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리포트 Ⅰ ]
-장기 성장·고수익 전망 없으면 가차없이 정리
-정교한 미래 예측으로 신사업 쉼없는 탐색
‘모태·주력 사업이라도 버린다’ 글로벌 기업의 사업재편 성공전략
[한경비즈니스=이정흔 기자]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은 미국에서 11월 19일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항공 사업에만 주력하고 이익이 나지 않는 사업은 버릴 것”이라며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시사했다. LG그룹 또한 지난해부터 시작된 ‘구광모 체제’ 이후 숨 가쁜 사업 재편을 이어 가고 있다. 올해 들어서만 LG유플러스 전자결제사업부를 비롯해 LG전자의 하이엔텍·LG히타치솔루션 등 10여 건의 매각·청산 작업을 진행 중이다. 삼성그룹 또한 2015년 비주력 사업이던 화학 계열사를 한화그룹과 롯데그룹에 매각했고 2017년에는 휴렛팩커드(HP)에 삼성전자 프린팅사업부를 매각하는 등의 행보를 이어 가고 있다.


변신에 대한 절박함은 국내 기업들에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다. 글로벌 화학 기업 바스프(BASF), 글로벌 인프라 기업 제너럴일렉트릭(GE) 등도 최근 대규모 사업 구조조정을 진행 중이다. 기업의 변신은 숙명이다. 시장이 빠르게 변화할수록 기업 또한 이에 대응해 더 빨리 변화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변신이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변신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시장 경쟁력을 위한 과감한 변신을 시도하고 있는 글로벌 기업들의 사례를 통해 그 힌트를 들여다봤다.


◆‘비전 2020’ 추진 중인 지멘스-미래 예측 기법 통해 정교한 시장 분석


글로벌 전기전자 기업인 지멘스는 2013년 조 케저 최고경영자(CEO) 부임 이후 변신에 속도를 높이고 있다. 그 시작은 5년 전인 2014년 ‘비전 2020’의 선포다. 핵심 사업인 전력화·자동화·디지털화에 집중하겠다는 것이다. 지멘스는 그해 9월 100년이 넘는 역사를 이어 온 가전 사업부문을 철수하고 에너지 장비 업체인 드레서랜드를 인수했다. 당시 가전 사업은 판매도 순조롭고 흑자를 기록해 왔지만 에너지 사업에 자원을 집중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뒤이어 2018년에는 한 발짝 더 나아가 ‘비전 2020+’를 선포했다. 기존 8개 사업부문을 3개 운영 회사와 3개 전략 회사로 조직을 개편한 것이 핵심이다. 개별 사업부문에 좀 더 명확한 책임을 부여하고 이 회사들이 모두 각각의 산업에서 리더 역할을 하도록 한 것이다. 이를 통해 지멘스는 핵심 산업 외의 기타 사업 부문들을 분사하는 등의 구조조정 작업을 강화해 나가고 있다. 2017년 헬스케어 사업부문을 떼어낸 데 이어 올해 5월에는 발전과 송변전 등 에너지 사업부문의 분사를 밝혔다. 이번에 분사되는 에너지 사업에는 지멘스의 대표 사업 중 하나인 가스터빈 등이 포함돼 있다.
‘모태·주력 사업이라도 버린다’ 글로벌 기업의 사업재편 성공전략
지멘스가 이처럼 과감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데는 과거의 역사를 통해 얻은 경험이 밑바탕이 됐다. 1874년 독일에서 설립된 지멘스는 17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이어 오고 있다. 1866년 다이나모 발전기를 발명해 주목 받기 시작한 지멘스는 전신·전기 분야의 전문 기업으로 성장해 왔다. 1970년대 가전 통신에 이어 1990년대 발전·반도체·의료기기 등으로 점차 발을 넓혀 나갔다. 하지만 1990년대 주력인 제조 부문의 수익성이 악화되면서 대대적인 사업 재편에 나섰다. 이때도 지멘스는 전통 사업이라고 할 수 있는 휴대전화 사업부문을 매각하는 등 과감한 사업 구조조정을 통해 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지멘스는 이 과정에서 특히 전통 제조업에 정보기술(IT) 시스템을 결합해 생산성을 높이는 데 큰 효과를 본 바 있다. 지멘스 인더스트리 4.0으로 대표되는 독일 암베르크 공장은 1989년 설립 이후 직원 수는 기존과 비슷한 1200여 명을 유지하고 있지만 생산량은 9배 이상 늘었다. ‘비전 2020’을 통해 지멘스가 그리고 있는 밑그림도 이와 밀접하게 연계돼 있다. 지멘스는 2017년 산업용 소프트웨어 회사 ‘멘토그래픽스’에 이어 올해 3월 항공 통신 정보 분석 솔루션 업체인 ‘사브메다프테크놀로지스’를 품에 안으며 디지털 사업부문을 강화해 나가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지멘스는 현재 디지털 전환이 필요한 고객사에 컨설팅·디자인·시제품화·구축 서비스 등 종합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는데 2018년을 기준으로 지멘스 디지털팩토리사업부의 매출은 129억 유로(약 16조8000억원)로 2017년에 비해 13% 증가했다.
‘모태·주력 사업이라도 버린다’ 글로벌 기업의 사업재편 성공전략
지멘스는 사업 재편 과정에서 자사 제품의 독점 기술과 노하우를 먼저 분석한 뒤 ‘장기 성장과 고수익이 보장되지 않는 사업은 예외 없이 버린다’는 원칙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를 위해 지멘스는 PoF(Picture of Future)라는 정교한 미래 예측 기법을 활용한다. 지멘스는 연 2회 PoF 보고서를 통해 각 산업의 트렌드와 미래 전망, 시나리오, 전문가 인터뷰 등을 담아내고 있기도 하다. 지속적인 미래 예측 연구를 통해 사업의 불확실성을 최소화하고 성공 요인을 포착하며 동시에 신사업 발굴에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친환경 기업 변신’ 선언한 바스프-‘페어분트’ 시스템으로 전 세계 시장 연결


