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DC그룹, 항공·레저·유통 등 미래사업 포트폴리오 윤곽
-아시아나 품고 모빌리티 그룹 도약
[한경비즈니스=안옥희 기자] 정몽규 회장이 이끄는 HDC가 아시아나항공을 품고 모빌리티 그룹으로 변신한다. 매각 절차가 진행 중인 아시아나항공의 새 주인으로 HDC현대산업개발이 사실상 확정됐기 때문이다.
본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아시아나항공 매각 절차는 연내 마무리될 것으로 보인다. 정 회장은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직후 가진 기자 간담회에서 “아시아나항공 인수는 회사의 지속 가능한 성장에 부합한다는 전략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라며 “아시아나는 초우량 항공사로 거듭날 것”이라고 공언했다. 이어 “HDC그룹이 모빌리티 그룹으로 한 걸음 도약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 ‘포니정’ 장남 통 큰 베팅에 얽힌 사연
아시아나항공 인수전에서 가장 눈길을 끈 부분은 HDC그룹이 제시한 가격이다. 현금 자산이 풍부한 HDC그룹이었지만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하기 위해 시장 예상 가격인 1조5000억~2조원을 훌쩍 넘긴 2조5000억원을 베팅했다.
정 회장은 본입찰을 앞두고 실무진에게 “아시아나 항공은 그룹 재도약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회사”라며 “반드시 인수해야 한다”고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정 회장이 간절하게 인수 의지를 불태운 데는 최초의 국산차인 포니(PONY)를 개발해 포니 신화를 쓴 부친 고 정세영 명예회장의 영향 때문으로 보인다.
‘포니정’이란 별명으로 불린 정 명예회장은 본인의 의지가 아닌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의 뜻에 따라 1999년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까지 32년간 척박한 자동차 산업을 개척하며 현대차의 혁신을 이끌어 온 인물이다. 1988년 11월 현대차에 입사한 정 회장도 현대차 회장에서 현대산업개발 회장으로 함께 옮겼다.
그런 의미에서 아시아나항공 인수 우선협상대상자에 선정된 직후 정 회장이 모빌리티 그룹으로 도약할 것이란 포부를 밝힌 것은 의미심장하다.
자동차와 항공기는 ‘탈것’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모빌리티는 단순 탈것이 아니라 흐름(통행)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HDC그룹은 모빌리티가 통행하는 도로 인프라와 항만 인프라를 보유하고 있다. 항공업을 새 먹거리로 삼아 자동차를 열망했던 부친의 못다 이룬 꿈을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란 해석이다.
그뿐만 아니라 정 회장은 2005년 정 명예회장이 작고하자 포니정재단을 설립해 장학금 지원과 다양한 사회 공헌 활동을 이어 가며 선친의 유훈을 따르고 있다.
정 회장은 선친에 이어 1999년 현대산업개발 회장 자리에 오른 뒤 회사를 10대 건설사 가운데 내실 있는 우량 회사로 키웠다. 국내 대표 부동산 디벨로퍼로서 주력인 주택 사업부문에서 아이파크(IPARK) 브랜드를 바탕으로 자체 분양 사업, 재개발·재건축, 민간 개발형 도급 사업 등을 선도해 왔다. 강남 파이낸스센터·MBC신사옥·고척스카이돔, 서울~춘천 고속도로를 만든 것도 현대산업개발이다.
정 회장은 건설업을 중심으로 사업 다각화를 시도해 포트폴리오를 확대하고 있다. 2006년 영창악기(현 HDC영창)를 인수했고 2015년 호텔신라와 합작해 HDC신라면세점을 세웠다.
정 회장은 2018년 현대산업개발을 지주회사인 HDC와 사업회사인 HDC현대산업개발로 분할하며 HDC그룹을 출범시켰다. 지주회사 전환으로 HDC그룹은 더 효율적인 경영 구조를 확립할 수 있었다.
지주회사 HDC는 자회사 관리와 함께 투자 영역을 확대하며 HDC그룹의 성장을 이끌고 있다. 파크하얏트 서울과 파크하얏트 부산 등 호텔 운영 경험을 살려 지난 8월 한솔오크밸리 리조트의 운영사인 한솔개발의 경영권도 인수했다.
