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대비 달러 인덱스 10% 급등, ‘본질적 변화’ 없인 달러 강세 지속 가능성 낮아 [한상춘 한국경제 객원논설위원 겸 한국경제TV 해설위원] 금융 위기 이후 지속돼 온 각국 간의 통화정책 동조화 추세가 깨졌다. 이에 따라 국제 외환시장에서 심상치 않은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주요 6개국 통화에 대해 달러화 가치를 알 수 있는 달러 인덱스(달러평가지수)는 올여름 휴가철 이후 96~97대에 진입해 지난 4월 88에 비해 10% 이상 올랐다.
특히 이 같은 달러 강세는 특히 선진국 통화에서 뚜렷하다. 가장 큰 원인은 매크로 면에서 경기 양극화 현상에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미국은 올해 3분기 경제성장률이 3.5%를 기록해 성장세가 지속됐다. 반면 독일과 일본 경제는 3분기 성장률이 2분기에 비해 마이너스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기축통화 ‘달러’ 위상 흔들려
올여름 휴가철 이후 달러화 강세 추세가 ‘슈퍼 달러’ 시대로 진전될지 여부가 최대 관심사다. 그럴 가능성을 알기 위해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지돼 온 달러화 중심의 브레튼우즈 체제에 대한 이해가 전제돼야 한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1944년 국제통화기금(IMF) 창립 이후 미국의 달러화를 기축통화로 하는 금환본위제도를 말한다.
제2의 브레튼우즈 체제는 1971년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금태환 정지 선언 이후 ‘강한 달러-약한 아시아 통화’를 골간으로 미국과 아시아 국가 간의 묵시적인 합의하에 유지돼 온 환율제를 의미한다.
미국이 자국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 체제를 유지해 온 것은 아시아 국가의 경제발전을 도모하고 공산주의의 세력 확산을 방지하고자 했던 숨은 의도가 깔려 있었다.
평가 기관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국제금융 역사에서 제2의 브레튼우즈 체제는 이런 미국의 의도를 충분히 달성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일부에서 제2의 브레튼우즈 체제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폐허가 된 유럽의 부흥과 공산주의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해 미국이 지원했던 ‘마셜 플랜(Marshall plan)’의 또 다른 형태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제2의 브레튼우즈 체제에 균열을 보이기 시작한 때는 1980년대 초다. 아시아 통화에 대한 의도적인 달러화 강세로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더 이상 용인할 수 없는 위험 수준에 달했다. 당시 레이건 정부는 여러 방안을 동원했다.
결국 선진국 간의 미 달러화 약세(특히 엔화에 대해)를 유도하기 위한 플라자 합의로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었다.
제2의 브레튼우즈 체제가 균열 조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가 됐던 것은 1995년 4월 달러화 가치를 부양하기 위한 역(逆)플라자 합의와 아시아 외환위기 덕분이다.
역플라자 합의에 따라 미 달러화 가치가 부양되는 과정에서 외환위기로 아시아 통화가치가 환투기로 폭락하면서 ‘강한 달러-약한 아시아 통화’ 간의 구도가 재현됐기 때문이다.
그 결과 2000년대 들어 미국의 경상적자가 다시 불거지면서 1980년대 초 상황이 재연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8년 금융 위기가 발생함에 따라 달러화가 더 이상 기축통화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제기됐다.
특히 1980년대 초의 상황과 달리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의 부상으로 달러화가 계속 기축통화로 남아 있는 기본 전제조건인 미국 경제 위상이 갈수록 약화될 것이라는 점이다.
올여름 휴가철 이후 달러 강세가 ‘슈퍼 달러 시대’로 연결될 것인지는 제2의 브레튼우즈 체제가 금융 위기 이후 크게 흔들렸던 요인들이 해소됐는지 여부를 살펴보면 예상해 볼 수 있다.