독일계 화학 그룹인 바스프(BASF)는 각종 석유화학제품·제초제 등 농업 제품 원료, 자동차용 폴리우레탄 시스템, 윤활유 등을 판매하는 기업이다. 1865년 창업한 154년 역사의 세계 최대 화학 기업이다. 산업화 이후 천연 염료를 구하기 어려워지자 인조 염료를 대중화하고 급격한 인구 증가에 농업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합성 비료를 선보여 왔다. 오랜 시간 동안 인간사의 변화에 따라 굴곡을 거치며 변신을 거듭해 온 바스프가 최근 또 한 번 환골탈태를 준비 중이다.


바스프는 독일 루트빅스하펜에서 지난해 11월 ‘중·장기 신성장 전략’을 발표하며 고강도 사업 개편 계획을 밝혔다. 지향점은 분명하다. ‘친환경·디지털 기업’으로의 변신이다. 마틴 브루더뮐러 바스프 CEO는 “2025년까지 친환경 제품의 매출을 220억 유로(약 28조원)로 늘릴 것”이라고 야심찬 목표를 제시했다. 2022년까지 전 세계 350여 개 공장에 대해 첨단 디지털화를 추진하겠다는 계획도 함께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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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프는 2019년 1월 1일 기존 12개의 사업부문을 6개로 통합했다. △화학사업(석유화학제품·중간체) △소재사업(퍼포먼스 소재·모노머) △산업 솔루션(안료·퍼포먼스 케미컬) △표면 처리 기술(촉매제· 코팅) △영양·케어(케어케미컬·건강) △농업 솔루션이다. 생산·물류 그리고 연구·개발(R&D)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사업 구조조정과 함께 업무 프로세스 혁신을 진행 중이다. 더욱 민첩하고 고객 중심의 업무 체계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이와 함께 브루더뮐러 CEO의 설명에 따르면 사업부문 구조조정과 관련해 “회사가 유기적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인수·합병(M&A)을 진행하고 이와 동시에 적합하지 않은 사업은 결국 제외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경쟁사인 미국 바이엘로부터 채소종자사업부를 인수하며 ‘농업 솔루션’ 부문에 힘을 실어줄 것을 확실히 보여준 바스프는 올해 8월 안료사업부문을 일본의 정밀 화학 업체인 DIC에 매각하고 최근에도 건설화학부문의 매각을 진행하는 등 비주력 사업을 정리하는 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


