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현장]
이어지는 '웜비어 미스터리'…美 ‘대북 강경론’ 다시 수면 위로
미국 전역 분노케한 '어느 대학생의 죽음'
[워싱턴(미국)=박수진 특파원] 17개월 동안 북한에 억류됐다가 풀려난 지 엿새 만에 사망한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를 둘러싼 미스터리가 풀리지 않고 있다. 미국인들의 북한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고 미국 정부의 대북한 정책이 강경 대응으로 전환되는 결정적 변수가 됐지만 어떤 연유에서 일이 이렇게 됐는지 속 시원히 규명해 주는 설명이 없다.

◆“웜비어, 체포 당시 반쯤 웃어”

미국 명문 버지니아대에 재학 중이던 웜비어가 북한 여행을 하게 된 것은 2015년 12월 29일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폐쇄적인 미지의 나라를 경험하기 위해 4박 5일의 일정으로 북한 땅을 밟았다.

여행사인 ‘영 파이어니어 투어’는 “부모님들이 절대 허락하지 않을 여행”이라고 광고했다. 호기심 많은 웜비어는 대니 그래튼 등 다른 10명의 미국인들과 평양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여행을 마치고 이듬해 1월 2일 평양을 떠나려던 웜비어는 순안공항에서 북한 당국자들에게 체포돼 연행됐다. 당시 동료들은 “이번이 널 보는 마지막이구나”라고 농담했고 그도 ‘반쯤 웃는 얼굴’로 순순히 끌려갔다.

죄명은 ‘정치 선전물 절도 혐의’였다. 웜비어는 2015년 마지막 날 여행 동반자들과 술을 마시고 이튿날 새벽 숙소인 양각도 국제호텔 종업원 구역에서 정치적 구호가 적힌 선전물을 떼어냈다.

빨간 바탕에 ‘김정일 주의로 튼튼히 무장하자’라고 흰 글씨로 쓰인 벽보다. 2월 29일 웜비어는 북한 당국이 마련한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범행 사실을 시인했다. 40분간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웜비어는 기자회견문을 읽어 내려갔지만 마지막 5분을 남기고 울음을 터뜨렸다.

북한 최고재판소는 보름 뒤인 3월 16일 그에게 ‘국가전복음모죄’로 15년 노동교화형을 선고했다.

웜비어는 올해 6월 13일 북한에서 풀려나 혼수상태로 고향인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로 돌아왔고 엿새 후인 19일 사망했다.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은 후로 15개월, 북한에 억류된 후로부터 17개월 만의 일이다.

웜비어는 지난해 2월 기자회견에서 북한 선전물을 가지고 가려던 혐의를 인정하면서 “버지니아대의 지 소사이어티(Z Society)에 가입하기 위해 훔치려고 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이 단체가 미 중앙정보국(CIA)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웜비어의 가족들은 웜비어의 이 같은 자백이 북한 정부의 강요로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 소사이어티는 웜비어가 다니는 버지니아대에 실제로 존재하는 유서 깊은 자선 단체다. 그러나 CIA가 조종한다는 주장은 그동안 단 한 차례도 나온 적이 없다.

북한에서 억류 기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평양의 스웨덴 대사관 관계자가 웜비어를 방문한 것은 기자회견이 있은 후 이틀 후인 지난해 3월 2일이 마지막이다. 그 후엔 추가 접견이 이뤄지지 않았다.

웜비어는 기자회견 후 약 보름이 지난 뒤 15년형을 선고받았고 그날 바로 쓰러진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측은 웜비어가 재판 직후 의식불명에 빠졌다고 주장했다. 웜비어가 식중독균인 보톨리누스 중독증에 걸린 뒤 수면제를 복용했다가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설명이다.

웜비어가 귀국 후 입원했던 신시내티주립대병원 측은 웜비어의 뇌사진 중 가장 최근 것인 2016년 4월 촬영본을 근거로 뇌손상이 촬영된 때로부터 몇 주 전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북한 측이 의식불명에 빠졌다고 주장한 시점과 거의 일치한다.

◆나머지 억류자 석방 문제도 현안 부각

의료진은 신체적 학대나 골절의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일단 고문이나 구타로 인한 뇌 손상이 아닐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일각에서는 물고문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지만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게 미 언론들의 보도 내용이다.

북한 당국은 웜비어 사망 사흘 후 공식 입장을 내놓았다. 북한은 6월 23일 성명에서 “생명지표가 정상이었던 웜비어가 1주일도 못돼 급사한 것은 우리에게도 수수께끼”라고 밝혔다. 자신들은 웜비어를 성심껏 치료했지만 급사했다면서 대화를 거부한 미국의 대북 정책 때문에 웜비어가 희생됐다고 주장했다.

웜비어 사망 후 미국 내 여론은 분노로 들끓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잔혹한 북한 정권을 규탄한다”고 말했고 존 매케인 상원 군사위원장은 “김정은 정권이 웜비어를 살해했다”고 비난했다.

4월 말까지만 해도 북한과의 대화 가능성을 언급하던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기조도 강경으로 돌아섰다. 트럼프 대통령은 6월 26일 기자회견에서 “북한 정권은 엄청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며 “북한은 시급히 해결돼야 할 문제”라고 지적했다.

백악관 소식통은 “트럼프 대통령은 이제 더 이상 북한에 대해 말이 필요 없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며 “북에 대한 조치는 예고 없이 전격적으로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의 칼럼니스트 기디온 라크먼은 6월 26일 ‘북한 그리고 미국 우선주의라는 난제’ 제목의 칼럼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미국을 보호하기 위해 서울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이 자기 방식(외교적 대화)으로 북한 상황을 보도록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하지 못하면 선제타격이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 정책에 설득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미 국무부는 조셉 윤 국무부 대북특별대표가 최근 웜비어의 석방을 위해 북한 측과 협상할 당시 북한에 억류 중인 미국인 3명도 만났다고 밝혔다. 현재 북한에 억류된 미국인은 평양과학기술대에 초빙돼 운영 관계자로 일하던 한국계 미국인 김학송 씨, 역시 한국계인 연변과학기술대 교수 토니 김 씨, 사업가 겸 목사인 김동철 씨 등 세 명이다.

ps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