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시장 규모 2019년 3380억 달러 전망… 방산비리보다 육성책 고민해야
올해 7월 인기리에 종영된 케이블방송 드라마 ‘비밀의 숲’에 대기업 회장이 외국 기업과의 비밀스러운 거래로 방위산업 비리를 주도하는 내용이 나왔다.드라마 속에서는 정의로운 검사의 활약으로 비리가 척결되는 결말을 맞았다. 아마도 ‘비리’라는 내용은 방위산업에 대한 지금의 여론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일 것이다.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방위산업과 관련한 새로운 비리가 집중 보도됐다. 그래서 방위산업은 국민들에게 ‘비리로 얼룩져 있다’는 표현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방위산업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단순히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한 차원을 뛰어넘는다. 방위산업은 미래에 한국 경제의 새로운 수출 동력으로 부상할 수 있는 중요한 산업이기 때문이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방산 비리 혐의로 검찰의 대대적인 수사를 받고 있다. 수천억원대 분식 회계를 주도한 혐의 등으로 전 대표가 구속되는 등 국내 최대 방산 기업이 저지른 비리가 연일 매스컴에 오르내리고 있는 중이다.
항공우주산업의 비리 수사로 국내 무기 조달 체계에 부실이 있었는지 의혹이 더욱 커져 가고 있다. 국내 방산업계를 둘러싼 시선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다.
‘수리온’이 보여준 한국 방산의 현실
그러나 마냥 채찍만 가할 것은 아니다. 방위산업은 자주국방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산업군이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연이어 계속되는 북한의 도발로 자주국방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다.
방위사업청은 9월 14일 국내 26개 주요 방산 업체 최고경영자(CEO)들을 초청, 간담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 모인 CEO들은 애로 사항과 함께 방위산업 육성 방안에 대한 의견 교환에 나섰다.
취임 후 처음으로 방산 업체 CEO들과의 공식적 만남을 주선한 전제국 방사청장은 “방사청과 방산 업체는 유기적으로 협력해야 하는 공동운명체라는 것을 인식하고 뼈를 깎는 노력으로 혁신을 추진해 군과 국민 모두에게 존중받는 방위산업으로 거듭나자”고 당부했다.
이번 간담회는 다소 미묘한 시기에 열렸다. 최근 방산업계는 상당히 위축된 상태다. 이는 비단 한국항공우주산업을 둘러싼 수사 때문만은 아니다. 방위산업의 중요성이 간과되고 그 문제를 풀어야 할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방산 업체 관계자들은 간담회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6년 산업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국내 주요 방산 제품들의 핵심 기술 수준은 세계와 큰 격차가 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산업연구원이 4개 무기 체계 분야 12개 주요 방산 완제품에 포함된 46개 핵심 기술 경쟁력을 비교한 결과 국내 기술 수준은 세계 최고 수준(=100)의 71.0으로 분석됐다. 이 중 70 이하가 무려 23개로 절반을 차지한다.
기술력의 격차는 벌어지고 있지만 방위산업의 발전을 지원하는 국내 제도는 여전히 미흡한 상태다. 방위산업의 발전을 막는 여러 장애물이 산적해 있다. 전문가들은 방위산업의 발전을 막는 제도로 최저가 입찰 방식, 군의 과도한 작전 요구 성능(ROC) 등을 꼽는다.
최저가 입찰 방식은 국내 방산의 기술력을 저해하는 첫째 걸림돌로 여겨진다. 2008년부터 전면적으로 도입된 ‘저가 입찰제’는 방산 정책을 실패로 몰아간 주범으로 평가받고 있다.
정부가 경제 논리를 내세워 기술력 대신 가격 위주로 입찰에 나서면서 기업이 기술 개발보다 가격경쟁에만 주력하는 환경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여기에 현실에 맞지 않는 군 측의 과도한 ROC 또한 방산 기업들의 머리를 아프게 한다.
지나치게 짧은 수주 기간도 문제다. 대표적인 사례는 한국항공우주산업이 개발한 한국형 기동 헬기 ‘수리온’이다.
올해 7월 감사원의 감사 결과에 따르면 수리온 헬기는 엔진과 기체 탑재 장비 등에 문제가 있고 기체 내부에는 빗물까지 새는 것으로 확인됐다. 결빙 성능과 낙뢰 보호 기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이다.
수리온은 2006년부터 6년간 1조2950억원을 투입해 2012년 개발이 완료됐다. 그해 말 육군이 60여 대를 바로 도입해 운용했다.
하지만 실제 개발 기간은 6년보다 더 짧은 약 4년인 것으로 알려졌다. 통상 헬기 1대의 개발 기간이 족히 10년은 걸리는 것에 비하면 상당히 단축된 기간이다. 군 측의 무리한 요구로 지나치게 짧은 기간에 개발된 수리온이 결국 그 민낯을 드러낸 것이다.
앞서 지적한 문제들은 어떠한 방안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오랜 기간 동안 방산 기술의 발전을 저해하는 공통적인 문제로 거론돼 온 작전 요구 성능, 최저가 입찰 방식 등에 대한 개선 방법이 있기나 할까.
입찰 방식, 가격 대신 기술 주목해야
김종하 한남대 정치언론국방학과 교수는 지나치게 까다로운 작전 요구 성능이 현재 국내 방산업계의 발전을 막는 제일 큰 요소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작전 요구 성능은 ‘진화론적 ROC(Evolutionary Required Operational Capability)’ 방식을 적용해 현시점에서 가용한 기술 수준을 고려해 무기 체계를 개발하고 단계적으로 성능을 개량하는 방식을 택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 최저가 입찰 방식 대신 기술력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입찰 방식을 바꿔야 한다. 이를 위해 세계 최고의 방산 기술력을 자랑하는 미국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록히드마틴·보잉 등 세계 선두권을 달리고 있는 방산 기업들을 길러낸 미국의 비법은 ‘더 엄격한 기술의 요구’이기 때문이다.