‘디지털’과 ‘친환경’으로 방향을 설정한 바스프의 변신은 철저하게 시장의 요구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바스프의 기업 철학은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화학을 창조한다(We create chemistry for a sustainable future)’다. 이는 바스프의 역사 속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바스프는 1990년대에도 디지털 기기들이 등장하며 관련 소비재 산업을 과감히 정리한 역사가 있다. 2012년에는 화학 비료 사업을 매각했는데 바스프로서는 100여 년 전 세계 최초로 일궈낸 사업부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기적 차원에서 뒤처질 것으로 판단된다면 과감하게 손을 뗀 것이다.
‘모태·주력 사업이라도 버린다’ 글로벌 기업의 사업재편 성공전략
이처럼 시장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바스프의 혁신의 중심에는 ‘페어분트
(Verbund)’ 시스템이 자리 잡고 있다. 과거의 페어분트는 한 화학 공장에서 나오는 부산물을 곧장 파이프라인을 통해 인근 공장의 원료로 사용하고 폐열도 재활용하는 시스템을 일컬었다. 생산 공장들 간의 네트워크를 통해 비용을 절감하기 위한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페어분트로 공장들 간의 시너지가 커지면서 생산 프로세스를 넘어 ‘직원과 직원들, 고객과 직원들 간의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바스프만의 독특한 ‘혁신 DNA’로 자리 잡게 됐다. 전 세계 800개 생산 기지들을 아우르는 공동 R&D 네트워크를 통해 시장의 흐름을 민첩하게 읽어내고 미래 성장 동력을 발굴, 육성하는 전초기지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최악의 위기 맞은 GE의 부활 전략-“1~2등, 아니면 버린다”


‘발명왕’ 에디슨이 창업한 회사로 잘 알려진 GE는 미국 제조업의 상징이자 혁신의 대명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78년 설립된 전기 조명 회사 ‘에디슨제너럴일렉트릭(Edison General Electric Company)’을 모태로 무려 140년간 시장에서 살아남았다. 그런 GE가 지난해인 2018년 6월 미국의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DJIA)에서 퇴출됐다. GE는 출범 122년(2018년 기준)을 맞은 다우지수에 살아남았던 유일한 ‘원년 멤버’였다.


다우지수 퇴출은 GE의 위기가 얼마나 깊은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영원히 지속될 것 같던 ‘에디슨 신화’가 흔들리기 시작한 데는 지난 20여 년간의 ‘문어발식 사업 확장’에서 이유를 찾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1981년 GE의 수장이 된 잭 웰치 CEO는 금융·의료기기·미디어 분야 등에서 GE를 세계 최대의 복합 기업으로 키우며 전성기를 누렸다. 특히 당시 설립한 GE캐피털은 한때 GE 영업이익의 5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급성장했다. 이후 2001년 제프리 이멜트 회장이 바통을 이어받아 문어발 확장을 지속했다.


이 과정에서 GE는 주력 사업인 제조업을 벗어나 GE캐피털을 중심으로 한 비주력 산업을 키우는 데 집중했는데 바로 이것이 발목을 잡았다. 2008년 금융 위기로 GE캐피털이 직격탄을 맞으면서 GE그룹 전체가 흔들리게 됐다. 당시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이멜트 CEO가 직접 워런 버핏 벅셔해서웨이 회장을 찾아가 투자를 부탁했는데 버핏 회장의 투자 조건은 “제조업으로 돌아가라”였다.
‘모태·주력 사업이라도 버린다’ 글로벌 기업의 사업재편 성공전략
이후 뼈를 깎는 GE의 사업 구조조정이 시작된다. 이멜트 CEO는 2009년 방송사 NBC유니버설을 매각하고 2015년 GE캐피털 자산의 90%를 매각했다. 2016년에는 가전사업부를 중국의 하이얼에 매각하는 등 수습에 나섰다. 하지만 상황은 쉽게 호전되지 않았고 2017년 8월 잭 플래너리 CEO가 새로운 구원투수로 등판했다. 당시 GE의 위기 원인을 ‘사업의 복잡성’이라고 진단한 그는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이어 나갔다. 2017년 11월 회사의 뿌리와도 같은 전구 사업과 기관차 사업 등 10여 개 사업을 정리했다. 하지만 그동안 쌓여 있던 부실 규모가 워낙 컸던 탓에 경영 상황은 점점 악화 일로를 걸었고 2018년 말 부채 규모만 1210억 달러(약 135조3000억원)에 달했을 정도였다.

