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대한민국 신인맥 r 효성그룹]
‘글로벌·스포츠·젊음’ 리더십 펼친다
‘취임 100일’ 조현준 효성 회장의 키워드 3
(사진)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 (/효성그룹)


[한경비즈니스=이명지 기자] 조현준 효성 회장이 4월 10일 취임 100일을 맞았다. 조석래 효성그룹 전임 회장의 맏아들 조 회장은 지난 1월 1일 회장직에 취임했다. 조 회장의 취임으로 효성그룹은 ‘3세 경영’의 서막을 열게 됐다. 1968년생인 조 회장은 올해 49세로 한국 재계를 대표하는 ‘젊은 리더’로 꼽힌다.

젊은 리더답게 조 회장이 택한 첫 행보는 ‘소통’ 이었다. 조 회장은 지난 1월 3박 4일간의 일정으로 구미·울산·용연·창원에 있는 국내 5개 생산 공장 곳곳을 돌아보고 임직원들과의 스킨십을 강화하는 현장 경영에 나섰다.

효성에 따르면 이번 공장 방문은 조 회장이 먼저 제안했다. 조 회장은 평소 새로운 아이디어는 품질과 기술이 만들어지는 현장에서 나온다며 ‘생산 현장 챙기기’를 중시해 왔다.

조 회장의 소통 노력은 이뿐만이 아니다. 조 회장은 평소 궁금한 점이 생기면 실무 직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의견을 듣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e메일이나 사내 메신저를 통한 대화에도 나
서고 있다.

효성 임직원들의 반응도 긍정적이다. 임직원들은 “신임 회장님을 중심으로 효성의 기업 문화도 젊고 역동적인 문화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현장에 자주 오셔서 생산 공장도 글로벌화에 뒤처지지 않도록 챙기고 교육·인사·복지 등 다양한 방면에서 변화가 있길 바란다”는 의견을 나타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연일 광폭 행보를 벌이고 있는 조 회장에게도 경영에 첫발을 들여놓던 시절이 있었다. 조 회장이 걸어온 길에서 엿볼 수 있는 세 가지 특징을 통해 향후 효성그룹의 청사진을 알아 봤다.

◆조현준의 첫째 키워드 글로벌

조 회장은 학창 시절을 해외에서 보냈다. 조 회장은 1987년 미국 세인트폴스고를 졸업한 후 예일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1996년 일본 게이오대 법학대학원 정치학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조 회장은 효성에 입사하기 전 일본 미쓰비씨상사와 모건스탠리에서 근무하며 폭넓은 해외 경험을 쌓았다.

해외에서의 풍부한 경험은 조 회장을 준비된 경영인으로 성장할 수 있게 했다. 조 회장은 영어·일본어·이탈리아어 등 다양한 외국어에 능숙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 미국·일본·중국 등의 젊은 리더들과 오랫동안 교류해 왔다.

1997년 효성 전략본부에 입사한 조 회장은 외국 기업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효성의 조직을 성과 중심 시스템으로 개편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당시 외환위기로 기업 전체에 혁신적 시도가 필요하던 때였다.

조 회장은 효성T&C·효성물산·효성생활산업·효성중공업 등 4사를 합병하는 과정에 관여해 (주)효성을 탄생시켰다. 그 후 조직을 PG(Performance Group)·PU(Performance Unit)로 구분해 성과 위주의 구조를 효성 내부에 안착시켰다.

조 회장의 글로벌 감각으로 효성은 외국에서도 사업 성과를 올리고 있다. 효성의 핵심 계열사 중 하나인 노틸러스효성은 국내 1위 현금자동입출금기(ATM) 시장점유율을 넘어 미국·유럽·아시아 등에서 시장 지배력을 높여 가고 있다.

조 회장은 미국 현지화 전략을 펼침과 동시에 미국 ATM 교체 시장을 공략할 수 있는 차세대 하이브리드 ATM 개발을 진두지휘했다. 노틸러스효성의 ATM 기기는 현재 미국 전역에서 시
점유율 45%를 차지해 1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조현준의 둘째 키워드 스포츠

조 회장은 국내 재계에서도 유명한 스포츠 마니아로 알려져 있다. 조 회장이 가장 좋아하는 운동은 야구다. 조 회장은 세인트폴고 시절 최초의 동양인 야구팀 주장을 맡았다. 입사 후에도 매주 일요일 직장인 야구단에 참가해 효성의 6년 연속 직장인 리그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현대 야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데이터’다. 선수의 출루율, 팀 승리 기여도 등이 모두 숫자로 기록된다. 동시에 야구는 개인의 역량뿐만 아니라 팀워크가 중요한 스포츠다. 선발 투수가 9이닝을 무실점으로 완투해도 야수들이 점수를 내지 못하면 승리할 수 없다.

조 회장은 야구를 통해 경영 노하우를 배우기도 했다. 조 회장은 “스포츠 경기에서 박빙으로 지더라도 승자는 기억하지만 패자가 얼마나 잘했는지를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승리하는 최고의 기업이 되기 위해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러한 조 회장의 ‘야구 경영론’에 힘입어 지난해 효성그룹은 영업이익 1조원을 돌파하며 ‘1조 클럽’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섬유·중공업·정보통신·건설 등 핵심 사업에서 지속적 수익 창출을 위해 시장 발굴 및 신규 고객 확보에 나서고 있는 조 회장의 경영론이 효과를 낸 것이다.

