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돋보기]
[허윤의 경제돋보기] 브랜드 아파트의 명과 암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 최근 서울의 주요 노후 아파트 단지들이 정부의 규제 강화로 주춤했던 재건축 사업 준비에 재시동을 걸고 있다.

서울 아파트에 대한 수요가 여전한 상황에서 신규 공급이 부족하다 보니 오래되고 불편한 아파트를 팔고 새 아파트로 이사하기도 쉽지 않다. 가격이 너무 많이 올랐기 때문이다. 결국 재건축으로 주거 여건을 개선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한국인의 절반은 아파트에 산다. 해외 출장을 다니면서 매번 느끼는 일이지만 우리의 아파트 문화는 참 특이하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건설사 이름 혹은 브랜드가 아파트 주소로 사용된다는 점이다. 아파트 벽면에 페인트로 큼직하게 건설사 이름을 적어 놓은 곳도 우리 말고는 없다. 건설사가 아파트 품질의 무한 보증을 공개적으로 약속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홍보 효과 또한 만만치 않아 보인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현대건설이 1976년 압구정동에 지은 아파트를 ‘현대’로 이름 짓고 아파트 외벽에 ‘현대(現代)’라는 글자를 새긴 것이 최초가 아닐까 싶다.

그 이전 1950~1960년대에 지어진 한국의 1세대 아파트들이 하나같이 종암·마포·동대문·정동 등 지역명에 따라 이름이 붙여졌던 것과 전혀 다른 행보였다. 주거 공간을 고급화해 표준화된 아파트 시대를 한국에 처음 열고자 하는 현대건설의 파격적인 시도는 대성공을 거뒀다.

이후 ‘현대(現代)’라는 이름의 아파트는 부유층 주거 공간의 상징으로 전국 방방곡곡에 보급됐다. 이에 뒤질세라 삼성·대우·쌍용·롯데·삼익·삼부·경남·한신·럭키·대림·삼호·극동·선경·우성·한화·한양·두산·반도 등 아파트 동마다 시공사 이름을 새긴 아파트가 전국을 뒤덮었다. 이들은 힘든 가사 노동을 지면이 평탄한 아파트 실내로 끌어들여 주부들의 고통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압구정 ‘현대(現代)’ 이후 40년, 우리는 선경과 한양에 사는 친구들과 함께 롯데 상가에서 김밥을 먹고 삼호에 사는 친구까지 불러내 쌍용 플라자에서 커피를 마시는, 그야말로 기업 친화적(?)인 일상을 보내고 있다.

사실 19세기만 하더라도 세상은 브랜드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다. 중국을 떠난 도자기는 ‘차이나’가 됐고 개성에서 출하된 인삼은 해외에서 ‘고려인삼(Korean ginseng)’으로 통했다. 안달루시아 소도시 코르도바에서 만든 가죽은 ‘코르도반’으로 거래됐다. 상품을 생산한 기업이나 장인의 이름이 아니라 생산 지역이 바로 상표로 통하던 시대였다. 하지만 19세기 중·후반 거대 기업들이 세계시장에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이들이 여러 지역에 대량생산이 가능한 공장을 짓고 외국인들을 상대로도 물건을 팔기 시작했다. 그 결과 생산지의 중요성은 그 의미가 크게 퇴색됐지만 생산 기업의 상표가 품질을 보증하게 되는 소위 ‘브랜드 시대’가 열린 것이다.

목화·장미·개나리·진달래·청실·홍실 등 40년 세월 속에 그나마 살아남은 예쁜 아파트 이름들마저 재건축으로 이미 사라졌거나 조만간 사라질 운명이다.

새로 짓는 아파트에는 사는 지역의 역사나 풍광, 인물 혹은 전설이 반영된 그런 멋진 이름이 붙여졌으면 좋겠다. 물론 희망 사항일 뿐이다. 입주 주민들 상당수가 동의하지 않을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기업 브랜드가 아파트를 만나는 순간 프리미엄이 발생해 집값이 쑥쑥 올라가는 데 ‘무슨 한가한 소리’냐고 힐난할 것이 뻔하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28호(2019.06.10 ~ 2019.06.16)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