또 유통·리조트 사업 등 비건설 부문으로 사업을 다각화하는 데 집중해 왔다. 2018년 1월에는 부동산114를 인수하며 그룹 포트폴리오를 확대했다. 부동산114는 HDC그룹 편입 후 부동산 빅데이터 플랫폼을 활용해 프롭테크(Prop-Tech) 분야에도 진출해 시계열 데이터 통계 분석 시스템인 렙스(REPS), 인구 센서스와 소득 통계, 소비 성향 등의 데이터를 제공하는 케이-아틀라스(K-Atlas) 등 데이터베이스 서비스를 기반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정 회장은 올해도 계열사 사업 융합을 통한 시너지를 통해 HDC만의 독창적인 사업 모델 구축에 집중하고 있다. 아시아나항공 인수 절차가 마무리되면 HDC그룹은 건설업에서 면세·레저에 이어 항공 산업에도 진출하며 종합 그룹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 M&A 귀재 박현주 조력…인수전 막전막후
당초 아시아나항공 인수전에는 SK·한화·GS 등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이 참여할 것으로 관측됐다. 하지만 국내 항공사들의 업황 악화와 아시아나항공의 과도한 부채로 예상외로 흥행이 저조했다. 올해 상반기 기준 아시아나항공 부채는 9조5989억원으로 부채 비율은 659.5%에 이른다.
이동걸 KDB산업은행 회장은 지난 7월 “아시아나항공은 두 번 다시 나오지 않는 매력적인 매물”이라며 “강남 아파트는 못 사면 나중에 또 매물이 나오지만 아시아나항공은 이번 기회가 아니면 다시 살 기회가 없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정 회장은 국내 2위의 국적 항공사인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하기 위해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을 끌어들였다. 정 회장은 박 회장과 함께 컨소시엄을 구성해 아시아나항공 인수전에 뛰어든 이유로 “HDC그룹이 독자적으로도 인수할 수 있는 재정 상태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지만 지금까지 여러 인수·합병(M&A)을 성공한 박 회장의 인사이트를 받고 싶었다”고 밝혔다.
두 사람은 고려대 경영학과 선후배 사이로 굵직한 거래에서 경영 파트너로 함께해 왔다. 2017년 HDC현대산업개발이 미래에셋캐피탈이 보유한 부동산 정보 제공 업체 부동산114를 인수할 때도 이 같은 친분이 작용했다.
올해 4월 현대산업개발이 한솔오크밸리리조트를 인수할 때도 미래에셋대우가 인수 금융에 나섰다. 미래에셋금융그룹이 보유한 골프장인 블루마운틴의 1300억원 규모의 세이지호텔 건설 공사는 현대산업개발이 맡아 진행하기도 했다.
HDC그룹의 아시아나항공 인수에는 정 회장의 의지와 통 큰 베팅의 힘이 컸다. HDC현대산업개발-미래에셋대우 컨소시엄은 아시아나항공 매입 대금으로 시장 예상 가격보다 높은 2조5000억원 수준을 제시하며 경쟁자인 애경그룹-스톤브릿지캐피탈 컨소시엄을 압도했다.
애경 측은 1조원 중·후반대의 가격을 써낸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최후 승자는 정 회장이 됐다. 정 회장의 깜짝 베팅에는 특히 박 회장의 조언이 주효했다는 후문이다. 박 회장은 정 회장에게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가격을 지르라”며 과감한 베팅을 조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산 총액 10조6000억원으로 국내 대기업 자산 순위 기준 재계 33위인 HDC그룹은 자산 11조원에 달하는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하면서 재계 20위권으로 수직 점프할 것으로 전망된다.
업종도 건설·유통·레저에 이어 항공업까지 아우르는 종합 그룹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또 항공업은 HDC그룹이 현재 보유한 면세점과 호텔 사업과도 접점이 많아 시너지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 업계의 평가다.
부실 경영으로 주력인 아시아나항공을 HDC그룹에 넘기게 된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재계 28위에서 80위권으로 밀려나면서 대기업 집단에서 제외될 전망이다.
◆ 범현대가 시너지로 ‘승자의 저주’ 극복할까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입찰 금액이 시장 예상 금액보다 높고 경쟁 컨소시엄 대비 차이가 큰 금액으로 밝혀지면서 ‘승자의 저주’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조윤호 DB금융투자 연구원은 HDC현대산업개발의 아시아나항공 인수에 대해 “주주 가치 제고 가능성이 현저히 낮아졌다”며 “주택 사업은 부침이 크기 때문에 현금 유동성이 풍부한 건설사가 M&A를 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지만 건설업의 경기 민감도를 낮출 수 있는 산업이 항공업인지는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인수 이후 추가적인 재무 부담도 문제로 거론된다. 김선미 KTB투자증권 연구원은 “인수 자금 말고도 아시아나항공의 노후화된 기체 교체를 위한 추가 투자가 예상된다”며 “투자 규모에 따라 이 회사가 추진 중인 자체 개발 사업 추진 계획에 변화가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분석했다.
