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일 ‘화이트리스트’서 한국 배제 vs 한 “경제보복 조치에 단호 대처”
-한국도 일본을 ‘백색국가’에서 제외
-WTO에 일본 제소 방안 추진
-‘지소미아’ 폐기 카드 만지작
전면전으로 치닫는 한·일 경제전쟁
[한경비즈니스=최은석 기자] 일본의 경제 보복과 과거사 갈등으로 점화된 한·일 갈등이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 절차 간소화 국가)’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하자 한국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을 중단하는 카드까지 만지작거리며 ‘강대강’으로 맞서는 중이다.

화이트리스트 배제 발효 시점이 8월 말이라는 점 등을 고려할 때 한·일 양국 외교 당국 간 논의는 물론 미국의 중재자 역할이 확대되며 최악의 상황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하지만 일본이 선제적 초강수를 두면서 ‘엎질러진 물’이 된 상황인 만큼 양국 관계가 1965년 수교 이후 최악의 국면으로 치달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일본, 2차 경제 보복 조치 감행

일본 정부는 8월 2일 오전 아베 신조 총리 주재로 각의(국무회의)를 열고 한국을 수출 절차 간소화 혜택을 주는 화이트리스트 목록에서 제외하는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을 의결했다.

개정안은 주무 부처 수장인 세코 히로시게 경제산업상이 서명하고 아베 총리가 연서한 뒤 공포 절차를 거쳐 그 시점으로부터 21일 후 시행된다. 통상 서명 절차에 사흘이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8월 7일 공표 후 8월 28일 시행될 것으로 전망된다.

세코 경제산업상은 각의 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시행령 개정 의견 공모에 4만666건이 들어왔고 90% 이상이 찬성했다”며 “이번 조치는 한국의 수출 관리에 불충분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취한 것일 뿐 (징용 소송 관련) 대항 조치가 아니다”는 기존 주장을 되풀이했다.

화이트리스트는 특정 물품이나 기술을 일본 기업이 수출할 때 일본 정부가 승인 절차 간소화 혜택을 인정하는 국가를 뜻한다. 한국을 비롯해 미국과 영국 등 27개국이 지정돼 있었다. 한국은 2004년 지정된 이후 이 리스트에서 빠지는 첫 국가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앞서 일본 정부는 7월 1일 고순도 불화수소(에칭가스) 등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3개 품목에 대한 한국 수출 규제 강화를 발표했다.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손해배상 판결에 대한 사실상 1차 경제 보복 조치였다.

일본 정부는 이날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도 고시했고 그로부터 정확히 한 달 만에 해당 안을 통과시키면서 2차 경제 보복 조치를 단행했다.

이에 따라 그동안 포괄 허가를 받아 온 1000여 개 품목이 개별 허가로 바뀔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정부는 원칙적으로 문제가 없으면 통상 절차에 따라 허가를 내준다는 방침이지만 마음만 먹으면 사실상 수출 심사 기간도 조정할 수 있는 만큼 한국 기업에 막대한 타격이 우려된다.

◆“일본 정부에 철회 촉구”

청와대는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배제 결정에 즉각 임시 국무회의를 소집하는 등 긴박하게 움직였다. 이날 오후 2시 열린 국무회의는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주재했다.

문 대통령은 국무회의 모두 발언을 통해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제외 결정에 대한 강한 유감의 뜻과 함께 대일 강경 메시지를 밝혔다.

문 대통령은 “일본 정부의 이번 조치는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명백한 무역 보복이자 ‘강제 노동 금지’와 ‘삼권분립에 기초한 민주주의’라는 인류 보편적 가치는 물론 국제법의 대원칙을 위반하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문 대통령은 또한 “우리 정부와 국제사회의 외교적 해결 노력을 외면하고 상황을 악화시켜 온 책임이 일본 정부에 있는 것이 명확해진 이상 앞으로 벌어질 사태의 책임도 전적으로 일본 정부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경고한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이어 “이번 조치는 일본이 (일본 오사카)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에서 강조한 자유무역 질서를 스스로 부정하는 행위”라며 “개인 청구권은 소멸하지 않았다고 일본 정부 스스로 밝혀 왔던 과거 방침과도 모순된다”고 덧붙였다.

