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텔, 이스라엘 모빌아이 인수…퀄컴도 50조원 M&A 베팅 [한경비즈니스] 전 세계 대형 반도체 기업들이 초대형 인수·합병(M&A)을 통해 ‘타도 한국’을 외치며 살벌한 생존 게임을 벌이고 있다.
이들의 견제 대상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다. 이대로라면 한국 반도체 기업과의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의 발로다.
특히 한국 기업이 지금은 메모리 반도체에 주력하고 있지만 과거처럼 빠른 속도로 비메모리 반도체에서도 급성장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원한 반도체의 맹주 인텔은 자율주행 관련 반도체 기업을 천문학전인 금액에 인수했다. 반도체 설계에서 세계 최고 기술력을 가진 ARM의 주인은 일본 소프트뱅크가 됐다. 모바일 반도체의 초강자 퀄컴은 지동차용 반도체 기업을 파격적인 가격에 사들였다.
◆미국→일본→한국, 그 다음은?
그러다 보니 업계에서는 ‘반도체 세계대전’이란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전쟁의 시작은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반도체 시장은 히타치·도시바·NEC·후지쯔·미쓰비시 등 일본 전자 대기업들의 독주 체제였다.
당초 인텔 등 미국 기업이 세계시장을 선도해 왔지만 대형 컴퓨터의 등장이 D램 수요를 증가시키면서 일본 전자 기업들이 대거 시장에 뛰어든 것이다. 자본과 기술을 바탕으로 1980년대 중반 드디어 일본은 미국을 제치고 D램 시장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D램의 주된 소비처가 대형 컴퓨터에서 PC로 급격히 이동하면서 1990년대 초반까지 업계를 장악하던 일본의 아성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PC용 D램에 중요한 것은 저비용과 소형화. 이 틈새를 파고든 것이 바로 한국 기업이다. 주역은 삼성전자와 하이닉스(현 SK하이닉스)다.
이들 업체는 PC용 D램을 싼값에 대량생산함으로써 2000년대 중·후반 일본 기업들을 제치고 메모리 시장의 우위에 설 수 있었다.
삼성전자는 세계 반도체 기업 매출 톱10 순위에 1990년대 초반까지는 오르지 못했지만 1995년 6위에서 2006년 2위로 오르며 단기간 내 선두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1위는 ‘반도체 황제’ 인텔이었다.
이 사이 일본 기업들은 순위권에서 하나둘 자취를 감췄다. 남은 것은 낸드플래시를 생산하는 도시바뿐이었지만 이 역시 2017년 매각 절차를 진행, SK하이닉스가 참여한 한·미·일 연합 컨소시엄에 팔렸다.
삼성전자의 질주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1992년 이후 무려 25년간 세계 최정상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았던 ‘맹주’ 인텔이 삼성전자에 매출 1위 자리를 내주는 대이변이 일어났다.
정보기술(IT) 분야 리서치 기업인 가트너가 1월 4일 발표한 세계 반도체 시장점유율의 예비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7년 삼성전자 반도체 매출은 전년 대비 52.6% 성장한 612억 달러(시장점유율 14.6%)로 같은 기간 577억 달러(13.8%)를 기록한 인텔을 앞질렀다.
삼성전자가 최근 호황을 누리는 메모리시장을 선도적으로 이끈 반면 PC용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독보적으로 개발해 온 인텔은 PC 시장의 쇠락에 맥을 못 췄다는 분석이 나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올 초에는 지난 10년간 생산된 인텔 CPU에 보안 관련 설계 결함이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인텔 측이 해당 논란을 일부 시인하면서 ‘인텔 보안 결함’ 파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상황이다. 업계에서는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는 반응도 많다.
반도체업계 한 관계자는 “인텔 하면 ‘외계인(우수한 실력자)’을 잡아다가 기술을 개발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투자에 돈을 아끼지 않았는데 최근 들어 기술보다 자본 확충에 더 힘을 쏟고 있다는 얘기가 계속 나왔다”며 “인텔이 세계 1등 지위에 안주해 전문가들의 경고를 무시한 결과”라고 말했다. (사진) 지난해 12월 워싱턴 경제클럽에 참석한 스티브 몰렌코프 퀄컴 CEO. 퀄컴은 네덜란드 차량용 반도체 회사 NXP 인수에 470억 달러를 쏟아부었다.