반면 승자의 저주 우려보다 범현대가와 항공업의 시너지 효과가 더 클 것이라는 긍정적인 전망도 나온다. 건설사가 항공사를 품었다는 것보다 ‘범현대가가 육(현대자동차)·해(현대중공업)·공(아시아나항공)을 모두 품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는 것이다.
라진성 키움증권 연구원은 “HDC현대산업개발의 아시아나항공 인수는 건설사와 항공사의 시너지가 아닌 범현대가와 항공업의 시너지”라며 “직접적 연관이 있는 범현대가 기업이 추가적 전략적 투자자로 합세해 지분 투자도 기대해 볼 수 있다”고 내다봤다. 범현대가에는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은 현대가 아들들의 모임인 ‘몽(夢)’자 돌림 모임이 있어 이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정 회장은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 정몽진 KCC그룹 회장 등 ‘몽’자 항렬의 범현대가 기업인들과 정기적으로 만나며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범현대가 기업들이 전략적 투자자(SI)로 참여해 인수 자금 가운데 1조원 정도를 담당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실제 시너지 효과를 예상해 보면 현대오일뱅크와는 항공유 사업, 현대백화점그룹과는 면세점과 기내식 사업, 현대해상과는 항공기 보험·여행자 보험 사업, KCC·한라그룹·현대종합상사와는 물류 사업, 현대카드와는 마일리지 연계 카드 사업, 현대아산과는 대북 사업 등을 기대할 수 있다.
아시아나항공이 연간 2조원 정도의 항공유를 매입하는데 현대오일뱅크의 아시아나항공 항공유 공급률이 높아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정 회장이 2018년 11월부터 전국경제인연합회 남북경제교류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어 향후 현대아산과의 대북 사업 가능성도 주목된다.
정 회장이 모빌리티 그룹 도약을 선언하면서 현대차와의 협업 가능성을 언급한 만큼 장기적으로는 현대차와 플라잉카·자율주행 등 모빌리티 협업도 기대된다.
아시아나항공 인수와 관련한 여러 가지 시너지 중에서 정 회장이 ‘모빌리티’를 내세웠다는 점에서 HDC현대산업개발이 보유한 도로 인프라와 항만 인프라를 향후 플라잉카·자율주행·공유경제·이커머스 등과 결합할 수도 있다. 라 연구원은 “HDC현대산업개발이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통해 육·해·공 모빌리티 플랫폼의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를 선점했다”고 분석했다.
[돋보기 :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32년간 자동차 산업 발전 이끈 개척자…국내 첫 고유 모델 ‘포니’ 개발
정몽규 HDC 회장의 부친인 고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은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의 넷째 동생으로 오늘날 현대자동차그룹의 근간을 만든 인물로 꼽힌다. 정 명예회장은 현대건설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큰형인 정주영 창업자의 뜻에 따라 1967년 현대차 초대 사장에 취임했다.
현대차에서 그는 대한민국 최초의 고유 모델인 포니(PONY)를 만들어 국내 자동차 산업에 새로운 역사를 썼다. 포니는 현대차가 포드와 기술 제휴 관계를 청산하고 미쓰비시에서 기술 제휴를 받은 이후 나온 첫 작품이다.
정 명예회장은 포니자동차를 1974년 토리노 모터쇼에서 선보인 후 1976년 현대차 울산 종합공장에서 본격적으로 생산했다. 포니 생산으로 한국은 세계에서 열여섯째 자동차 생산국이 됐다. 이때부터 정 명예회장은 ‘포니 정’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후 외국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기술 독립 차원에서 공작기계사업부를 발족해 스텔라·포니엑셀·그랜저 등 신차를 연달아 발표했다. 이 기간 국내 처음으로 에콰도르에 포니를 수출하고 한국 최초의 독자 엔진·트랜스미션 개발 등 척박했던 한국 자동차 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현대차 설립부터 포니를 개발하고 30여 년간 현대차를 이끌어 온 정 명예회장은 1999년 현대그룹의 계열 분리에 따라 현대차 명예회장에서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ahnoh05@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52호(2019.11.25 ~ 2019.12.01)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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