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주총에서 CEO·의장 분리 바람, ‘이사회 중심 책임 경영’ 확산
삼성 이어 LG·SK까지…재계에 ‘이사회 의장’ 늘어나는 까닭?
[한경비즈니스=김정우 기자] 해외 투자자들이나 기업들이 바라보는 한국 기업들의 지배구조는 독특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대부분의 해외 기업들은 회사를 이끄는 최고경영자(CEO)와 이를 견제하기 위한 이사회가 완전히 분리된 채 운영된다. 하지만 한국은 이와 정반대다.


대표이사가 이사회를 이끄는 ‘의장’까지 겸직하는 곳이 많다. 이른바 ‘한국형 지배구조’라는 단어까지 생겨난 배경이다. 그런데 이런 한국만의 독특한 지배구조 체제에 점차 변화의 조짐이 일기 시작했다.


최근 국내 대기업들의 경영 행보 중에서 눈길을 끄는 부분은 바로 ‘이사회의 독립성 강화’다. 지배구조 개선과 경영 투명성 제고라는 과제를 던진 현 정부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기업들이 이 같은 결정을 내린 것으로 풀이된다.

◆최태원 SK 회장도 이사회 의장 물러나

삼성에 이어 LG와 SK 역시 지난 3월 열린 주주총회를 통해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을 각각 따로 선임했다. 앞서 삼성은 지난해 3월 주총을 통해 삼성전자와 삼성물산의 대표이사와 이사회를 의장을 분리한 바 있다.


각 부문 경영자들이 사업에 보다 전념하고 이사회를 실질적인 의사결정 기구로 정착시키기 위한 결정이었다. 올해는 국내 5대 그룹 중 LG와 SK가 이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우선 LG부터 살펴보면 LG전자는 지난 3월 주총에서 권영수 (주)LG 부회장(최고운영책임자·COO)를 이사회 의장직에 올렸다.

그간 LG전자는 2017년 3월부터 조성진 부회장이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을 겸직하고 있었다. 2년 만에 이를 분리한 것이다. 의장직을 내려놓은 조 부회장은 향후 경영에 전념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경영진과 이사회가 분리되면 대표이사는 경영진 대표로 경영 전반에 집중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경영자를 관리하고 감독하기 위해 존재하는 이사회 의장도 마찬가지다. 대표이사가 이사회 의장을 겸직하면 불거질 수 있는 ‘거수기’ 논란을 일정 부분 방지할 수 있다.

또 이사회 측면에서 독립적인 의사결정이 가능해지는 만큼 경영 투명성을 높일 수 있는 효과도 나타난다. 경영자의 횡포나 비리를 미연에 방지해 그만큼 주주 가치도 제고할 수 있게 된다.

LG디스플레이도 올해 주총에서 권 부회장을 이사회 의장에 앉혔다.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을 함께 맡았던 한상범 부회장은 경영에만 집중하게 됐다.

SK도 마찬가지다. 최태원 회장이 그룹 지주회사인 SK(주) 이사회 의장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SK(주)의 기존 회사 정관은 대표이사가 이사회 의장까지 겸직하도록 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최 회장이 그간 대표이사와 의장을 겸직해 왔다.

이런 가운데 3월 열린 주총에서 정관 변경을 통해 대표이사로 제한했던 이사회 의장 자격 요건을 폐지하기로 했다.

◆실질적인 견제 역할 가능할지 의문도


그를 대신할 이사회 신임 의장엔 염재호 고려대 전 총장이 이름을 올렸다. 그가 기업 경영과는 다소 거리가 먼 ‘정통 학자’ 출신인 데도 불구하고 의사회 의장을 맡은 것을 두고 재계에서는 ‘이례적 인사’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SK 측은 “그간 주주 친화 경영을 선도해 온 SK가 글로벌 투자 환경에 맞는 이사회 역할과 권한 강화에 나선 것”이라며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주력 계열사인 SK하이닉스도 지주사와 발걸음을 같이했다. 같은 날 박정호 SK텔레콤 사장을 이사회 의장으로 선임하고 이석희 SK하이닉스는 대표이사만 맡기로 했다.
삼성 이어 LG·SK까지…재계에 ‘이사회 의장’ 늘어나는 까닭?
이처럼 대기업을 중심으로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 분리 바람이 부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된 배경으로는 정부의 정책 기조가 주된 요인으로 꼽힌다.

현 정부 출범 이후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주축이 돼 대기업의 지배구조 개선과 투명 경영을 끊임없이 강조해 왔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편 중 하나로 이사회의 독립성 강화를 주문했다.


이사회가 제대로 작동하면 오너 경영자의 전횡이나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등의 편법을 사전에 차단하는 장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기업들 역시 이런 정책 기조에 발맞추기 위해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을 분리하는 결단을 내린 것으로 풀이된다.

엘리엇매니지먼트와 같은 글로벌 헤지펀드와의 마찰을 사전에 피하기 위해서라는 견해도 나온다. 해외 기업들은 이사회의 독립성을 철저하게 보장한다.


여기에 익숙한 해외 투자자들은 국내 기업들의 이사회 구성이나 지배구조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는 국내 기업들과 마찰이 생겨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앞으로도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을 분리하는 기업이 더 늘어날 것이란 시각이 지배적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특히 올해 주총에서는 SK의 움직임이 가장 눈에 띄었다”며 “총수이자 오너 경영인인 최 회장이 이사회 의장직을 내려놓은 만큼 다른 기업들의 향후 행보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를 지나치게 의식해 무리하게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 분리를 추진하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안상희 대신지배구조연구소 본부장은 “대기업의 이런 모습은 긍정적이지만 모든 기업들이 다 분리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감한 추진력이나 투자 결정이 필요한 바이오나 벤처기업 등은 경영진과 이사회 의장이 겹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신속한 결정이 필요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이 표면적으로만 분리됐다는 얘기다. 한 재계 관계자는 “올해 이사회 의장이 된 이들 대부분이 오너가의 측근이나 우호적인 성향을 띠고 있는 인물들로 구성됐다”며 “실질적인 견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enyou@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20호(2019.04.15 ~ 2019.04.21)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