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중앙화된 암호화폐 분산 거래 시스템 등장…‘규제하려면 차라리 지금이 기회다’ (사진)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
[오태민 크립토 비트코인 연구소장, '스마트 콘트랙 ; 신뢰혁명' 저자] 지안 카를로 미국 선물거래위원회(CFTC) 의장은 4월 30일 CNBC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연방 정부 차원의 암호화폐 관련 규제는 가까운 미래에 실행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유는 1935년 CFTC가 설립될 당시의 법으로 암호화폐와 같은 혁신을 다루는 것은 부적절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을 집행하는 규제 당국이 아니라 법을 만드는 의회가 새로운 혁신을 어떻게 포용하고 규제할지에 대해 주도적으로 고민하는 게 선행돼야 한다는 논리다. 카를로 의장은 인터뷰에서 미국 국회의원들 사이에서도 이런 문제의식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이보다 앞선 4월 중순,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규제 당국이나 금융회사들이 암호화폐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접근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그는 분산 시스템을 구현하는 암호화폐의 속성을 전제로 탈중앙화는 금융 산업의 효율성과 보안성을 강화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의 ‘열린 마음론’은 암호화폐를 부정적으로 보는 월가 은행가들과 세계 금융 관료들이 암호화폐를 긍정적으로 재검토하기를 바라는 일종의 권고라고 볼 수 있다.
IMF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무역 시스템을 복구하기 위해 만들어져 기축통화 체제 관리가 주요 업무 중 하나다. 바로 그 IMF의 총수가 나서 달러 체제에 노골적으로 도전하는 비트코인을 규제나 금지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금융권의 시각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셈이다.
규제를 주도할 책임이 있는 이들은 규범이나 감정만으로 암호화폐에 반응할 수는 없다. 규제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비트코인과 암호화폐들의 속성을 깊게 탐구할 수밖에 없다. 재미있는 점은 깊이 탐구하고 나면 침묵하거나 조심스러운 태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라가르드 총재의 지적처럼 비트코인은 탈중앙화된 분산 시스템이다. 분산 시스템에는 마땅한 공격 목표가 없다. 공격 목표를 결정적 실패 지점(single point of failure)이라고 하는데 비트코인 같은 분산 시스템들은 결정적 실패 지점을 제거했다.
분산 시스템에는 ‘특별한 구성원’을 거부하는 철학이 녹아 있다. 특별한 구성원은 때로 정부일 수도 있고 금융회사일 수도 있다. 암호화폐 생태계에서는 ‘신뢰 받는 제삼자’가 바로 특별한 구성원을 대신한다.
-이해가 깊을수록 ‘침묵 혹은 조심’
블록체인과 스마트 콘트랙 플랫폼은 특별한 노드(special nodes) 없이 운영되는 시스템이나 생태계를 지향한다. 정부나 해커들이 잡아 가두거나 마비시킬 공격 목표가 없는 셈이다. 잡아 가둘 주체가 없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비트코인은 달러나 위안화의 위상에 노골적으로 도전하면서도 9년을 끄떡없이 버틸 수 있었다.
암호화폐 거래소의 해킹 사건을 뉴스로 접한 이들은 비트코인의 강건성을 납득하려고 하지 않는다. 비트코인 자체의 문제는 아니라고 해도 암호화폐 전체 생태계라는 관점에서 보면 거래소가 커다란 약점인 것은 사실이다.
거래소가 취약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거래소를 운영하는 주체들이 검증되지 않았다. 암호화폐는 오랫동안 무규제의 환경에서 성장했고 규제들이 사후적으로 뒤따랐다. 이에 따라 거래소 경영진에 대한 검증은 촘촘하게 관리되고 있는 금융회사에 미치지 못한다.
