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부족 국가인 아라비아 6개국의 미래를 걱정하며 해수 담수화 분야에서 우수한 기술을 가진 한국에 협력을 제안한 것이다.
1970년대 일본을 필두로 한 프랑스·영국 등 기술 선진국의 뒤에 있었던 한국에 콧대 높은 나흐얀 UAE 왕세제가 손을 내밀기까지는 해수 담수화 시장에 사활을 건 한국 기업의 50년에 걸친 도전이 있었다.
‘파란 황금(블루골드)’으로 불리는 물 시장, 해수 담수화 기술의 중심에 선 한국 기업을 조명했다. #. “44개월이 걸리는 공사를 26개월로 단축하겠다고 했을 때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2000년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항에 수많은 인파가 몰렸다. 길이 90m, 폭 30m, 높이 15m, 중량 3500톤에 달하는 축구장만한 크기의 초대형 증발기가 배에 실려 항구로 들어오는 광경을 목격하기 위해서다.
배의 주인은 UAE의 알타윌라(Al-Taweelah) 해수담수화 플랜트 프로젝트를 수주한 두산중공업이다. 하루 150만 명이 사용할 수 있는 23만 톤의 물을 생산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로 당시 수주 금액만 3억3000만 달러에 달했다.
발주처가 제시한 공사 기간은 정상적인 공사 기간보다 1년 반이나 짧은 26개월이다. 세계 유수의 담수 플랜트 업체들조차 불가능하다며 손을 저었지만 당시 기술 후진국인 한국의 두산중공업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계획으로 프로젝트에 뛰어들었다.
초대형 증발기를 2~4개 모듈로 나눠 출하하는 기존 방식 대신 한국 공장에서 증발기를 완전 조립해 현지에 공급함으로써 공사 기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하는 ‘원 모듈’ 공법을 계획한 것이다.
◆‘오일 머니’에서 꽃핀 담수화 기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세계 최초로 시도한 원 모듈 공법을 통해 발주처가 제시한 공기보다 5개월 이상 건설 기간을 단축하면서 당시 동급 규모의 프로젝트에서 ‘최단 납기’라는 신기록을 세웠다.
이뿐만이 아니다. 완전 조립으로 해체와 조립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량을 줄임으로써 품질 또한 향상시킬 수 있었다. 두산중공업을 지금의 해수 담수화 플랜트 시장 부문 세계 1위로 만든 한 걸음이자 세계 해수 담수화 시장에 ‘메이드 인 코리아’를 알린 위대한 한 걸음이었다.
세계 담수화 시장, 특히 물 부족 국가인 중동이 처음부터 한국 기업에 문을 열어준 것은 아니다.
1970년대 두산중공업을 필두로 주요 중공업 기업과 건설업체들이 오일 머니로 건설 붐이 일어난 중동에 앞다퉈 진출했지만 당시 중동의 담수 플랜트 시장을 장악한 일본과 프랑스·영국 등 유럽 국가의 높은 벽과 맞닥뜨려야 했다.
선진 시공 기술을 습득한 선진국과의 기술 격차는 매우 높았고 기술 후진국 딱지가 붙은 한국 기업이 설 자리는 마땅하지 않았다. 해수 담수화란 노다지를 두고 해외 유명 기업의 하청 업체로 전전하는 세월이 길게 이어졌다.
난공불락 같던 중동은 두산중공업을 비롯해 한국의 유수 기업들이 중대형 프로젝트를 하나둘 성공시키자 신뢰의 문을 열어줬다.
특히 건설사의 힘이 컸다. 당시 정부의 ‘중동 진출 확대 방안’에 따라 중동지역으로 모여든 한국의 건설사들은 물이 부족한 중동에서 건설 사업을 하려면 바닷물을 식수나 산업수로 바꾸기 위한 해수 담수화 작업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고 담수화 기술 습득에 열중했다.
국민 체조로 하루를 시작하는 부지런함에 솜씨까지 좋다는 찬사를 받으며 한국 노동자에 대한 인식을 바꿔 나갔다. 1979년 최초의 턴키 플랜트 공사였던 알코바 담수화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현대건설 등이 대표적이다.
이후 지금까지도 국내 건설업계는 해수 담수화 기술 강자다. 한화건설은 2011년 사우디아라비아 마라픽이 발주한 10억5000만 달러 규모의 발전 담수 플랜트 공사를 수주한 이후 중동과 동남아 시장 등지에서 담수 플랜트 등 사업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GS건설 또한 2014년 튀니지상수공사가 발주한 약 1006억원 규모의 제르바 해수 담수화 플랜트 공사를 수주하는 등 담수 플랜트 시장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보이고 있다. GS건설은 2014년 당시 국내 최초로 해수 담수화 플랜트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를 회수해 전기를 생산하기도 했다.