126년 역사상 최악의 위기를 맞이한 2018년 10월 GE의 새로운 수장에 로런스 컬프 CEO가 임명됐다. 그는 2019년을 ‘리셋의 해’로 규정하고 ‘제조업 명가’로서 GE의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 그야말로 대수술을 감행 중이다. 향후 GE의 사업부문을 ‘전력·항공·재생에너지’를 중심으로 재편하겠다는 방침이다. 연초에는 전력사업부에서 전체 직원의 15%에 해당하는 1만 명을 감원한다는 방침을 발표하고 이어 2월에는 바이오 의약 제조 사업을 214억 달러(약 25조2000억원)에 의료기기 업체 다나허에 매각했다. 지난해 6월 GE는 헬스케어 사업부문을 정리하겠다고 밝혔는데 이번 매각 역시 그의 일환이다.

지난 10년간 이어져 온 사업 재편은 이제 조금씩 그 효과가 나타나는 중이다. 2018년 4분기 5억7400만 달러의 이익을 내며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특히 GE가 주력으로 삼고 있는 항공기 엔진 사업이 20% 성장하면서 수익 상승을 주도한 것으로 분석됐다.
‘모태·주력 사업이라도 버린다’ 글로벌 기업의 사업재편 성공전략
‘문어발 사업’으로 시작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GE의 대대적인 사업 재편은 현재 진행형이다. 아직 GE가 위기에서 벗어났다고 말하기는 이르다. 여전히 부채 규모가 작지 않은 데다 최근에는 분식회계 논란에도 휩싸여 쉽지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140년이 넘는 오랜 시간 동안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데는 과감한 변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DNA가 밑바탕이 된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지난 20여 년이 넘게 꾸준히 이어져 온 GE의 사업 구조조정에는 분명한 원칙에 의해 결정됐다. 잭 웰치 CEO의 ‘1등 아니면 2등’ 전략이다. 시장에서 1등이나 2등이 아닌 사업은 고치거나 팔거나 폐쇄한다. ‘모태 사업’이라고 하더라도 예외는 없다.

◆컴퓨터 회사에서 ‘클라우드 회사’로, IBM-신사업 전담 조직으로 ‘혁신’ 내재화


글로벌 기업들 가운데 ‘변신의 대명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업은 IBM이다. 1911년 설립된 CTR(Computing- Tabulating- Recording Company)이 전신으로 1924년 토마스 왓슨 CEO에 의해 IBM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그 역사만 올해로 108년을 맞은 셈이다.


IBM은 꽤 오랫동안 ‘세계에서 제일 잘나가는’ 컴퓨터 회사였다. 1980년대에는 ‘전 세계 시가총액 1위’ 기업에 등극했을 정도다. 하지만 ‘너무 잘나가던’ 게 독이 됐다. 조직의 기밀을 지키기 위해 지나친 폐쇄 정책을 유지하던 IBM은 컴퓨터 하드웨어 부문에서는 델과 컴팩의 협공을 받아 위기에 처했고 소프트웨어 부문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운영체제 기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다양한 개방형 소프트웨어가 등장하면서 시장을 흔들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독자적인 운영체제를 사용해 오던 IBM은 시장의 변화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다.
‘모태·주력 사업이라도 버린다’ 글로벌 기업의 사업재편 성공전략
살아남기 위해 ‘변신’이 필요했던 IBM은 주력 사업군이었던 디스크 드라이브, 프린터 등 제품 생산업을 정리하고 주력 사업을 빠르게 서비스업으로 바꿔 나갔다. 2005년 IBM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PC 사업부문을 중국의 레노버에 매각한 뒤 “IBM은 더 이상 컴퓨터 회사가 아니다”고 선언했다.


