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전략]
-‘개인 가치관’이 ‘조직 이익’과 상충하는 경우 많아…권한 설정·소통 채널 구축 등 필요
조직 대신해 상대와 마주하는 ‘협상가의 딜레마’ [이태석의 경영전략]


[이태석 IGM 세계경영연구원 교수] 식품 회사의 원료구매팀 김 모 대리는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 설탕 공급 업체에서 견적을 받아 협상했고 중간에 팀장에게도 진행 사항을 보고했다.

언성까지 높여 가며 막판까지 간 끝에 겨우 협상을 타결했는데 갑자기 팀장이 김 대리에게 이런 말을 건넨다.

“김 대리, 고생 많았어. 협상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말이야. 그런데 혹시 여기 적힌 가격 조건에서 단가를 조금 더 내릴 수 없을까. 업체와 한 번 얘기해봐. 물어봐서 손해 볼 것은 없잖아.”

김 대리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얼마나 어렵게 이끌어 낸 합의안인데 이제 와 다시 하라니 그동안 자신이 뭘 했나 싶다. 팀장의 지시를 무시할 수도 없고 업체에 더 이상 요구하기도 어렵다. 난처하기만 하다. 이런 상황에 당신이 처해 있다면 다음 세 가지 답변 중 어느 것을 택할까.

A.이미 판매자의 제안을 구두로 수락했고 다시 협상하기가 불편하다고 팀장에게 말한다.

B.팀장이 시키는 대로 한다. 팀 내에서 흔히 있는 일이니 문제 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C.판매자를 만나 단가를 내릴 수 없는지 물어보지만 가격을 내려주지 않는다고 해서 거래가 결렬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알려준다.

◆ 협상에는 정해진 답이 없다


이런 상황은 조직을 대표해 거래 업체와 마주하는 협상가의 딜레마를 보여준다. 여기에서 말하는 딜레마는 개인의 가치관과 조직의 이익이다. 당신이라면 평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고수하겠는가, 아니면 조직의 이익을 위해 당신의 가치관을 희생하겠는가.

마이클 윌러 하버드경영대학원 교수가 쓴 ‘협상의 기술’에서 조사한 결과를 보면 흥미롭다. 조사 대상자의 53%는 A를 답으로 골랐다고 한다. 판매자에게 한 약속을 깨고 싶지 않다고 사실대로 말하겠다는 것이다. 상도의를 지키겠다는 얘기다.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과연 상사에게 정면으로 맞설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직장에서 자신의 원칙을 지키겠다는 것은 좋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판매자와 합의를 지킨다는 것은 혹시 더 얻을지도 모르는 회사의 이익을 포기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렇다면 조직의 일원으로서 무엇이 우선일까. 회사의 수익일까, 아니면 개인의 가치관일까. 회사에서 급여를 받는 직장인에게는 쉽지 않은 선택이다.

답변 B를 택한 응답자는 18%였다. 10 명 중 2명이 채 안 된다. 그들은 팀장이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대답했다. 팀장에 대한 예의라고 볼 수도 있고 충성심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답변의 숨은 뜻은 상대에게 얘기해 봐서 ‘들어주면 좋고 아니면 말고’다. 그런데 이런 협상 방식에 대해 협력 업체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한마디로 짜증날 것이다. 기껏 합의했는데 이제 와 또 깎자고 하니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이에 따른 파장 역시 간단하지 않을 수 있다.

우선 거래 상대방이 김 대리가 속한 회사에 대해 실망할 것이다. 개인에 대한 믿음에도 금이 간다. 권한 없는 상대라는 생각이 들 것이고 앞으로 김 대리와의 협상에 진지하게 임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마지막으로 29%의 응답자가 답변 C를 선택했다. 가격을 반드시 내려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을 넌지시 암시하겠다는 내용이다.

이 선택은 협력 업체와의 합의를 지키는 동시에 팀장 지시도 어기지 않는다. 언뜻 보면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팀장은 자신이 시킨 대로 김 대리가 행동했다고 믿을 것이다. 정확하게 따져볼 때 사실은 팀장을 속인 것이다. 조직원으로서 윤리 의식의 문제가 될 수 있다. 김 대리의 이런 방식은 향후 있을 다른 협상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속인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떳떳하게 행동하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확대 해석하자면 조직 생활에 좋지 않은 동기로 남을 가능성이 내재됐다.

이런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해결책은 과연 무엇일까. 필자는 이와 관련해 세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 조직의 협상 문화 정립도 좋은 방법


첫째는 ‘협상의 권한’이다. 결정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미리 정의하고 그 범위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견적 입수와 1차 협상까지는 김 대리가 하고 최종 협상은 팀장이 하는 식이다.

이 기준을 분명하게 세우고 행동한다면 조직의 이익도 지키고 자신의 가치관도 지킬 수 있다. 좀 더 나아간다면 ‘그라운드 룰’을 정하는 것도 좋다. 그라운드 룰은 협상 테이블에서 당사자가 지켜야 할 행동 수칙이다. 어디까지 협상할 수 있고 무엇을 내줄 수 있으며 반드시 지켜야 할 조건이 무엇인지 미리 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협상하기 전에 목표, 전략, 합의 가능 구역, SWOT 분석, 이해관계인 등을 정리한 ‘협상 전략서’ 같은 ‘툴(tool)’이 효과적이다. 이것을 조직의 특성에 맞게 만들어 놓고 활용하면 도움이 된다.

둘째, 커뮤니케이션 채널을 구축하는 일이다. 협상 상황은 수시로 변한다. 변화하는 내용에 대해 조직 내에서 정보 공유가 원활해야 오해가 해소된다.
조직 대신해 상대와 마주하는 ‘협상가의 딜레마’ [이태석의 경영전략]
채널의 형태는 대면이든 비대면이든 상관없다. 다만 핵심은 ‘정기적인 소통’에 있다. 사례를 보자.

인수·합병(M&A)을 앞둔 은행의 협상 책임자는 최고경영자(CEO)와 매일 아침 9시에 커피 타임을 가졌다. 그에게 이 커피타임은 협상에 가장 큰 도움이 됐던 시간으로 기억된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CEO와 본인의 생각을 한 방향으로 정렬해 주는 역할을 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었고 협상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김 대리도 마찬가지다. 팀장과의 솔직한 대화가 해결책이 될 것이다. 협력 업체와 어렵사리 합의했고 더 이상 협상의 여지가 없다는 점을 소상하게 밝히는 것이다. 다시 협상한다는 것은 당사자인 자신에게도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회사의 평판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셋째, 조직의 협상 문화를 정립하는 일이다. 협상 문화는 조직원들이 협상에 임하는 자세와 마음가짐을 의미한다.

협상 상황이 천차만별이라 당사자의 대응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그 방향까지 제각각이면 배가 산으로 간다. 이를 막아주는 것이 협상 문화다.

행동은 다르더라도 방향은 일치하게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국내 모 철강 회사는 단기적으로 유리한 상황이더라도 장기적인 신뢰 관계 구축을 우선시한다. 협력 회사를 쥐어짜게 되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이유에서다.

‘가격’이 아니라 협상에서 얻을 수 있는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협업하는 자세를 강조한다. 이런 문화가 직원들에게 내재돼 있어 회사는 일일이 점검하고 지시할 필요가 없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78호(2020.05.23 ~ 2020.05.29)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