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2014년 ‘통일대박’론에 속속 출시…남북관계 경색되며 투자자들 외면
남북 해빙 무드, ‘왕년의 통일펀드’ 지금은?
[한경비즈니스=이정흔 기자] 살얼음판을 걷던 남북 관계가 최근 급진전되고 있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해빙 무드가 조성되는가 싶더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북미 정상회담도 가시화되고 있다. 남북 관계에 모처럼 훈풍이 불어오며 ‘왕년의 통일펀드’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살아나고 있다.

2014년 박근혜 정부의 ‘통일대박론’에 힘입어 20여 종의 통일펀드가 우후죽순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2016년 2월 개성공단 폐쇄를 시작으로 남북 관계가 급속도로 얼어붙으며 통일펀드에 대한 관심 또한 사그라졌다. 그러면 잊힌 통일펀드의 현주소는 어떨까. 다시 한 번 ‘통일펀드’에 기대를 걸어봐도 좋을지 짚어봤다.

◆ ‘통일 대박’ 외치던 통일펀드 존재감 바닥

1990년 독일 통일을 전후해 독일의 주식시장은 큰 폭의 상승세를 보였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후 약 5개월간 주식시장 상승 폭만 해도 40%다. 물론 통일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조정 장세가 이어지는 등의 쓴맛을 겪기도 했지만 3년 뒤인 1993년을 전후로 독일 증시는 다시 한 번 큰 폭으로 뛰어올랐다. 통일 이후 11년간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독일 지수는 322% 상승했다.

2014년 초 박근혜 전 대통령의 ‘통일은 대박’ 발언에 국내 증권가는 그 누구보다 빠르게 반응했다. 독일의 사례를 우리 증시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통일 이후 북한 개발과 자원 활용, 북한 주민들의 구매력 확대 등을 기대할 때 국내에서도 관련 기업들이 크게 수혜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신영자산운용을 비롯해 하이자산운용·교보악사자산운용 등이 발 빠르게 흐름에 동참했다. ‘통일’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펀드 상품 20여 개가 잇따라 출시됐다. 신영자산운용의 ‘신영마라톤통일코리아펀드’, 하이자산운용의 ‘하이코리아통일르네상스펀드’, 교보악사자산운용의 ‘교보악사우리겨레통일펀드’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펀드는 대부분이 통일 이후 북한이 단계적으로 개발되는 과정에서 수혜가 예상되는 종목들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 신영마라톤통일코리아펀드의 주요 포트폴리오에는 삼성전자$현대모비스$포스코$하나금융지주$KB금융 등이 포함돼 있다. 하이코리아통일르네상스펀드는 SK텔레콤$NH투자증권$동일방직 등이 편입돼 있다. 특히 신영자산운용의 통일펀드는 가치 투자 전도사로 잘 알려진 허남권 대표(당시 부사장)가 직접 책임운용역을 맡아 더욱 큰 기대를 모으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펀드가 출시된 첫해만 해도 ‘통일’이라는 새로운 키워드에 대한 투자자들의 관심은 꽤 높았다. 금융 정보 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2014년 3월 신영자산운용의 첫 통일펀드가 출시된 후 3개월 만인 2014년 6월 설정액이 441억원에 달했고 2015년 6월에는 509억원의 자금이 유입되기도 했다.

하지만 ‘통일 대박’에 대한 기대는 2016년 2월 개성공단 폐쇄, 7월 한$미 양국의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 배치 결정 등에 따른 중국의 보복 조치로 된서리를 맞았다. 연이은 북한의 도발로 리스크가 커지면서 통일펀드의 자금 유출은 더욱 가속화됐다. 통일펀드의 연평균 수익률은 2017년 11월 기준 14%대로 나쁘지 않았지만 설정액은 2016년에만 117억원의 자금이 빠져나갔고 2017년에도 91억원이 줄어들었다. 통일펀드의 본래 취지를 살리지 못한 채 ‘정치 테마 펀드’의 대표 주자로 이미지가 굳어지게 된 것이다.

◆ 북한 올림픽 특사 이후 자금 유입 조짐

결과적으로 3월 16일 기준 총 21개의 통일 관련 펀드 중 설정액 10억원 이상의 펀드는 단 4개에 불과하다. 신영자산운용 3개 펀드와 하이자산운용 1개 펀드다. 교보악사자산운용은 지난해 설정액이 지속적으로 감소하면서 소규모 펀드로 쪼그라들어 펀드 유지에 의미가 없다는 판단 아래 통일펀드를 청산했다.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4개 통일펀드의 설정액은 290억원에 불과하다. 가장 덩치가 큰 ‘신용마라톤통일코리아C4’가 126억원 규모, ‘신영마라톤통일코리아I’가 93억원, ‘신영마라톤통일코리아A’가 55억원이다. 하이자산운용의 ‘하이코리아통일르네상스ClassC-I’의 설정액은 16억원이다.
남북 해빙 무드, ‘왕년의 통일펀드’ 지금은?
수익률은 양호한 편이다. ‘신영마라톤통일코리아C4’의 최근 1년 수익률은 16.22%, 최근 3년 수익률은 26.30%를 기록하고 있다. ‘하이코리아통일르네상스ClassC-I’도 최근 1년 수익률 19.72%를 기록 중이며 3년 수익률은 33.72%에 달한다. 이들 펀드 대부분이 주로 삼성전자를 비롯한 우량주를 중심으로 종목이 구성돼 있어 최근 증시 호조세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최근의 남북 관계 개선에도 불구하고 존재감이 거의 사라진 통일펀드의 미래는 불투명해 보인다. 우선 하이자산운용이 연내 통일펀드 청산 방침을 결정했다. 통상 설정액 50억원 미만의 펀드는 ‘자투리(소규모) 펀드’로 분류된다. 지난해 11월 금융위원회가 발표한 ‘소규모 펀드 해소 방안’에 따라 자산운용사들은 올해 말까지 소규모 펀드의 비율을 공모펀드 대비 최종 5% 이내가 되도록 자투리 펀드를 정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교보악사자산운용에 이어 하이자산운용까지 통일펀드를 청산하면 신영자산운용의 통일펀드만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일단 신영자산운용 측은 ‘통일펀드 1호 브랜드’라는 점에 가치를 두고 장기 투자 관점에서 끌고 나가겠다는 방침이다.

실제로 신영자산운용은 최근 평창 동계올림픽 특수에 힘입어 미미하지만 자금이 유입되는 조짐이 보이고 있다.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둔 1월 ‘신영마라톤통일코리아플러스’ 펀드에 1407만원의 자금이 유입됐다. ‘신영마라톤통일코리아30’ 펀드에도 2804만원이 순유입됐다. 두 펀드 모두 설정액이 10억원에도 못 미치는 형국이지만 최근 통일펀드 상당수가 환매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의미가 있는 자금 유입이다. 향후 북$미 정상회담 등을 계기로 남북 관계가 급물살을 타게 된다면 비슷한 신규 펀드가 나올지도 시장의 관심을 끌고 있다.

허남권 신영자산운용 대표는 “통일펀드는 정치 테마 펀드가 아닌 ‘통일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관점에서 만들어진 장기적 관점의 가치 투자 펀드”라며 “통일이 되기 전 남북 관계 개선으로 수혜를 볼 수 있는 산업에 투자하는 것이 골자인 만큼 단기적인 성과에 연연하지 않고 설정액과 상관없이 펀드를 청산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