하드웨어 사업을 버린 IBM은 이후 IT 서비스와 소프트웨어 더욱 분야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특히 2002년 무렵부터 ‘될성부른’ 소프트웨어와 IT 서비스 회사들을 적극적으로 M&A하며 이 시장의 포식자가 됐다. 당시 IBM이 인수한 회사만 100여 곳이 넘는데 데이터 관리 업체인 코그너스, 컨설팅 업체인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 비즈니스 인텔리전스 업체인 네테자, 보안 업체인 인터넷시큐리티시스템 등이 대표적이다. 이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단연 IBM의 자부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왓슨연구소’다. 1945년 IBM의 연구 전담 조직으로 출발해 지금까지 첨단 IT를 선도하고 있다.


2012년 버지니아 로메티 CEO가 경영을 맡은 뒤 IBM은 보다 과감한 변신을 추진 중이다. IBM이 바라보는 변화의 방향은 뚜렷하게 두 가지로 모아진다. 인공지능(AI)과 클라우드다. IBM의 AI 플랫폼 ‘왓슨’은 이미 자동차·헬스·금융·교육 등 다양한 사업 분야에 접목되고 있다. 이와 함께 IBM은 블록체인과 같은 최신 기술에 대한 투자도 지속적으로 이어 가고 있다. IBM은 향후 AI와 블록체인을 결합해 운송·의료·금융 등에서 혁신을 주도할 것이라고 자신하며 상당히 공을 들이는 중이다.


2018년에는 리눅스로 유명한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업체인 ‘레드햇’을 품에 안기 위해 무려 340억 달러(약 40조원)를 베팅했다. 미국 IT 기업의 M&A 중 셋째로 큰 규모다. 레드햇을 끌어안은 IBM은 이후 자사의 IBM앱스캔을 포함한 소프트웨어 업체들을 일부 매각하는 등 사업 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경쟁력이 없는 독립 소프트웨어를 정립하고 하이브리드 클라우드에 더욱 집중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모태·주력 사업이라도 버린다’ 글로벌 기업의 사업재편 성공전략
시장의 변화에 따른 변신이야말로 기업이 생존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을 체화한 IBM은 기업 내부에 EBO(Emerging Business opportunities)라는 신사업 전담 조직을 두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최고전략전문가(CSO)가 주관하는 별도의 조직으로, 사내 영향력이 크고 네트워킹 능력이 뛰어난 리더들이 독립된 권한을 갖고 신사업 개발에 매진하도록 하고 있다.

1993년 IBM이 위기를 겪던 당시 책임자로 IBM의 변신을 주도했던 루 거스너 전 CEO가 만든 EBO는 초창기만 해도 사내 임직원들이 기피하는 대표적인 조직이었다. 30~40명의 팀원들을 이끄는 EBO는 사내에서 영향력이 큰 임원들에게는 기존의 조직과 비교해 좌천되는 모양새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미지를 불식하기 위해 IBM은 EBO 멤버들의 실패에 대해서는 전혀 불이익을 주지 않고 오히려 신사업 실패 이후 기존 사업부로 복귀해야 할 때 부서 선택권을 주고 있다.

◆[인터뷰] “기업의 변신, 시장을 설득하는 게 먼저다”
-박찬희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


기업의 성공적인 변신은 늘 시장의 환호를 받는다. 하지만 핵심은 ‘변신’ 그 자체가 아니다. 잘못된 방향으로의 변화는 오히려 더 큰 실패를 부르는 ‘자충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박찬희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는 “기업들이 바로 이 섣부른 변화를 경계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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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글로벌 기업들뿐만 아니라 국내 기업들 역시 ‘선택과 집중’을 위한 사업 재편에 굉장히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세상은 늘 변한다. 기업들로서는 기존의 사업들로 그냥 버티면 망하는 거다. 이는 최근에만 두드러지는 현상이라기보다 지금까지 늘 있어 왔던 일이다. 그러니 기업들은 늘 ‘혁신’ 혹은 ‘변신’을 위해 노력하고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사업 재편도 이뤄진다고 볼 수 있다.”


