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식의 정치판]
김종인, ‘더 센 경제 민주화 시즌 2’

“1인 월 50만원, 年 311조 재원 어떻게 마련하나” 거센 반론
[홍영식의 정치판] 통합당, 기본소득 우파 버전 ‘안심소득’ 논란 불붙다
[한경비즈니스 = 홍영식 대기자] ‘4·15 총선’에서 참패한 미래통합당이 이념적 좌표 재설정에 나서고 있다. 선거 패배가 중도층과 30~40대가 외면한 때문이라고 보고 이들의 마음을 잡지 못한다면 생존 자체가 힘들어진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큰 방향은 ‘좌클릭’이다. 노동·복지 등 진보·좌파의 어젠다를 선점, 주도해 나가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를 받아들인 것도 이런 차원에서다. “기존 통합당에 덧씌워진 ‘부자·기득권·수구’ 이미지를 벗어던지지 못한다면 당은 ‘영남 자민련화’되고 다음 대선뿐만 아니라 4년 뒤 총선도 어려워질 것(김세연 전 의원)”이라는 것이다.

김종인 비대위원장의 일성도 ‘엄청난 변화’였다. 그는 5월 27일 비대위 체제가 통합당 전국위원회에서 승인 받은 직후 “변화 없이는 당의 생존이 불가능하다”며 “2022년 3월 9일 대선까지 모든 것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또 보수·자유 우파를 더는 강조하지 말 것을 당부하며 “경제 민주화보다 더 새로운 것을 내놓아도 놀라지 말라”고까지 말했다.

김 위원장은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경제 민주화를 추진한 적이 있다. 김 위원장은 당시 대기업 기존 순환 출자까지 규제하자고 주장해 박근혜 당시 대선 후보와 마찰을 빚은 끝에 결별했다. 경제 민주화가 미완에 그쳤다는 것이 그의 인식이다. 이번엔 상황이 달라졌다. 8년 전엔 친박근혜계가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어 그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지만 지금은 계파의 힘이 쭉 빠졌고 통합당이 공식 기구를 통해 그를 삼고초려해 모신 상황이다. ‘김종인발(發) 경제 민주화 시즌2’를 힘 있게 추진할 터가 마련된 것이다.

◆“‘부자·기득권·수구’ 이미지 못 벗으면 다음 대선 힘들어”

김 위원장 측은 “인물뿐만 아니라 이념과 노선을 재정립해 당의 정강·정책을 모두 바꿀 것”이라고 말했다. 당장 기본소득제가 중심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기본소득제의 사전적 의미는 ‘국가가 재산의 많고 적음, 노동의 유무와 관계없이 모든 개인에게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소득’이다.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누리도록 하자는 취지다. 찬성론자들은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AI) 발전 등으로 대량 실업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 국가가 기본적인 사회 안전망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실업은 소비 위축과 유효 수요 감소로 이어져 경제에 큰 타격을 주는 만큼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기본소득제가 필요하다는 점도 내세운다.

지난 5월 19일 통합당 당선자 워크숍에서 발제자로 나선 장경상 국가경영연구원 사무국장은 “우파의 핵심 가치인 반공·안보·성장 등에서 벗어나야 유권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다”며 기본소득제 논의를 제안했다. 조해진 의원도 “기본소득제를 어려운 분들에게 제한적으로 도입하도록 전향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도 더불어민주당 비대위 대표 시절인 2016년 기본 소득의 필요성을 언급한 바 있다.

경제 관료 출신의 김희국 통합당 의원은 “우리 당은 성장 없이 분배 없다고 주장해 왔지만 국민들은 ‘내 소득이 줄어들고 일자리가 없어지는데 내 삶은 어떻게 되나’라고 묻는다”며 “이 때문에 ‘성장을 우선하더라도 실질적으로 분배 효과가 이뤄지도록 하겠다’고 얘기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본인 노력으로도 도저히 살기 어려운 사람들에겐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할 수준의 소득을 지원해 주는 게 공동체의 책임”이라고 주장했다.