조 회장은 섬유 부문에서 기술력 향상과 생산 인프라 구축뿐만 아니라 고객 중심의 마케팅 활동을 통해 브랜드 가치를 끌어올릴 것을 강조해 왔다. 또 스판덱스 브랜드인 ‘크레오라’를 글로벌 프리미엄 브랜드로 키우기 위해 마케팅을 지속하고 있다.

중공업 부문은 글로벌 브랜드 파워가 부족한 상황에서 해외 사업 진출을 확대하는 등 시행착오를 거쳤다. 저가 수주, 제품 납기 지연에 따른 원가 상승 등으로 수익성이 악화되며 2010년부터 영업이익이 큰 폭으로 줄어들었다. 2011~2013년 사이 3년 연속 적자를 기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 회장이 2014년 중공업 부문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수익성 위주의 선별적 수주와 신규 글로벌 시장 개척에 매진해 적자의 늪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스태콤(정지형 무효전력 보상 장치), 전력 저장 장치(ESS), 초고압 직류송전 시스템(HVDC) 등 신사업 확대로 이익을 늘리며 그룹의 캐시카우 역할을 하게 했다.

◆조현준의 셋째 키워드 젊음

조 회장은 창업자 조홍제 선대 회장, 조석래 전 회장에 이어 효성그룹을 이끌어 갈 회장직에 지난 1월 취임했다. 이에 따라 효성그룹은 40대의 최고경영자가 이끄는 ‘3세 시대’를 열게 됐다.

재계에서는 조 회장을 글로벌 감각과 경험·인맥을 갖춘 차세대 리더로 꼽고 있다. 조 회장은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를 바탕으로 2014년 한국과 일본 경제인들의 모임인 ‘한일경제협회’ 부회장에 선임됐다.

또 2015년 5월 한일경제협회가 주최하는 ‘한일경제인회의’에 패널로 나서 ‘미래 세대가 바라본 한일 미래상과 협력 방안’을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조 회장은 정보통신기술(ICT) 산업 분야에서의 협력과 한국의 창조경제에 대한 투자 등을 제안했다.

특히 일본에서의 경험담과 사업가로서의 포부 그리고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 느끼는 미래에 대한 솔직한 고민까지 털어놓으며 양국 기업인들로부터 ‘근래 보기 드문 인상적인 프레젠테이션’이란 평가를 받기도 했다.
‘취임 100일’ 조현준 효성 회장의 키워드 3
‘기간산업’ 숙원 이룬 조홍제 창업자, 50년 기틀 세우다
>>56세 나이로 삼성에서 ‘독립’ 결심, 3세까지 승계 이뤄져

조홍제 효성 창업자는 1962년 삼성과의 동업을 청산한 후 56세의 나이에 독자 사업에 나섰다. 일제강점기,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와 삼성물산의 공동 투자자 역할을 했던 조 창업자는 ‘홀로서기’의 필요성을 느끼고 삼성을 떠났다.

효성그룹의 토대가 된 계열사는 효성물산이었다. 조 창업자는 효성물산 기획팀을 통해 사업 타당성을 조사했다. 그 후 효성물산은 조선제분·한국타이어·대전피혁을 인수해 몸집을 키웠다.

조 창업자는 그의 오랜 숙원이었던 기간산업 진출을 결심하고 효성그룹의 토대가 되는 동양나이론 건설을 추진했다. 1966년 11월 3일 동양나이론주식회사 법인 설립을 완료했다. 효성그룹의 50년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조 창업자가 60세 때의 일이다.

효성그룹은 1967년 또 한 번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당시 국내의 타이어코드지용 원사는 레이온 원사가 많았지만 선진국에서는 1950년대부터 나일론 원사를 사용하고 있었다. 효성은 나일론 원사의 타이어코드지를 국내 기술로 대체하면 국내 타이어 산업의 국가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타이어코드지 생산 공장 건설을 추진했다.

1968년 울산공장에서 타이어코드지 558톤을 처음 생산해 내며 효성의 타이어코드 사업의 물꼬가 트이게 됐다.

그룹의 기틀을 다진 조 창업자가 1984년 별세하자 조 창업자의 삼형제 간 계열 분리가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장남 조석래 전 회장이 모체인 효성그룹을 맡고 차남 조양래 회장이 한국타이어, 삼남 조욱래 회장이 대전피혁(현 DSDL)을 들고나왔다.

조 창업자에 이어 효성을 이끌게 된 조석래 전 회장은 효성을 국내 대표 화학소재 기업으로 키워냈다. 원천 기술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포착한 조 전 회장의 추진력으로 효성은 타이어코드·스판덱스 부문에서 ‘세계 1위’ 기업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조 전 회장이 건강상의 이유로 경영 일선을 떠난 후 이제 효성그룹은 3세 시대의 포문을 열었다. 장남 조현준 회장은 섬유 및 화학을, 삼남 조현상 사장은 산업자재와 수입차 사업을 각각 주력으로 이끌어 왔다. 조 전 회장의 차남 조현문 변호사는 2013년 이후 효성그룹 경영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mj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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