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당국이 금융회사 최고경영자(CEO)의 선임 과정에 현 대표이사의 참여를 사실상 금지함으로써 임원후보추천위원회의 독립성을 강화한 것이다.
당국의 지배구조 개선 방안은 일단 긍정적이다. 셀프 연임을 제도적으로 막을 뿐만 아니라 흔히 ‘낙하산’으로 통하는 외부 인사를 차단하는 효과도 가져올 것이란 기대감이다.
‘말 많고 탈 많던’ 금융지주 회장의 제왕적 리더십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까. “자진 사퇴가 최선의 방법이므로 단호하고 냉정하게 설득 회유해 결심할 수 있도록 해야 함…(중략) 끝까지 사퇴를 거부하면 고소장을 즉시 접수하고 언론사에 신(상훈 당시 신한금융지주) 사장의 비위 사실을 통보해 해임 절차를 밟는 이사회를 소집하도록 지시한다.”
2012년 8월 17일 법정에서는 2010년 신한지주 사태(은행장이 모회사 사장을 검찰에 고소한 사상 초유의 사건) 당시 정황이 담긴 USB 문건 중 일부가 공개된다. 이 문건에는 당시 라응찬 신한금융지주 전 회장과 이백순 전 신한은행장이 신상훈 신한금융지주 전 사장을 밀어내기 위해 작성한 ‘기획 고소’ 등의 치밀한 시나리오가 담겨 있다.
라 전 회장의 각종 불법 비리 행위에 대한 금융 당국과 검찰의 수사 방향을 다른 곳으로 돌림과 동시에 신 전 사장을 배임과 횡령으로 내몰아 라 전 회장의 측근 인사를 등용하겠다는 계획이다.
시나리오는 2010년 9월 당시 이 전 행장이 신 전 사장을 횡령과 배임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면서 현실이 됐다. 금융권을 발칵 뒤집은 신한 사태의 전말이다.
◆신한·KB·하나…‘제왕적 CEO’ 논란
은행장이 모회사 사장을 검찰에 고소한 사상 초유의 사건은 사실상 내부 경영진 간 권력 다툼으로 드러났다. 신한금융은 CEO 자격과 승계 프로그램에 대한 규범을 제정, 사태 재발 방지에 나서면서 경영 정상화에 돌입했다.
하지만 한 회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2014년 당시 KB국민은행의 주전산기 교체 과정에서 감사 결과를 두고 임영록 KB금융 전 회장이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이건호 당시 KB국민은행장과의 내부 갈등이 격화됐다. 이른바 ‘KB 사태’다.
하나금융에서도 2015년 말 김정태 하나금융지주 회장이 국정 농단의 주범인 최순실을 도운 이상화 하나은행 프랑크푸르트 지점장을 승진시키도록 부당한 지시를 내렸다는 의혹(‘하나은행 인사 개입 사건’) 등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정치권과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금융회사 지배구조 개선 의견에 힘이 실렸다.
특히 금융지주사 회장이 자회사의 인사와 경영에 부당 개입해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조직을 장악하는 금융지주 CEO의 ‘제왕적 리더십’이 문제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금융지주사는 은행법 제8조 제1항에 따라 10%를 초과해 주식을 보유할 수 없기 때문에 사실상 지배주주가 없다.
이에 따라 은행의 주식을 100% 소유한 금융지주사 그리고 그 지주사의 회장이 지배주주가 없는 지주사와 완전 자회사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권을 가짐으로써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됐다는 지적이다.
이경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동조합 부위원장은 “국내 금융지주회사 CEO들은 그룹 경영에 막강한 지배력을 행사하지만 이러한 지배력에 비해 책임은 매우 미약하다”며 “이사회 역시 이러한 CEO를 제대로 견제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금융 당국은 2013년 6월 경영진을 견제할 수 있는 이사회의 독립적 운영과 금융회사 임원의 합리적 보수 책정, 회장후보추천위원회의 의무 설치 등이 담긴 ‘금융회사 지배구조 선진화 방안’을 최초로 수립했다. 이후에도 금융지주사 회장의 제왕적 리더십을 막기 위한 금융지주 지배구조 개선도 여러 차례 다양한 방법으로 진행됐다.
하지만 완전한 봉합은 없었다. 이번엔 ‘셀프 연임(CEO가 사외이사를 추천하고 사외이사들이 해당 CEO 선임 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이 논란의 중심에 섰다.
2017년 11월 최종구 금융위원회 위원장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CEO 스스로 자신과 가까운 분들로 CEO 선임권을 가진 이사회를 구성해 본인의 연임을 유리하게 만든다는 논란이 있다”며 “유력한 승계 경쟁 후보가 없는 것도 논란”이라고 말했다.
금융권 CEO의 셀프 연임에 문제가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면서 연임했거나 연임을 앞둔 지주사 회장들과 대립각을 세웠다. 최 위원장의 수위 높은 발언에 금융권은 술렁였다.