산업연구원이 낸 ‘주요국 방위산업 발전 정책의 변화와 시사점’에 따르면 미국은 ‘복수 연구·개발 제도’를 통해 경쟁을 유도하고 있다.
2009년 시작된 이 제도는 무기 개발 초기 단계 복수의 시제(생산 직전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성능 점검용 기체)를 만들어 경쟁을 통해 최종 시제를 선정한다.
초기 단계에서 개발비용이 추가되더라도 시제 개발 간 업체의 경쟁을 유도해 총순기비용(무기 체계의 획득·개발·생산·운용·유지·폐기에 이르는 전 단계에 걸쳐 소요되는 비용) 절감과 무기 체계 품질 양상, 단일 업체가 실패했을 때 리스크 감소, 기술력 향상 등을 꾀하고 있다.
또 미국 정부가 기술 개발 프로그램을 제안하면 이를 기초로 기업이 자체 투자비용 비율을 스스로 설정해 제시하는 ‘공동투자 연구·개발 제도’도 참고할 만하다.
방대한 방위산업을 지휘할 ‘컨트롤타워’의 부재도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다.
2006년 당시 정부는 방위사업청을 국방부에서 독립시켰다. 이 방사청이 방위산업을 지휘하기에는 힘이 부친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컨트롤타워의 역할론은 방위사업청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난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기존에 방위산업을 총괄하던 방위사업청에 힘을 실어주는 방안을 우선 고려할 수 있다.
장원준 산업연구원 방위산업연구부장은 방위사업청의 위상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가칭 ‘국방과학기술기획평가원’과 같은 조직을 신설해 국방 기술 연구·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공무원의 비리 개입 소지를 차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방사청 직원들의 ‘전문성’은 끊임없이 제기되는 문제점 중 하나다. 당초 방사청 조직은 군인들이 50%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2015년 불거진 이른바 ‘통영함 납품 비리’로 군인의 비율이 대거 낮아졌다. 이후 방사청은 군인 비율을 30%로 줄이고 일반 공무원의 비율을 70%로 늘리겠다는 개혁안을 발표한 바 있다. 성장하는 세계 방산, 수출 동력 확보해야
하지만 이공계·방산업계 전문가가 아닌 행정직 공무원 및 군인들이 여전히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 순환형 보직제까지 더해지며 업무의 전문성을 키우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는 분석은 여전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순환형 보직제도 대신 전문형 보직제도를 택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통령 직속의 ‘방산비서관’을 신설해 방산을 총괄하는 인간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방산업계 비리가 불거질 때마다 나오는 단골 해결책이다. 방산비서관의 신설에 그치지 않고 힘을 실어주는 것 또한 필요하다.
김종하 교수는 “방산비서관제를 신설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방위사업청장이나 국방부 전력자원관리실장을 통제하기 위해 차관급 이상의 수석이 이 자리를 맡아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방위산업은 전통적으로 자주국방을 위해 필요하지만 미래 경제를 이끌 ‘신성장 동력’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실제로 방산의 세계시장 규모는 날로 성장하고 있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방위산업 세계시장 규모는 2015년 약 2950억 달러에서 2019년 약 3380억 달러까지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상위권에는 여전히 미국 및 서유럽 업체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다.
미국과 서유럽 업체들을 이기기 위해선 기술력 확보가 최우선이다. 방산업계에 대한 무조건적인 질책보다 육성 방안을 함께 고민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돋보기 - 방위산업, ‘비리’보다 ‘진흥’으로 방대한 방위사업법, “수술이 필요한 시기”
방위산업 발전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방위사업법’ 자체에 대한 근본적 수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정치권을 중심으로 나오고 있다.
현재 ‘방위사업법’은 2006년 방위사업청의 설립과 함께 방위 사업의 구매 절차, 육성, 교역 촉진, 기술 연구·개발 지원을 위해 제정됐다. 전문가들은 현재 방위사업법은 무기 체계의 소요·획득은 물론 국방과학 기술의 진흥 및 조달까지 모두 총괄하는 지나치게 방대한 법이라고 분석한다.
백승주 자유한국당 국회의원 주최로 9월 19일 ‘방위산업 발전법 제정을 위한 토론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백 의원은 “방위사업법이 제정된 지 10년이 지난 지금 단일 법으로 방위산업을 총괄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며 “방위사업법이 방위 사업 수행의 투명화와 방위력 개선 사업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보니 ‘육성’에 관한 부분이 소외됐다”고 말했다.
방위사업법 개선 방안의 핵심 골자는 산업 전 분야의 기본법을 담당하는 ‘방위사업법’과 함께 방위산업 발전을 위해 업체 및 이해관계인의 의견을 법률화해 ‘방위산업 발전법’을 제정하는 것이다.
김혁중 법무법인 광장 변호사는 현 방위사업법과 상호 보완할 수 있는 제정안을 마련할 것을 주장했다.
김 변호사 역시 현 방위사업법에 대해 방위산업 ‘육성’에 법적 근거가 미흡하다는 점을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전체 64개 조항 중 방위산업 육성을 위한 조항은 6개 내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또 토론회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방위산업의 발전을 위해 성실 실패 제도 도입, 하도급 업체의 귀책사유에 대한 업체의 책임 범위 제한, 지체상금(계약 기간 내에 계약상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을 때 내는 금액)의 범위 제한 규정 도입을 통한 국내외 업체 역차별 구조 시정 등을 제안했다. 백승주 국회의원실 관계자는 “조만간 세부 조율을 통해 입법을 추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경비즈니스=이명지 기자 mj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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