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 찾아왔다 하나둘 정착…애착과 커뮤니티로 이어가 [한경비즈니스=김영은 기자] 한경비즈니스와 매력도시연구소가 한국의 대표적인 매력 도시로 선정한 곳은 양양이다.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20%를 넘어 초고령사회에 접어든 양양이 어떻게 매력 도시가 됐을까.
현재 양양의 키워드는 단연 ‘서핑’이다. 서퍼들은 양양을 ‘한국 서핑의 성지’라고 부른다. 양양이 서핑 성지로 ‘뜬’ 가장 중요한 요인은 다른 삶의 방식을 찾아 떠난 서퍼들이었다.
몇 년 전부터 파도를 찾아온 서퍼들이 양양에 자리 잡더니 이제 해변은 서퍼들의 터전이 됐다. 3~4년 전부터 황량했던 해변거리에 알록달록한 서핑 숍과 카페·식당·수제 맥줏집이 들어섰다. 노인들이 대부분이었던 마을은 이제 젊은 세대의 새로운 기운으로 가득했다.
“파도만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어요.” 어디에선가 본 드라마 대사 같지만 양양 서퍼들의 삶을 표현하기에 이보다 정확한 문장은 없다. 이들은 파도를 찾아 양양에 정착했고 파도가 좋은 날엔 가게 문을 닫고 바다로 가 올라탈 파도를 기다린다. 겨울에는 파도를 찾아 해외로 떠난다. 파도를 따라다니는 유목민, 노마드(nomad)의 삶이다. 어떻게 양양이 서퍼들이 찾는 매력 도시가 됐을까. 양양의 변화를 일으킨 주인공인 서퍼들을 만났다.
◆① 파도 최우선주의, 서퍼와 보헤미안 비즈니스 “양양의 라이프스타일은 파도 최우선주의죠. 모든 생활 방식이 파도에 맞게 이뤄져요. 관광객뿐만 아니라 서핑 숍·식당·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이주민들도 80%가 서퍼들이죠. 파도가 좋은 날엔 가게 문도 닫고 서핑 하러 가고 파도가 좋지 않은 날에만 일하거나 다른 볼일을 봐요. 서퍼들의 하루와 삶을 결정하는 것은 무조건 파도예요.”
이원택 레트로션 대표는 액션스포츠 잡지 편집장이라는 자리를 내려놓고 2년 전 양양으로 떠났다. 겨울엔 강원도에서 보드를 타고 여름엔 양양에서 서핑을 하는 그가 굳이 서울에 살아야 할 필요는 없었다.
20년 넘게 스노보드·서핑과 함께 살아온 이 대표는 지금까지 수집한 만화책과 오락기계를 모아 만화카페 겸 오락실인 레트로션을 열었다. 5분만 걸어 나가면 인구 해변의 철썩거리는 파도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날씨가 좋지 않아 파도를 탈 수 없는 날에는 레트로션이 서퍼들의 아지트로 사용된다. 잡지 편집장의 경력을 살려 1인 액션스포츠 잡지인 ‘리얼매거진’을 발행하기도 한다. 서핑과 기록이 가장 중요한 삶의 방식이었던 그에게 양양만큼 이상적인 곳은 없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야 가능할 것 같은 삶이지만 그렇지 않다. 이 대표는 최근 가족의 생계를 위해 목수 일을 시작했다. 리얼매거진은 전국 모든 스포츠 숍에 무료로 배포하고 있고 레트로션은 여름에만 붐비기 때문에 수익도 일정하지 않다.
“서핑을 모르는 사람들이 볼 때는 멀쩡한 직장을 ‘때려치우고’ 내려왔다며 한심하게 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행복을 위해 이 삶을 스스로 택한 거예요. 양양으로 이주해 오는 인구, 토지의 임대료 상승 등 양양에서의 삶을 동경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숫자로 증명되고 있잖아요.” 이 대표의 말이 맞다. 2016년 양양군 관광객 수는 전년보다 176만 명이 증가한 873만9600명으로 집계됐다.
