르는 이들과 함께 길을 찾으면서 가면 된다. 자기 방향과 길을 모르니 자꾸만 그 길을 걸었던 이의 길을 그대로 따라 갈 뿐이다. 자신이 먼저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갈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