금융권 안팎에선 당시 ‘3연임’을 준비하던 김정태 하나금융 회장을 겨냥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이미 연임 절차를 끝낸 윤종규 KB금융지주 회장도 셀프 연임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거수기 논란’ 사외이사 책임성 강화
결국 금융 당국이 또 한 번 칼을 들었다. 금융회사 CEO가 사외이사 선출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법에 명시함으로써 사외이사들을 직접 추천해 스스로 임기를 연장하는 등의 셀프 연임을 사실상 차단하기로 했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3월 15일 김태영 전국은행연합회장 등 금융 전문가들과 한 간담회에서 이런 내용을 담은 ‘금융회사 지배구조 개선 방안’을 발표하며 이 같은 내용을 전달했다.
최 위원장이 발표한 금융회사 지배구조 개선 방안의 핵심은 △사외이사 책임성 강화와 △CEO의 자격 기준 강화다.
먼저 금융위는 사외이사의 책임성 강화를 위해 사외이사와 감사위원을 추천하는 임원후보추천위원회(이하 임추위)에 대표이사의 참여를 금지했다.
앞으로 임추위의 후보군은 사내뿐만 아니라 금융 소비자, 소액주주 등 외부 전문가로부터 의무적으로 추천을 받아 인재풀을 다양하게 구성하도록 했다. 또 임추위의 3분의 2 이상(현행 과반)을 사외이사로 구성하도록 의무화를 추진해 임추위의 독립성을 더욱 강화했다.
또한 사외 주주 연임 시에는 그간의 활동에 대해 외부 평가를 의무화했다. 사외이사의 책임성을 강화해 이사회의 주요 의사결정에 반영하고 ‘거수기’ 논란을 빚었던 사외이사 제도의 내실을 강화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마지막으로 임기가 되면 순차적으로 교체하는 것을 원칙으로 세움으로써 CEO와의 유착을 제도적으로 차단했다.
CEO의 자격 기준을 강화한 것도 이번 개선안의 큰 줄기다. 현재 범죄를 저지르거나 행정 제재를 받으면 CEO나 임원이 될 수 없었다. 앞으로는 금융 전문성과 공정성·도덕성 등의 요건도 충족해야 CEO 자격 기준을 얻을 수 있다.
단 공정성·도덕성 등의 구체적인 기준은 금융회사가 각각 정하도록 했다. 금융위는 이번 개선 방안을 5월까지 규제개혁위원회와 법제처 심사를 거쳐 6월에 감독 규정 개정을 완료할 방침이다.
금융 전문가와 시민단체는 이번 개선 방안을 환영하고 있다. 김득의 금융정의연대 상임대표는 “이번 금융 당국의 지배구조 개선 방안은 한 단계 진일보했다”며 “앞으로 ‘황제 금융’에 대한 예방적 효과가 클 것”이라고 말했다.
김 상임대표는 “문제는 현장에서의 실제 적용”이라며 “개선안이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금융 당국의 관리 감독이 철저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기 집권 막지 못하면 '황제 경영' 계속"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번 개선안 역시 CEO의 ‘황제 경영’을 막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황제 경영의 뿌리를 뽑기 위해서는 CEO의 ‘무제한 연임 제도 폐지’가 우선시돼야 한다는 것이다.
김득의 상임대표는 “아쉬운 점은 무제한 연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이라며 연임 제한을 법제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상임대표는 “신한 사태와 하나은행 인사 개입 사태 모두 대표이사의 장기 집권 체제하에서 문제가 불거졌다”며 “금융지주의 자회사에 대한 영향력이 절대적인 상황에서 대표이사 연임 제한이 없는 것은 연임을 위한 부당한 영향력 행사를 방관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CEO 연임에 제한을 두지 않으면 후보 추천 권한을 이사회에서 독점하고 있는 상황과 맞물려 재임 기간 연임에 대비한 각종 인사 청탁에 관여할 유인을 제공하고 임기 중 자신의 권한을 연임을 위협하는 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사용할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 주요 금융지주의 역대 회장 재임 기간을 보면 KB금융을 제외한 신한금융과 하나금융에서 장기간에 걸쳐 CEO의 연임이 이뤄졌다. 최장 CEO는 라응찬 신한금융지주 전 회장으로, 2001년부터 2010년까지 무려 9년이다.
김 상임대표는 “지금의 제도로는 언제든지 제2의 김승유(하나금융 전 회장)·라응찬(신한금융 전 회장)이 또 나올 수 있다”며 “3년 단임제(연임 및 중임 금지)·3년 연임제(연임 허용, 중임 금지)·3년 중임제(연임 및 중임 허용) 등 연임 제한 규정을 신설해 장기 집권을 견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자 대표가 이사회의 의사결정에 참여해 기업과 대주주를 견제하는 이른바 ‘노동자 이사제도(노동이사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허권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위원장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절차적 정당성을 담보할 제도를 만드는 것은 물론 그 제도의 악용을 막고 실질적으로 낙하산 인사와 부적격 인사를 걸러낼 수 있도록 할 견제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며 “이것이 바로 노동자 이사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라고 말했다.
지배구조 개선 방안 자체에 대한 아쉬움도 있었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는 “금융지주사에 주인의식이 없으면 단기 업적 중심의 경영으로 흐를 수 있다”며 “장기적인 관점에서 경영을 할 수 있도록 기업의 지배구조도 다양한 형태로 이뤄져야 할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민간 영역인 금융회사의 CEO 선출에 금융 당국이 과도하게 개입하는 것보다 금융사별로 자율성을 부여해 문제가 커지면 개입하는 방식으로 가는 게 맞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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