문제는 재원이다. 기본소득제 운만 뗐지 어느 정도 수준에서 재원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지 등에 관해 진전된 논의가 전혀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기초 생활비 수준인 1인당 매월 50만원을 지급한다면 1년 예산으로 약 311조원이 필요하다. 찬성론자들은 각종 세금 감면 제도를 폐지하고 여러 부처와 지방자치단체별로 주는 기초연금·아동수당 등 다양한 복지 수당을 기본 소득으로 통폐합하면 가능하다고 한다. 복지 전달 체계를 효율화해 행정비용도 절감할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이렇게 해도 기초 생활 수준의 소득을 보장하는 수준의 재원을 마련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한국사회경제학회가 지난해 2월 발행한 분석 자료에 따르면 2015년 기준 소득공제·세액공제에 의한 조세 감면액은 총 55조8000억원에 불과하다. 각종 복지 수당을 없애는 것은 기존 혜택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저항이 심할 것으로 보여 시행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증세 얘기가 나오지만 ‘조세 저항’을 부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정부로선 부담이다.

이 때문에 통합당 내에서도 반대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대표적 경제통으로 꼽히는 추경호 의원은 “기본 소득의 실상이 뭔지 제대로 알고 도입하자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또 다른 복지 수당 하나 신설해 부의 형평성 문제를 조금 해결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자는 수준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며 “지금 국세 수입이 300조원이 채 안 되는데 기본소득제를 실시하려면 200조원을 더 걷어야 한다. 소득 세액공제, 기초 생활 보장제가 다 없어져야 하는데 이런 실상을 알고 찬반을 얘기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어 “생활 속 현장의 이슈를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정책 대안을 만들어야 하는 것에는 동의한다”면서도 “지금 여의도 정치권은 굉장히 관념론적이다. 복지 구조 조정을 아무리 해도 재원 마련이 어려운데 실체도 없는 이슈로 진영을 가르고 있다”고 비판했다.

◆“재원 문제로 남미·남유럽식 모라토리엄에 봉착할 것”

유경준 의원도 “기본 소득이든 변형된 기본 소득이든 재원 문제는 확실히 얘기하고 가야 한다”며 “이슈 선점을 경쟁적으로 하다가는 퍼주기 경쟁이 된다. 어느 순간 멈추지 않으면 재원 조달 문제에 봉착해 남미식이나 그리스·이탈리아식 모라토리엄에 빠질 수 있다”고 비판했다. 반대론자들은 또 기본소득제가 일할 의욕 감소, ‘무임승차’ 만연 등을 부를 수 있다고 우려한다. 기본소득제가 핀란드에서 2년간 실험 끝에 중단됐고 스위스에서는 도입 찬반에 대한 국민투표까지 진행됐지만 압도적 반대로 무산된 것도 이런 우려 때문이라는 게 반대론자들의 주장이다.

이 때문에 통합당도 기본소득제 이슈 선점에 나섰지만 서둘러 할 일은 아니라는 데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김종인 위원장이 “기본 소득이라는 것은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다”며 “그 절차가 얼마나 복잡한지 알아보고 얘기해야 한다”고 말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김세연 전 의원도 “급격하게 기본 소득 도입을 추진하면 수용하기 어렵다”며 “적어도 30년간 이행 계획을 잘 세워야 한다”고 했다.

통합당은 기본 소득의 우파 버전인 ‘안심 소득’의 구체 내용을 다듬는 작업에 들어갈 예정이다. 이준석 전 통합당 최고위원은 “보수냐 진보냐에 따라 다른 버전의 기본소득제가 나올 수 있다”고 했다. 일하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현금을 지급하는 기본소득제와 달리 안심소득제는 한계 상황에 처한 사람들은 더 주고 고소득층에겐 아예 주지 않거나 덜 주자는 것이다. 천하람 통합당 청년비상대책위원은 “세금을 많이 걷어 나눠 주는 것이 아니라 국가 연구·개발(R&D) 등에서 나오는 수익을 배당하거나 복지제도에 들어가는 행정비용을 줄여 기본 소득으로 돌리자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어떤 방안이든 이론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복지 구조 조정은 어느 정도 수위에서 할지 △이를 통해 재원을 얼마나 확보할 수 있을지 △1인당 얼마를 주는 게 적정한지 △소득 수준별 차별화는 어떻게 할지 등 검증된 게 하나도 없다. 하나하나 많은 논란을 부르고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민감한 이슈들이다. 다른 나라의 선례도 없다. 본격 논의에 들어가더라도 머나먼 길이 될 수밖에 없다.
[홍영식의 정치판] 통합당, 기본소득 우파 버전 ‘안심소득’ 논란 불붙다
yshong@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79호(2020.05.30 ~ 2020.06.05)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