둘째, 정부는 은행에 대한 규제를 통해 거래소를 규제하거나 영업을 제한할 수 있다. 중국 정부가 비트코인 열풍을 꺼뜨릴 때 사용한 카드도 은행 계좌로부터의 송금 차단이었다. 암호화폐가 생활화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금융회사를 통한 송금 차단은 암호화폐 생태계의 성장을 억제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셋째, 이용자들이 거래소를 신뢰하기 때문에 거래소 해킹의 피해가 막대하다. 거래소를 암호화폐 보관소로 장기간 활용하는 것은 금물이지만 사람들은 거래소와 같이 중앙화된 신뢰 시스템에 익숙하다. 비트코인 온라인 거래소가 생긴 이후 한 해도 빼놓지 않고 거래소들은 해커들에게 고객들의 자산을 빼앗겨 왔다. 은행처럼 정부가 보장하는 시스템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무리 강조해도 거래소 해킹은 막대한 소비자 피해를 초래하고 있다.
거래소야말로 신뢰받는 제삼자, 즉 중앙이다. 따라서 정부는 거래소를 규제할 수 있고 해커는 공격할 수 있다. 고객들은 중앙을 신뢰했기 때문에 배신당할 위험에 스스로를 노출시킨 셈이다. 따라서 거래소 문제의 해결책도 이론적으로는 단순하다. 바로 거래소 자체를 분산화하는 것이다. 분산형 거래소는 고객의 자산을 모아둔 서버가 없으므로 정부나 해커가 공격하기 어렵다.
-해킹의 타깃 되는 거래소
다만 분산형 거래소는 암호화폐들 간의 거래에 적합하기 때문에 분산형 거래소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암호화폐 생태계가 일단 확장돼야 한다. 생태계가 심화되면 사람들은 암호화폐를 다양한 경로로 얻을 수 있는데 가까운 이웃에게 용역이나 재화를 제공하고 얻을 수도 있다. 일단 어떤 형태의 암호화폐라도 구할 수 있다면 분산형 거래소를 통해 원하는 암호화폐로 교환할 수 있다.
이런 국면이 온다면 정부는 거래소를 압박하는 방식으로는 더 이상 암호화폐를 통제하기 어렵다. 차라리 거래소를 양성화해 중앙 서버를 둔 거래소에 사람들이 계속 머무르게 하는 편이 당국으로서도 낫다. 카를로 의장이나 라가르드 총재의 말은 발상을 전환해야만 규제도 가능하다는 의미에서 규제 당국에는 일종의 훈수이기도 한 셈이다.
[돋보기]중국인들이 주도하는 분산형 거래 시스템 ‘루프링’
구글 엔지니어 출신인 다니엘 왕 루프링 설립자는 2015년까지 상하이에서 비트코인 거래소를 운영했다. 중앙화된 거래소로는 해킹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자 미련 없이 거래소를 접었다.
이후 그는 루프링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일종의 분산형 거래소 시스템으로, 2017년 암호화폐 공개(ICO)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중국 정부가 ICO를 전면 금지하기 한 달 전이었다. 이후 왕 설립자는 주로 미국에 머무르며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루프링은 아마존 서버를 활용하며 UC버클리대 연구진과 함께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링(ring)은 암호화폐 주문장(oder book)들을 이어 만든 순환적인 고리를 상징한다. 고객들은 수많은 암호화폐 중에서 일부를 골라 각기 다른 교환 비율로 주문장을 올린다. 고객들의 주문장들을 링처럼 연결해 놓으면 에누리가 가장 큰 거래부터 순차적으로 성사시킬 수 있다. 호가 차이에서 생기는 에누리는 고객과 채굴자(ring miner)가 나눠 갖는데 이 모든 과정이 스마트 콘트랙을 이용해 사람의 개입 없이 자동으로 진행된다. 왕 설립자는 루프링을 분산형 거래소라기보다 분산형 지갑에 가깝다고 설명한다. 다른 분산형 거래소와의 차이 때문이다. 무엇보다 거래를 위해 증거금을 보내지 않는다. 잔액을 지갑에 넣어 둔 채 주문장을 내고 거래할 수 있다.
루프링은 그 자체가 오픈 소스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누구나 프로그램을 복사해 분산형 거래소를 시작할 수 있다. 이런 거래소들을 섬처럼 연결한 거대한 네트워크가 완성된다면 주문장들은 거대 시장에서 최적의 파트너를 찾을 수 있다. 즉 암호화폐들의 유동성이 비약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 블록체인의 분산성과 스마트 콘트랙 때문에 암호화폐 생태계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규제 당국의 상상력을 벗어나 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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