문 대통령은 특히 “결코 바라지 않던 일이지만 한국 정부는 일본의 부당한 경제 보복 조치에 상응하는 조치를 단호하게 취할 것”이라며 “일본이 경제 강국이지만 우리 경제에 피해를 입히려고 하면 우리도 맞대응할 방안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는 최악의 경우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파기를 검토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 풀이된다.
전면전으로 치닫는 한·일 경제전쟁
앞서 8월 1일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태국 방콕에서 열린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과 회담한 후 양측의 견해차를 전하며 “한국이 일본의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되면 한·일 안보의 틀을 검토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등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파기 가능성을 시사한 바 있다.

정부는 8월 2일 임시 국무회의 후 정부합동브리핑을 통해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제외 결정에 대한 대응 방안을 내놓기도 했다.

정부는 우선 역으로 일본을 한국의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또한 일본의 수출 규제 강화 조치가 세계무역기구(WTO) 규범에 전면 위배되는 조치인 만큼 WTO 제소 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한다는 방침이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우리도 일본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해 수출 관리를 강화하는 절차를 밟아 나갈 것”이라며 “여러 통로를 통해 일본 정부에 이번 조치가 철회되도록 강력히 요구하고 양자 협의 재개를 촉구하는 등 다각적인 대응책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개입하면 속도 조절 가능성 있다”

일본이 8월 말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본격 제외하면 국내 기업들은 당장 83개 핵심 품목을 조달하는 데 큰 차질을 빚게 될 것으로 보인다. 연간 대일 수입액이 1000만 달러 이상이고 일본 수입 비율이 50% 이상인 품목들이다. 특히 이 가운데 한국 경제의 대들보 역할을 하는 반도체·디스플레이 분야의 소재·부품 장비가 절반 정도에 달한다.

한국경제신문이 일본 수출무역관리령의 통제 대상 품목에 기재된 전략물자를 전수조사한 결과 일본에서 수입한 실적이 있는 품목은 총 1383개였다. 이 가운데 수입 규모가 크고 일본 의존도가 높은 고위험 품목은 83개다.

실리콘 웨이퍼와 블랭크 마스크 등 반도체 디스플레이 분야 소재·부품·장비가 37개(44.6%)로 절반 가까이 됐다. 석유화학·화학제품(8개), 공작기계(7개), 철강·알루미늄(7개) 등 분야도 다수 포함됐다.

국내 핵심 제조 업종 대부분이 일본의 2차 경제 보복에 타격을 입는 셈이다.
전면전으로 치닫는 한·일 경제전쟁
한편 이번 사태와 관련해 일각에서는 일본이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본격 제외하는 시점을 9월로 미루며 속도 조절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한·일 갈등이 삼국 간 동맹에 해가 될 것으로 보는 미국이 강 건너 불구경하던 자세를 바꿔 확전 자제를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방콕 센타라 그랜드 호텔에서 8월 1일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의장국인 태국의 돈 쁘라뭇위나이 외교부 장관과 가진 공동 기자회견에서 한·일 갈등에 대한 미국의 중재 여부와 관련한 질문에 “일본과 한국 모두 (미국에) 엄청나게 중요한 관계”라며 “양국이 갈등을 완화하는 길을 찾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한국에 대한 보복 조치가 일본 기업과 관광업계에 부메랑이 될 것이라는 일본 내 비판도 아베 정부에는 부담이다.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상근자문위원은 “일본은 이번 조치를 통해 한국과의 갈등이 있을 때마다 한국 기업은 물론 한국 정부를 겨냥해 꺼내들 수 있는 일종의 공격 수단을 만든 셈인 만큼 쉽게 물러서지는 않을 것”이라면서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아베 총리와의 통화 등으로 적극적인 중재자 역할에 나선다면 화이트리스트 제외 시행 시점을 미루는 등 사태가 다소 완화될 가능성은 남아 있다”고 말했다.

choies@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36호(2019.08.05 ~ 2019.08.11)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