이 대표처럼 많은 사람들이 기존 삶의 방식 대신 새로운 삶을 택해 모인 곳이 바로 양양이다. 레트로션과 같은 건물에 자리 잡은 카페 ‘서퍼스파라다이스’의 채수원 대표도 “서핑은 인생을 걸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서핑이 주는 만족감은 2년 전 스물아홉 살의 대기업 직장인을 양양으로 이끌었다. 채 대표는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갔던 시절 바리스타로 일했던 경험을 살려 카페를 차렸다. 여름엔 거의 매일 장사를 하지만 누군가 파도가 좋다고 하면 당장 보드를 들고 바다에 뛰어든다.
하지만 레트로션의 이원택 대표나 이미 양양에 터를 잡은 1세대 서퍼들이 있었기에 채 대표도 선뜻 양양행을 결정할 수 있었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지방 생활에 대한 걱정은 전혀 없었어요. 이미 도시의 삶 대신 파도를 타는 삶을 택한 서퍼들이 얼마나 만족하며 사는지 알고 있었거든요.” 채 대표를 양양으로 불러들인 사람은 레트로션의 이원택 대표다. 둘은 스노보드와 서핑을 함께 타는 취미공동체였다.
양양에 서핑숍이 처음 생긴 것은 2009년이다. 정형섭 블루코스트 대표는 양양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양양 서퍼 1세대다.
“바다 수심이 깊으면 파도가 잘 안 생겨요. 그런데 양양은 수심이 낮고 평평한 편이어서 파도가 높고 물이 깊지 않아 쉽게 접근할 수 있죠.” 매일같이 서핑하기 좋은 해변을 찾아다니던 정 대표가 자리 잡은 후 한적했던 마을은 순식간에 서퍼들의 천국이 됐다.
특히 정 대표처럼 스노보드 자격증이 있거나, 선수였거나, 스노보드 관련 업계에서 일했던 이들이 양양 서핑 1세대로 자리 잡았다.
“스노보드가 서핑에서 파생된 스포츠이기 때문에 스노보드를 함께 타던 친구들이 대부분 서핑으로 옮겨 왔어요.” 하나둘 모인 서퍼들을 보며 또 다른 서퍼와 멋진 삶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양양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2017년 기준 현재 양양군에만 41개의 서핑 레저 시설이 등록돼 있다.
비슷한 삶의 방식을 공유하는 이들 해변을 따라 퍼져나갔고 서로 모여 교류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삶을 동경한 사람들이 유입되면서 지역경제가 활성화되고 건강한 지역공동체가 형성됐다.
이들은 파도를 타는 대신 소박한 일상에서 자급자족하는 실천적 삶을 산다. 파도가 좋은 날엔 모두 해변에 모이기 때문에 가게 문도 열지 않는다. 합리적인 이익 대신 자신이 정한 삶의 방식을 따른다. 이처럼 서퍼들의 비즈니스는 파도에 의해, 파도를 위해 움직인다. 양양이 매력 도시가 된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퍼들의 생활 방식을 이해해야 한다. 서퍼마을은 해변을 따라 남애·인구·죽도·하조대에 분포해 있지만 서퍼들은 ‘양양’과 ‘서핑’이라는 키워드를 공유하며 강하게 연결돼 있다. 바다에서 만나 동질감을 형성하고 사회가 정한 룰 대신 파도가 정한 룰을 따르는 서퍼들은 자신만의 ‘부족 문화’를 이루고 있다.