-예전에 비해 기업들의 평균 수명이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그만큼 기업들도 빠르게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될 확률이 높아지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나.
“기업의 변신이 숙명이라고 하지만 모든 변신이 성공할 수는 없다. 냉정하게, 특히 진화론적으로 보면 개체의 자기 변신 능력은 극히 제약된다. 기업의 변신 역시 마찬가지다. 진정한 경제의 역동성은 달라진 세상에 맞지 않는 사업은 경쟁력을 잃고 새로운 사업이 달라진 세상에 맞게 일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MP3 회사가 어느 날 갑자기 변신해 스마트폰 회사가 될 수는 없다. 빨리 스마트폰 회사에 팔든지 전문적인 기능의 MP3로 바꾸는 방향으로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때 기업의 변신이 독이 될 수 있나.
“2000년대 중반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는 MS를 구글과 같은 인터넷 서비스(ISP) 기업으로 변신시키겠다고 했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냉담했다. 투자자들은 바로 주식을 투매해 순식간에 기업 가치 10조원이 사라졌고 게이츠 창업자는 결국 그 계획을 포기했다. 간단히 생각해 보자. 짜장면 가게 사장이 독학으로 커피를 공부할 수는 있다. 하지만 갑자기 짜장면 가게를 커피 가게로 바꾸겠다고 하면 시장은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짜장면 가게를 커피 가게로 바꾸기 위해서는 경영자를 커피 전문가로 바꾸거나 그게 아니라면 시장을 설득하기 위한 더 큰 노력이 필요하다.”


-기업의 성공적인 변신이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
“변화에는 저항이 따른다. 더욱이 기업들은 단순히 모태 사업, 주력 사업과 관련해 시장의 다양한 이해관계인들과 얽혀 일종의 ‘정체성(identity)’을 형성하고 있다. 이런 정체성은 기업이 지금까지 사업을 이끌어 온 나름의 기반이기 때문에 쉽게 버리기 어렵고 일의 방식이나 사람들의 행동 양식과 생각 또한 체험적으로 형성돼 있기 때문에 이를 변화시키기 어렵다. 기존의 이해관계에 더해 변화에 따르는 체험적 불편함, 기존의 문화와 행동 양식이 기업의 변화를 막는 일종의 저항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런 저항을 깨고 변화를 이끌 능력이 있다면 성공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망한다. 문제는 대부분의 기업들이 말만 요란하고 방향이 잘못된 엉터리 변화로 더 빨리 망하는 경우가 상당수라는 데 있다. 이 때문에 자본시장은 경영자의 자기 변신에 상대적으로 부정적인 시각이 형성돼 있다.”


-그렇다면 기업들의 사업 재편 과정에서 필요한 원칙은 무엇인가.
“기업들이 잘 모르는 사업인데 ‘변화’니 ‘혁신’이니 내걸고 함부로 기웃거리지 말라는 데 초점을 두고 싶다. KT 주주들이 과연 지금 KT가 하고 있는 수많은 시도들에 다 동의할까. 정말 좋은 사업이라면 새로운 투자를 받아 새로운 주주 구성과 지배 체제로 시작하는 것이 맞다. 그게 신사업과 변화의 기본 정신에 맞는 것이다.”


-많은 글로벌 기업들이 장기적인 사업 재편을 위해 미래 시장의 변화를 읽어내는 전담팀을 두고 있다. 그렇다면 ‘예측의 정확도’가 중요할 텐데 이를 높이기 위한 방법은 있나.
“미래를 읽는 새로운 팀이 있다면 회사를 왜 다니겠나. ‘미래를 읽는다’는 명분 아래 회사 안에서 조몰락거리면서 뭘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이와 같은 팀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회사라는 틀을 벗어나 넓은 세상에서 기회를 찾고 이를 살려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필요하다. 미래 사업 전담팀 또한 이런 탐색과 판단을 위한 조직이 돼야 한다.”

vivajh@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52호(2019.11.25 ~ 2019.12.01)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