무엇보다 금융 위기 극복 과정에서 누적된 재정적자와 국가 채무 등과 같은 구조적 문제점으로 달러화에 대한 신뢰가 예전만 못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금융 위기 후유증에 따른 ‘낙인 효과(stigma effect)’라고 볼 수 있다.
◆유로화 약세에 따른 반사적인 성격도 강해
미국 이외 중국을 비롯한 브릭스(BRICs) 국가들이 중심이 돼 다른 국가들의 탈(脫)달러화 조짐도 가세됐기 때문이다. 세계경제 중심권이 이동됨에 따라 현 국제통화 제도가 안고 있었던 문제점들이 갈수록 가시화되고 있다.
즉 중심 통화의 유동성과 신뢰성 간 ‘트리핀 딜레마(Triffin’s dilemma)’, 중심 통화국의 과도한 특권, 글로벌 불균형 조정 메커니즘 부재, 과다 외환 보유에 따른 부담 등이 노출되면서 탈달러화 조짐이 빨라지는 추세다.
트리핀 딜레마는 1947년 벨기에 경제학자 로버트 트리핀이 처음 제시한 것이다. 중심 통화국은 경상수지 적자를 통해 통화를 계속 공급해야 하지만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대외 부채 증가로 신뢰성이 떨어진다.
결국 공급된 통화가 중심 통화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메커니즘이 떨어져 궁극적으로 중심 통화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는 유동성과 신뢰성 간의 상충관계를 말한다.
이론적으로 특정 국가가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통화가치를 평가절하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경쟁국에 전가된다.
대표적인 ‘근린 궁핍화 정책(beggar-thy-neighbor policy)’으로, 특히 달러화와 같은 중심 통화가 평가절하되면 그 충격은 더욱 크게 발생한다. 미국이 양적 완화 정책을 추진할 때마다 글로벌 환율전쟁이 재연될 조짐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글로벌 불균형과 환율전쟁을 줄이기 위해 논의돼 왔던 안정책들은 아직까지 뚜렷한 진전이 없는 상태다. 적자만 규제하던 종전과 달리 금융 위기 이후 가장 획기적인 조치로 평가됐던 흑자를 규제하는 방안도 별다른 진전이 없다.
자본주의 체제 본질상 흑자국들의 반발이 심할 수밖에 없어 2010년 서울에서 열렸던 G20 정상회담에서 합의됐던 경상수지 예시 가이드라인은 실행에 옮겨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국제통화 제도는 실질적으로 시스템이 아니므로 중심 통화의 신뢰성이 크게 저하되더라도 이를 조정할 제도적 장치가 없다.
미국은 경기 활성화 등을 위해서라도 대외 불균형을 시정하려고 하지만 경상수지 흑자국은 이를 조정할 유인이 별로 없어 글로벌 환율전쟁이 수시로 발생한다.
국제통화 제도 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불균형 조정을 강제할 수 있는 ‘국가 간 조약(예를 들어 1980년대 중반 플라자 협정)’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유변동환율제인 현 국제통화 제도가 전제로 하고 있는 자본의 국경 간 자유로운 이동이 신흥국 외환 위기의 주요인으로 지적돼 왔다.
신흥국들은 외환 위기의 역사적 경험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불규칙한 자본 유출입에 대비할 수 있도록 외화보유액을 확충했다. 외화보유액이 10억 달러 증가하면 신흥국이 위기를 겪을 확률이 크게 낮아지는 것으로 추정된다.
현 국제통화 제도의 이런 본질적인 한계가 극복되지 않으면 최근 달러화 강세가 ‘슈퍼 달러’ 시대로 진화될 가능성은 낮다.
올여름 휴가철 이후 달러 강세는 경기 회복과 같은 미국 자체적인 요인도 있지만 이탈리아 예산안 조정 실패, 무질서한 브렉시트 협상으로 유로화가 약세를 보이는 것에 따른 반사적인 성격도 강하다.
이 때문에 세계경제와 국제금융 시장 안정 차원에서 새로운 중심 통화에 대한 필요성은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00호(2018.11.26 ~ 2018.12.02)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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