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포커스]
-‘○리단길’ 원조 경리단길·해방촌, 거리 곳곳 ‘임대 문의’ 빈 상가
홍석천도 폐업 선언한 이태원 상권…‘젠트리피케이션’이 할퀴고 간 자리
[한경비즈니스=안옥희 기자] 전 세계 각국의 음식을 파는 작고 개성 있는 레스토랑들과 외국인들이 가득해 ‘한국 속 외국’처럼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내던 이태원 거리가 달라졌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이곳에는 유명한 식당이 즐비해 식사를 한번 하려면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기본 1~2시간은 기다려야 했던 곳이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서 입소문 난 ‘핫플레이스(명소)’로 불리는 맛집이 많아 젊은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경리단길은 이제 빈 점포가 속출하며 상권이 침체해 예전과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경리단길은 망원동 ‘망리단길’, 연남동 ‘연리단길’, 송파동 ‘송리단길’ 등 뜨는 상권을 지칭하는 ‘○리단길’을 만들어 낸 원조지만 지금은 문 닫은 점포와 임대 문의 안내문만 가득한 폐허로 변모했다. 맛과 멋이 넘쳤던 서울 대표 상권 이태원이 불과 몇 년 만에 몰락한 이유는 ‘상권 내몰림’을 뜻하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현상 때문이다.
홍석천도 폐업 선언한 이태원 상권…‘젠트리피케이션’이 할퀴고 간 자리
◆ 경리단길, ‘○리단길’ 원조 명성 옛말

4월 10일 찾은 서울 용산구 이태원 경리단길은 평일 저녁 시간임에도 인적이 드물어 한산한 모습이었다. 경리단길 초입부터 폐업한 빈 점포들이 눈에 띄었다. 골목길에 있는 6~7개 가게가 나란히 문을 닫은 곳도 있었다. 거의 한두 점포 걸러 ‘임대 문의’ 안내문을 볼 수 있을 정도다.

한 음식점 주인은 “경리단길은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이색적인 메뉴를 파는 맛집이 가득했는데 이제는 다 빠져나가고 빈 가게들만 남았다. 아직 발길이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지만 한눈에 봐도 빈 가게가 많아 사람들이 더 안 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인근 부동산 벽면에는 무권리금 매물들이 가득했다.

A 공인중개업소 관계자는 “이태원은 이제 임대료가 천정부지로 치솟는 단계라기보다 안정화 단계”라며 “과거보다 임대료가 낮은 상가도 많이 나오고 있지만 들어오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귀띔했다.

상권 침체로 이태원을 떠나는 ‘이태원 엑소더스’ 조짐도 감지되고 있었다. B 공인중개업소 관계자는 “최근 이태원에서 개업했다가 상권이 너무 죽어 강남 쪽으로 넘어가는 사람들도 많다. 임대료 널뛰기는 이른바 ‘뜨는 동네’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고 오히려 강남은 임대료 흐름이 거의 똑같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때 이태원의 임대료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2002년부터 이태원에서 13곳의 레스토랑을 운영해 온 방송인 홍석천 씨는 2018년 10월 레스토랑 두 곳(마이타이차이나·마이치치스)을 폐업하면서 이 지역의 임대료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

오랫동안 장사하던 이들도 버티지 못하고 떠나가면서 이태원 상가는 공실이 속출하고 있다.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용산구 이태원 상권의 중대형 상가 공실률은 2013년 2분기 3.3%에서 2018년 4분기 21.6%로 급증했다. 이를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실제 이태원 거리 어디를 가더라도 빈 상가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홍석천도 폐업 선언한 이태원 상권…‘젠트리피케이션’이 할퀴고 간 자리
◆ ‘뜨는 동네’라던 해방촌 한산…상권 침체 후폭풍

이태원에서 만난 상인들은 골목이 특색을 잃고 상권이 침체된 원인으로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지목했다. 하지만 이제 임대료보다 침체된 상권을 살리는 게 더 큰 문제가 됐다. 이태원은 임대료가 치솟아 상권을 일군 상인과 원주민이 다른 지역으로 내쫓기는 젠트리피케이션의 심화 단계는 이미 넘어섰지만 상권 침체라는 후폭풍이 아직 진행 중이다.

경리단길만큼은 아니지만 해방촌 역시 상권 침체가 우려되는 상황이다. 골목 사이사이에 개성 강한 소규모 식당과 소품점들이 있는 해방촌은 경리단길이 뜰 때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옮겨간 곳이다. 이곳 역시 지금은 주말을 제외하고는 방문객이 많지 않고 부동산에 매물이 많이 올라오고 있다는 전언이다.

해방촌 오거리 신흥시장 인근에는 젊은 상인들이 많이 모여 있다. 이곳은 방송인 노홍철 씨가 책방을 열어 입소문이 나면서 화제를 모았다. 노 씨가 2018년 10월 가게를 정리하면서 3년 만에 7억7000만원의 시세 차익을 본 것으로 알려져 다시 한 번 이슈의 중심에 섰다.