이원택 레트로션 대표는 이 같은 커뮤니티 문화를 서핑만의 ‘로컬리즘(지역주의)’라고 설명했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동일한 서핑 문화다. 자연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서핑에는 엄격한 룰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연을 사랑해야 하고 올라탈 수 있는 파도는 따로 정해져 있다. ‘한 파도에 한 사람만’ 올라탄다는 룰을 어기면 해외에서는 주먹질이 오가기도 한다. 이 같은 텃세 문화는 자신이 사는 동네에 대한 애착이기도 하다. 바다의 오염을 감시한다든가, 쓰레기를 버리지 못하게 하는 서프 환경보호주의(surf environmentalism)가 등장한 이유다. 바다의 상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스포츠여서 나오게 된 생각들이다. 인구의 서퍼를 뒤로하고 남애로 향했다. 바다를 몇 걸음 앞에 둔 서핑 숍 ‘바루서프’는 서핑 숍, 서핑 스쿨, 서퍼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다. 부부 서퍼인 채화경·김진수 바루서프 대표는 올해로 7년 차, 10년 차 서퍼다.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행복에 대한 고민이 가장 컸어요. 아이가 경쟁하며 크기보다 자연에서 크길 원했죠.” 스포츠 브랜드 디자이너와 마케터로 만난 부부는 결혼 후 2014년 양양에 자리 잡았다. 채화경 대표는 서핑이 사람을 철학적으로 만든다고 말했다.
“보통 다른 스포츠는 사람이 인공적으로 만든 곳에서 진행하고 일정하게 연습하면 어느 정도 그 수준에 갈 수 있어요. 하지만 서핑은 달라요. 파도가 나를 허락해 줄 때만 파도를 탈 수 있죠. 자연이 주는 일체감과 가르침을 동시에 얻을 수 있어요.”
양양을 서핑의 성지로 만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서핑 문화를 ‘길게 바라보는’ 서핑 전도사들이었다. 이들은 입을 모아 서핑을 단순한 사업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삶과 하나가 된 라이프스타일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을 알리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양양으로 간 서퍼들은 좋아하는 일을 하며 행복한 삶을 추구한다. 학군과 직장에 맞춰 살 곳을 정하지 않는다. 레트로션·서퍼스파라다이스·바루서프 모두 합리적인 이익보다 자급자족하며 ‘사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에 더 가치를 둔다. 여기에 도시의 젊은 사람들이 빠르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양양이 ‘쿨’한 서프 문화의 중심지가 된 이유다.
조성익 홍익대 교수는 “양양이 중요한 이유는 서퍼들이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찾아, 자발적으로 모여, 교류하며 산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런 자발적 매력 도시는 한국에 최초로 등장했다. 그는 “단순히 ‘양양이 왜 서핑으로 떴나’, ‘왜 라이프스타일의 도시가 뜨는가’라는 질문을 넘어 생각해 볼 점은 한국의 젊고 유능한 사업가와 크리에이터들이 운영 노하우를 쌓고 있는 최근의 추세”라고 말했다.
서핑은 승자와 패자가 없는 운동이다. 잘 타는 사람보다는 즐겁게 타는 사람이 그 날의 승자다. 양양에서의 삶도 그렇다. 계속해서 무언가를 증명하거나 경쟁해야 할 필요가 없다. 바다에서 파도를 기다리고, 해가 지면 모여 앉아 함께 밥을 먹고,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한다. 생활의 풍족함보다는 마음속의 만족을 위해 산다.
남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삶의 방식일 수 있지만, 서퍼들은 오늘의 행복을 위해 다시 파도를 향해 팔을 저어 나간다.
또한 이들은 가족의 행복을, 자연의 행복을, 커뮤니티의 행복을 생각한다. 아이에게 자연에서의 삶을 선물하기 위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았고. 자연을 위해 매일 쓰레기를 줍고, 선크림 하나를 고를 때도 친환경 제품을 사용한다.
커뮤니티를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만난 서퍼들은 하나같이 마을의 변화에 민감했고, 주민들과의 간격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군청에 직접 찾아가 관과 협력하고, 마을단위로 모여 토론하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행하기도 했다.
누군가에게는 양양이 멋진 관광지일수도, 당장에라도 뛰어들고 싶은 상권일 수도 있지만, 이들에게 양양은 하루하루를 살아나가는 생활권이다. 그렇기에 양양을 지금처럼 좋은 마을로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지향점을 향해 머리를 맞대고 상생을 위해 힘을 합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서핑이라는 하나의 매개체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 양양에 대한 서퍼들의 애착이 양양을 매력도시로 만들었다. ‘양양이 뜬다’는 메시지보다는 이들이 만들어간, 만들어 갈 ‘양양의 변화’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한경비즈니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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