◆메모리 시황에 좌우…‘불안한 1위’
이변은 또 있었다. SK하이닉스가 2017년 세계 반도체 기업 순위에서 전년 대비 무려 79% 증가한 283억 달러(점유율 6.3%)로 마이크론 테크놀로지·퀄컴·브로드컴을 누르고 3위에 오른 것이다. 2006년 7위로 신고식을 치른 SK하이닉스가 11년 만에 이룩한 성과였다.
하지만 삼성이 세계 1위 자리를 얼마나 길게 유지할 수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주대영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메모리 반도체 시장이 주기적으로 변동 폭이 심하게 요동치는데 반해 이를 상쇄할 수 있는 시스템 반도체 생산은 저조하다”며 “더욱이 D램과 낸드플래시 메모리의 세계시장이 2018년 이후 침체할 것으로 전망돼 삼성전자의 1위 유지를 더욱 어렵게 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상황은 더욱 흥미진진하다. 전 세계 대형 반도체 업체들은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기 위해 합종연횡으로 생존 게임에 나섰다. 가격 경쟁이 심화하면서 몸집 불리기로 매출 증가를 꾀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최근에는 모바일을 넘어 자동차·초인종·공장설비까지 광범위하게 무선통신용 반도체 칩이 사용되면서 업계의 디지털 기술 확보 경쟁도 격화되고 있다.
이 중 자율주행차는 사각지대까지 감지할 수 있도록 세분화된 616개의 칩이 필요하기 때문에 반도체업계 최대 시장으로 꼽힌다.
◆규모의 경제 달성해야 기회 잡는다
2017년 3월 인텔은 매출액 대비 매수액이 무려 42.74배나 되는 엄청난 금액을 주고 이스라엘 모빌아이(Mobileye)를 품에 안았다. 이 회사는 자율주행차 관련 반도체를 다루는 기업으로 인텔은 향후 미래차 산업에서 패권을 노린다는 계획이다.
소프트뱅크는 앞선 2016년 7월 영국의 반도체 설계 기업인 ARM을 매수했다. 이 회사는 스마트폰, 디지털 가전, 게임, 자동차 등에 사용되는 프로세서를 설계하는 곳으로 퀄컴이나 대만 미디어텍 등 팹리스 기업(반도체 설계·개발 전문 회사)으로부터 지식재산권(IP) 사용료를 받고 있다. 2020년에는 약 300억~500억 개의 인터넷 디바이스에 ARM의 프로세서가 사용될 것이란 전망이다.
퀄컴 역시 2016년 10월 네덜란드 NXP를 470억 달러에 매수해 현재 매각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NXP는 자동차용이나 인증 단말용 등의 반도체가 주력인 기업이다.
한태희 성균관대 반도체시스템공학과 교수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전통적인 시장이 파괴되면서 산업과 비즈니스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며 “기존 반도체 플레이어들은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창업이나 자체 개발보다 시간적·경제적으로 훨씬 유리한 M&A를 선택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투자비용이 엄청난 만큼 규모의 경제를 달성할 수 있는 업체들이 더 주도권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복병은 또 있다. ‘반도체 굴기’를 기치로 내건 중국은 향후 반도체 시장의 키 플레이어가 될 전망이다.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반도체 시장이지만 기술적 한계로 대부분을 해외에 의존해 왔다. 하지만 중국 정부가 2014년부터 ‘국가 집적회로(IC) 산업 발전 추진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며 반도체 국산화를 강화하고 나서면서 중국 반도체 산업은 지속적으로 고속 성장 중이다.
아직까지는 팹리스 기업 수준에서 경쟁력을 갖추고 있지만 중국이 제조 공정과 기술 개발, 반도체 설계 파트에서 해외 유수의 반도체 기업의 고급 엔지니어를 고액 연봉으로 모시기 경쟁(헤드헌트)에 돌입하면서 향후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주목해야 한다.
주 연구위원은 “중국 정부의 적극적 개입으로 중국 기업들이 자국 내에서 자급자족할 수 있는 IC 서플라이 체인이 완전히 구축된다면 한국을 비롯한 해외 기업들에 엄청난 부정적 영향을 몰고 올 것”이라고 말했다.
‘반도체 전쟁’의 공동 저자 이정 유진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중국의 푸젠진화반도체나 칭화유니와 같은 기업은 반도체 시장점유율에서 이미 세계 상위권으로 급부상했고 공격적인 M&A와 우수 인력에 대한 스카우트를 통해 그 성장세를 더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아직 기술력은 우리가 위에 있다는 근시안적인 시각으로는 중국의 공세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없으며 보다 더 큰 그림을 그려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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