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필요한 회의·의미 없는 보고서 등 발목…‘한국형 스마트 워킹’을 찾아라
[한경비즈니스=정채희 기자]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전화벨,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e메일, 회의를 위한 회의까지….
5년 차 이 모 대리는 지난 7월부터 시행된 주52시간 근무제가 반가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걱정이다. PC 모니터에는 오후 6시 퇴근을 알리는 타이머가 째깍째깍, 보고서 마감일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일할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기만 하다.
“오전에 산처럼 쌓인 e메일과 전화 업무만 없었어도…. 김 팀장이 오후 3시 갑자기 소집한 회의만 없었어도….” 야근도 할 수 없고 밀린 업무를 두고 갈 수도 없다. ‘아 이를 어쩌란 말이냐.’
중견기업을 운영하는 김 모 사장도 최근 주52시간 근무제로 노동시간이 단축되면서 행여 생산성이 저하되지 않을지 노심초사다. 노동시간이 단축되면 생산성이 올라간다는 연구 결과도 많다지만 실제 자신의 회사에도 적용될지는 미지수라는 생각에서다.
◆매출 감소·수입 감소 막으려면
2018년 7월부터 주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되면서 생산성 향상이 기업 제1의 과제로 부상했다. 노동시간이 줄어든 대신 업무의 집중도를 높여 생산성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국회 예산정책처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주당 노동시간이 1% 감소하면 노동생산성은 0.79% 상승한다. 이에 따라 정부도 노동시간 단축에 따른 생산성 향상을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생산성 향상은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다. 한국 기업 특유의 ‘늦게까지 오래’, ‘열심히 많이’와 같은 고질적인 노동 문화가 개선되지 않는 한 기업의 생산성 향상에도 한계가 찾아올 수밖에 없다.
조직 관리 전문가들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지상 최대의 딜레마처럼 생산성 제고 없는 노동시간 단축은 헛된 구호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경제·경영 부문 베스트셀러인 ‘생산성’의 저자이자 일본의 조직 혁신 전문가인 이가 야스요는 “생산성을 높이지 않고 노동시간을 단축하면 기업은 상품이나 서비스의 가치가 저하돼 매출이 떨어지고 생산성을 높이지 않고 노동시간을 줄이면 노동자 역시 수입이 감소한다”며 ‘무엇이 문제인지’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매출을 올리는 방법으로 사원을 더 오래 일하게 하는 방법밖에 떠오르지 않는 구시대적인 경영 마인드, 부가가치를 낳을 수 없는 오래된 비즈니스 모델이야말로 (노사가) 해결해야 할 선결 과제”라고 주장한다.
실제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많이 일하는 국가로 손꼽히지만 1인당 생산성은 저조하다.
OECD에서 발표한 ‘2017 고용 동향’에 따르면 2016년 기준 한국의 1인당 연간 노동시간은 2069시간으로, OECD 회원국 평균인 1764시간보다 305시간 더 일한다. OECD 회원 35개국 중 둘째로 노동시간이 길다.
문제는 노동의 질이다. 일하는 시간은 길지만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최하위권이다. 같은 해 한국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28.9달러로 OECD 평균치인 46.7달러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OECD 국가들보다 305시간을 더 많이 일했는데 오히려 17.8달러를 더 벌지 못했다는 얘기다.
무엇이 문제일까. 미국의 경영 컨설팅 업체인 베인앤드컴퍼니의 조사에 따르면 다수의 기업체 중간 관리자 한 사람이 불필요한 회의로 낭비하는 시간은 1주에 평균 8시간이다. 자신의 직무와 상관없는 e메일을 읽고 답하는 데 흘려보내는 시간도 1주에 4시간이 넘었다.
기타 소모적인 시간까지 제외하고 나면 정작 자신의 핵심 업무를 수행하는 데 전념할 수 있는 시간은 1주에 11시간에 불과했다. ◆하루 8.5시간 중 4시간만 생산적
‘더 오래’ 일하는 한국 직장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글로벌 컨설팅 업체인 언스트앤드영은 2012년 한국 직장인 3000명을 대상으로 직장인 생산성 인식 실태 보고서를 펴냈는데, 당시 한국 직장인의 하루 평균 업무 시간은 점심시간 1시간을 제외한 8.5시간으로 집계됐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직장인들은 당시 설문 조사에서 하루 업무 시간 8.5시간 중 ‘불필요하거나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업무에 투자한 시간’은 평균 2시간 30분이었고 업무 시간 중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나 메신저, 개인적 통화 등 업무와 관련 없는 개인적 활동으로 소비한 시간은 1시간 54분이었다고 응답했다.
직장인 3000명이 하루 평균 실제 일한 시간은 4시간으로, 나머지 4시간 30분이 비효율적으로 소비된 셈이다.
직장인이 비효율적이라고 인식한 업무들도 주목할 만하다. 직장인 3000명 중 20.1%가 의사결정, 검토 과정에서의 지연과 대기를 비효율적인 업무 1위로 꼽았다.
이어 상사의 불분명한 지시, 실수, 중복 작업(18.4%), 불필요한 회의와 고객 응대(18%), 의미 없는 보고서 작성(17.9%), 기술·시스템 관련 비효율(12.9%) 등이 자신의 업무 시간을 방해하는 비효율적인 업무 유형이라고 응답했다.
언스트앤드영은 보고서를 통해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소비된 시간을 ‘비용’으로 환산하면 연간 146조원(당시 국내총생산의 11.6%)에 이른다”며 “낭비된 시간의 30%만 줄여도 무려 44조원을 아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오래’가 아닌 ‘제대로’ 일하는 조직으로
반면 지구상의 혁신적인 기업들은 ‘오래’ 일하는 조직에서 ‘제대로’ 일하는 조직으로 변화를 시작한 지 오래다. 페이스북·아마존·넷플릭스·구글처럼 혁신을 무기로 한 글로벌 기업들은 ‘늦게까지 오래’, ‘열심히 많이’와 같은 단순 하드워킹을 요구하지 않는 대신 똑똑하게 생각하면서 일하는 ‘스마트 워크’를 통해 노동 문화의 파괴적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구글은 비즈니스 전략에 단순화를 통합해 경쟁력을 높였고 넷플릭스는 단순한 사용법을 도입해 시장을 장악했다.
또 혁신 기업들은 매주·매달 열리는 정례 회의나 인사고과를 위한 자료 작성 등을 과감하게 없애고 직원에게 ‘낮잠’을 잘 수 있는 휴식 공간을 설치했다. e메일이나 전화 등의 업무 프로세스는 불필요하다고 판단해 단축하거나 과감하게 없앴다.
이제 열쇠는 기업과 노동자에게 주어졌다. 정부는 주52시간 근무제의 시행으로 생산성 향상을 위한 지름길을 열어줬을 뿐이다.
노동시간 단축으로 상품이나 서비스 가치가 저하돼 매출 하락을 걱정하고 있는 경영자라면, 노동시간이 줄어들어 수입 감소를 걱정하고 있는 노동자라면 이제는 ‘한국형 스마트 워킹 모델’를 찾아야 할 때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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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184호(2018.08.06 ~ 2018.08.12)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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