노 씨는 2016년 1월 신흥시장 인근 지하 1층~지상 3층, 총면적 174.6㎡짜리 꼬마빌딩을 6억7000만원에 사 주택으로 사용하다가 책방으로 개조해 ‘철든책방’을 열었다. 방송 스케줄이 없을 때만 영업했음에도 SNS 입소문 효과로 젊은이들이 많이 찾으며 인근 상권도 살아났다. 노 씨는 지난해 10월 가게를 14억4000만원에 팔고 한 달 뒤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에 있는 122억원짜리 빌딩을 산 것으로 알려졌다.
홍석천도 폐업 선언한 이태원 상권…‘젠트리피케이션’이 할퀴고 간 자리
맘편히 장사하고픈 상인모임(맘상모)의 쌔미 활동가는 “이태원 임대료 문제는 한풀 꺾였다. 2015년께 가수 싸이가 가지고 있던 한남동 테이크아웃드로잉 건물 분쟁 때가 임대료 갈등 문제가 최고조에 달한 시점이었다. 이태원은 젠트리피케이션 후폭풍 과정 중에 있는 것으로 보면 된다.

신사동 가로수길이나 이태원은 광풍이 한 번 불고 나서 ‘이대로 가면 망하겠구나’를 피부로 느끼고 건물주와 세입자들이 이제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단계로 보면 된다. 노홍철 씨는 투자자로서 큰 차익은 실현하고 부담 없이 나간 것”이라고 말했다. 쌔미 활동가는 임대료 문제가 사그라진 배경에 건물주와 세입자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고 설명했다.

건물주가 상권 침체 상황에서 섣불리 임대료를 많이 올렸다가는 세입자가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예전만큼 장사도 잘되지 않는다. 공실로 비워 두느니 세입자가 있는 편이 낫다는 판단으로 임대료를 올리기보다 적당한 수준으로 조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해방촌 신흥시장 부근에서 가죽 공방을 운영 중인 박기동 씨는 “임대료는 지자체와 시장이 상생 협약을 맺은 이후 거의 오르지 않았다. 젠트리피케이션을 방어하는 것은 안 해도 될 정도다. ‘백종원의 골목식당’ 방송에서 신흥시장이 다뤄지고 난 다음 요식업계 상권이 살아나니까 인근 공방도 같이 살아났다. 이태원뿐만 아니라 어느 상권이나 마찬가지지만 보통 이렇게 한 번 소비하면 다시 오는 주기가 좀 길어지지 않나. 그래서 거품이 빠지고 나니 경쟁력 있는 곳은 장사가 되고 안 되는 곳은 안 된다”고 말했다. 박 씨는 “소상공인들끼리 남산 벚꽃을 보고 오는 사람들을 해방촌으로 유입시키려고 문화 콘텐츠를 개발하는 중”이라고 덧붙였다.

이태원이 이제 젠트리피케이션 현상뿐만 아니라 자연적인 상권 쇠퇴기에 접어들었다는 시각도 있다. 김준환 서울디지털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지금 상권 침체 문제는 젠트리피케이션이 전적인 원인이라기보다 곳곳에 개성 있는 동네가 많이 생겨 이태원이 매력을 잃은 면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상권을 활성화하려면 재방문율을 높여야 하는데 이태원은 입지 등 여러 가지 콘텐츠 부분에서 봤을 때 이제는 차별화 포인트를 찾기 어렵다”며 “과거에도 이태원 상권은 떴다가 죽었다가를 반복했다. 이태원 상권 자체가 이제는 성장기에서 성숙기를 넘어 쇠퇴기 단계에 접어든 것 같다”고 진단했다.
홍석천도 폐업 선언한 이태원 상권…‘젠트리피케이션’이 할퀴고 간 자리
현재 전국 지자체는 젠트리피케이션을 방지하는 다양한 대책을 내놓고 있다. 서울은 보증금 임대료 연 5% 이상 인상 금지, 부산은 리모델링비 최대 2000만원 지원, 전주는 역세권 건물주와 세입자 상생 협약 추진 등이다. 하지만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 등 임대료 인상을 제어하는 법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지 않는 한 이 같은 대책은 미봉책에 그친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젠트리피케이션 방지도 중요하지만 현상이 휩쓸고 지나가면서 쇠락한 상권을 다시 살리기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경리단길에서 폐업을 고려 중인 한 카페 주인은 “한 번 죽은 상권은 살리기가 정말 어려운 것 같다. 예방도 중요하지만 이태원은 사후 대책이 절실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상생 협약도 좋지만 강제력이 없어 유명무실하다. 결국 가장 큰 문제는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 등 관련법으로 임대료 인상을 제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준환 교수는 “젠트리피케이션 부작용을 막기 위해 정부나 지자체가 개입해 임대료 인상 상한선을 두는 방법도 있지만 공실 발생 우려 등 반드시 순기능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은 임대료 문제가 건물주와 임차인 간 지역사회의 약속이어서 함부로 올리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조물주 위 건물주’라는 말이 횡행하며 건물주 마음대로 올릴 수 있다. 결국 우리 의식과 문화가 성숙해지고 바뀌어야 한다. 일본처럼 정부나 지자체 개입 없이도 서로 정해진 규범에 따라 협의하는 방법이 제일 좋다고 본다”고 말했다.

쌔미 맘상모 활동가는 “이태원은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가져오는 좋지 않은 결과의 대표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문제는 이태원 말고도 이렇게 젠트리피케이션 후폭풍으로 상권이 침체 위기에 놓인 곳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서울에선 삼청동도 공실률이 높아지고 있고 도시 재생 사업을 추진하는 을지로나 종로구 익선동에서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ahnoh05@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20호(2019.04.15 ~ 2019.04.21)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