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과 볼륨 대신 활동성 추구, 빅토리아시크릿 지고 유니클로 뜨고
컵 대신 노와이어 택한 여성들…변화하는 속옷 시장
[한경비즈니스=이명지 기자] 캔디스 스와네포엘, 아드리아나 리마 등 세계적인 ‘빅시 엔젤(빅토리아시크릿의 간판 모델)’들을 배출한 미국의 브랜드 ‘빅토리아시크릿’의 속옷 패션쇼를 더 이상 TV에서 볼 수 없게 됐다.

지난 5월 10일 빅토리아시크릿의 모기업인 L브랜드의 레스 웩스너 최고경영자(CEO)는 “우리의 전통적인 패션쇼를 재검토하기로 했다”며 TV 중계를 중단한다고 밝혔다.

이는 쇼의 인기가 예년 같지 않기 때문이다. 2011년만 해도 1000만 명을 웃돌았던 패션쇼의 시청자는 지난해 330만 명에 그쳤다.

빅토리아시크릿의 난제는 패션쇼뿐만이 아니다. 세계 여성들의 ‘워너비 속옷’이었던 과거와 달리 2016년부터 매출액 감소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속옷을 착용하는 여성들의 가치관이 변했기 때문이다. 정형화된 미를 가진 빅시 엔젤들의 워킹이 더 이상 여성 소비자들의 속옷 구매욕을 자극하지 않게 된 것이다.
컵 대신 노와이어 택한 여성들…변화하는 속옷 시장
◆속옷 브랜드부터 SPA까지, 대세는 ‘노와이어’

이러한 추세는 국내도 예외는 아니다. 속옷 시장이 침체됐다는 평을 듣고 있지만 ‘편한 속옷’의 판매량은 급증하고 있다. 남영비비안의 속옷 브랜드 ‘비비안’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5월까지 브라렛과 노와이어 브래지어의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12%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속옷 브랜드들은 노와이어 브라, 브라렛 등의 제품군을 확대하고 있다.

와이어를 제거한 노와이어 브라, 와이어와 훅까지 제거해 주로 운동용으로 사용하던 브라톱의 수요가 급증했다. 여기에 겉옷과 매치가 가능한 레이스 소재의 브라렛은 와이어와 훅이 없어 압박을 최소화하고 실용성까지 더해져 인기를 끌고 있다. 하의류에서는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사각 팬티’가 여성용으로도 출시됐다.

비비안의 브라렛은 등을 감싸는 홀터넥 스타일에 곡선 패턴의 레이스를 더했다. 홑겹 원단과 부직포 컵이 가볍고 통기성이 좋아 쾌적하다. 비비안의 노와이어 브라는 봉제선이 보이지 않는 심플한 스타일로 디자인됐다. 겉옷이 얇아지는 계절에도 속옷 라인이 비치지 않는다. 넓은 날개로 등을 감싸 편안한 착용감을 주면서 라인을 매끄럽게 정리해 준다.

글로벌 브랜드 ‘유니클로’는 편안한 이너웨어 라인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와이어리스 브라는 국내에서는 2010년 ‘와이어리스 브라 뷰티 소프트’를 시작으로 2016년 ‘와이어리스 브라 뷰티 라이트’ 라인업을, 지난해에는 유니클로의 기능성 소재 ‘에어리즘(AIRism)’으로 만든 ‘릴랙스’ 라인업을 출시했다. 최근에는 여성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연구와 유니클로만의 기술을 통해 ‘신개념 와이어리스 브라’를 출시했다.

‘2019 와이어리스 뷰티 라이트’의 가장 큰 특징은 가슴 모양에 따라 브라컵이 조정된다는 점이다. 물결 모양의 컵 상부는 가슴에 부드럽게 밀착되며 컵 아래 부분에 내장된 합성수지는 압박감 없이도 안정적 실루엣을 연출한다.