최근 건설사들은 정부와 손잡고 UAE 시장 확대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정부 출연금 270억원의 연구·개발비로 진행되는 고려대 산학협력단(연구단장 홍승관 교수)의 ‘중동지역 맞춤형 저에너지 해수 담수화 플랜트 기술개발연구단(KORAE)’에는 홍승관 고려대 교수를 중심으로 한국수자원공사와 대우건설·한화건설 등 주요 건설사를 비롯해 총 27개 기업과 기관이 참여하고 있다.
저에너지 해수 담수화 플랜트 설계·시공·운영 기술 확보와 파일럿 플랜트 건설을 통해 중동지역에서 기술 현지화를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연구단은 현재 대우건설·한화건설과 함께 충남 대산에 테스트베드를 건설해 기술 점검을 준비하고 있다.
화학 업체와 섬유 업체도 블루골드 시장인 담수화 기술 분야에 뛰어들었다. 담수 생산방식이 변화하면서 담수화 기술도 고도화했기 때문이다.
2000년대 이후에는 발전소의 열을 활용해 물을 증발해 얻는 증발식 담수 시설보다 역삼투압을 이용한 멤브레인(분리막)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대부분의 시설이 변화하고 있다.
멤브레인은 미세 기공이 뚫려 있는 막을 통해 분리 및 정제하는 기술로, 기공의 크기에 따라 최미세 여과(UF), 미세 여과(MF), 나노 여과(NF) 그리고 역삼투 방식인 RO(Reverse osmosis)로 구분된다. 여기서 RO 분리막은 1nm 이하의 초미세입자를 제거할 수 있는 작은 기공을 뜻한다.
공정별 구성 비율을 보면 현재 63% 이상이 멤브레인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증발식은 31%다. 자연스레 멤브레인의 강자인 화학 업체와 섬유 업체가 해수 담수화 시장에 진입하게 된 것이다. LG화학도 그중 하나다. LG화학은 2017년 고분자 합성 기술과 나노 복합 물질 반응 기술을 적용해 기존 제품 대비 역삼투압 성능을 최대 30%까지 끌어올리는 등 이 분야에서 세계 최고 기술력을 확보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기술력을 바탕으로 지난해 6월 이집트 최대 규모인 30만 톤 규모의 해수 담수화 설비에 수처리 RO 필터를 단독 공급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RO 시장은 도레이케미칼·니토덴코 등 일본 기업과 미국의 다우케미컬 등 메이저 3~4개 회사가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기술적인 진입 장벽이 높은 사업이다.
LG화학은 2014년 4월 미국의 수처리 필터 제조업체인 ‘나노H2O’ 인수를 통해 이 시장에 본격 진출했고 고분자 합성 및 가공 기술과 글로벌 영업·마케팅 네트워크의 강점 등을 활용해 시장 공략을 강화하고 있다.
이 밖에 코오롱은 자회사인 코오롱인더스트리에서 1989년부터 분리막 연구를 시작해 멤브레인 사업을 강화하고 있고 효성 또한 역삼투 기술을 이용한 담수화 엔지니어링 기술로 시장 선도에 나서고 있다. ◆물 부족 심화, 블루골드 시대
한국 기업들이 해수 담수화 시장에 뛰어드는 이유는 간단하다. 미래 인류의 핵심 자원으로 ‘물 산업’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유엔에서 발간한 ‘세계 수자원 개발 보고서’에 따르면 2050년 전 세계 총인구 94억 명 중 42% 정도인 40억 명의 인구가 물 부족에 시달릴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지구상의 물 중 담수 비율이 2.53%에 불과하고 그중에서도 현실적으로 이용 가능한 지하수와 표층수의 양은 전체 담수의 30.5%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물 부족 국가의 위기감은 나흐얀 왕세제의 발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3월 UAE를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에게 “현재 아라비아 6개국에 7000만 명이 살고 있는데, 50년 후면 2억4000만 명이 거주할 것으로 보인다”며 “그때가 되면 석유와 가스는 생산되지 않고 하천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요즘 담수화와 대체에너지 문제에 집중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물 부족 현상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는 지하수 이용, 인공강우, 해수 담수화 설비 등이 있다. 하지만 지하수를 이용하면 수원 고갈, 수질오염 등의 부작용이 뒤따르고 인공강우도 현재로서는 실험 단계다.
반면 바닷물은 현재 지구에 있는 물의 양인 13억8600만㎦의 96.52%(13억5100만㎦)를 차지한다. 해수 담수 플랜트가 물 부족 해소의 실질적인 대안으로 손꼽히는 이유다.
전 세계적으로 물 부족 현상이 심화됨에 따라 바닷물 또는 폐수를 재이용해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수자원을 확보하는 물 산업의 필요성이 점차 크게 대두될 전망이다.
바야흐로 ‘검은 황금’ 석유 시대를 넘어 푸른 황금이라고 불리는 물의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세계 물 사업 조사 기관인 GWI에 따르면 담수화 시장 규모는 2012년 기준 39억 달러 규모에서 2018년 152억 달러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기간 성장률은 무려 389%다.
poof34@hankyung.com
[관련기사] ‘담수화 30년 멤브레인 박사’ 김정학 필로스 대표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