유니클로는 이너웨어와 브라컵이 부착된 ‘브라톱’ 콘셉트를 처음 선보인 브랜드이기도 하다. 브라톱은 따로 속옷을 착용할 필요가 없어 여성들의 만족도가 매우 높은 스테디셀러다. 고유의 기술에 기반해 가슴을 입체적으로 받쳐줘 라인을 완성한다. 또 브라컵 밑부분에 있는 고무 밴드가 가슴을 안정적으로 지지한다.

유통업계의 자체 상표(PB) 상품들도 편한 속옷을 원하는 소비자들을 겨냥했다. 이마트의 패션 PB 브랜드 ‘이마트 데이즈’의 ‘더 편안한 데이즈’ 언더웨어의 누적 판매량은 2016년부터 지난 3월까지 130만 장(100억여원)을 돌파했다. 특히 브라톱의 누적 판매량이 85만 장을 돌파해 매출액 기준으로 80억원을 기록하며 매출 증가세를 견인했다.

여성용 사각팬티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기존 여성용 삼각팬티는 아랫배 압박과 Y존을 자극해 불편하다는 지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인기를 끈 ‘슬림 9 네모팬티’는 사각형 팬티로 제작돼 자극을 줄이고 긴 밑위와 넓은 밴드로 아랫배 자극을 없앴다. 기존의 여성용 드로즈가 속옷 위에 있는 속바지 역할을 했다면 이제는 생리대 탈부착까지 가능해 좀 더 편한 팬티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컵 대신 노와이어 택한 여성들…변화하는 속옷 시장
◆타인의 욕망 아닌 ‘나의 만족감’ 채우는 속옷

노와이어 브라 등 ‘편한 속옷’이 인기를 끄는 것에는 ‘자기 몸 긍정주의’의 확산이 큰 영향을 끼쳤다. 자신의 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자는 인식의 영향으로 착용감이 속옷 선택의 중요한 요소가 된 것이다.

유니클로 관계자는 “타인이 아닌 ‘나의 만족감’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와이어리스 브라와 브라톱 등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이너웨어가 지속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고 말했다.

페미니즘 기조도 여성들의 속옷 선택 공식을 바꾸고 있다.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편한 속옷’이 인기를 끄는 이유에 대해 “남성에게 보여지는 속옷, 욕망의 대상이 될 만한 속옷에서 편안하게 입을 수 있고 활동성이 높은 속옷으로 목적과 기능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과거 여성의 신체가 매력을 극대화해 남성에게 ‘평가받는 대상’이었다면 이제는 여성 스스로가 자신의 몸이 원하는 것에 좀 더 집중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속옷 시장의 판도를 뒤바꾸고 있다. 미국에서 빅토리아시크릿이 매출액 급감으로 고민하는 반면 아메리칸이글의 서브 브랜드 ‘에어리’는 10대들이 가장 선호하는 브랜드로 떠올랐다.

에어리는 포토샵을 사용해 매끈하고 날씬하게 모델들의 몸을 고치는 대신 보정 없이 현실적인 착용 사진을 공식 이미지로 사용하면서 10대 소비자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 냈다.

‘편한 속옷’이 인기를 끌자 시장에 진출하는 플레이어들도 증가했다. SPA 브랜드와 유통사의 PB 브랜드가 속옷 시장에 뛰어들면서 경쟁이 치열해졌다.

여기에 최근엔 텀블벅 등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을 통해 여성용 드로즈와 같은 ‘젠더리스’ 속옷의 펀딩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소비자들의 선택의 폭은 한층 넓어졌지만 속옷 전문 브랜드로서는 변화하는 시장을 따라가야 한다는 과제를 안게 됐다.

한편 와이어를 제거한 제품을 입기보다 정확한 사이즈를 아는 것이 속옷을 편하게 입는 것의 출발점이라는 전문가들의 조언도 있다.

강지영 남영비비안 디자인 팀장은 “무조건 노와이어 브라나 여유 있는 사이즈를 입는 것이 편한 것은 아니다”며 “정확한 사이즈를 찾는다면 핏을 살리면서도 편안하게 속옷을 입을 수 있다”고 말했다.

mjlee@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28호(2019.06.10 ~ 2019.06.16)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