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성’ 둘러싼 판례 쏟아져…회사의 엄격한 지휘·감독 등 있어야만 인정돼
마음대로 할인 판매한 백화점 매장 관리자, 법원 판단은 “노동자 아니다”
백화점은 소비 트렌드를 좌우하는 대표적인 오프라인 유통망으로 꼽힌다. 백화점 입점을 희망하는 브랜드도 많다. 각종 업체들이 백화점에 매장을 낸 뒤 계약직 인력을 고용해 매장 관리와 물품 판매를 맡기는 것은 이미 흔한 일이다.


최근 백화점 매장 관리자들의 ‘노동자성’ 인정 문제를 둔 법원 판례가 쏟아지고 있다. 이들이 일을 그만둘 때 퇴직금을 지급해야 하느냐의 문제를 두고서다.



백화점에서 다른 기업의 매장을 함께 운영하고 자체적으로 할인 판매하기도 한 매장 관리자들을 ‘퇴직금을 지급해야 하는 노동자’로 볼 수 없다는 대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8월 11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1부(주심 박정화 대법관)는 김 모 씨 등 백화점 매장 관리자 11명이 패션 업체 코오롱인더스트리를 상대로 낸 퇴직금 지급 청구 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1심 “회사가 판매 실적 관리했다면 노동자”



김 씨를 포함한 백화점 매장 관리자 11명은 코오롱과 계약하고 백화점에서 코오롱 제품을 판매해 왔다. 물건을 판 뒤 수수료를 받는 방식으로 근무했다. 이들은 코오롱에 종속된 노동자로 일했다며 2017년 코오롱을 상대로 퇴직금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계약 기간 동안 판매 금액을 토대로 회사에서 받은 수수료가 급여에 해당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따라 수수료를 평균 임금으로 보고 퇴직금을 계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심은 김 씨 등 백화점 매장 관리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김 씨 등이 실질적으로 회사 소속으로 일한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에 해당한다며 코오롱이 퇴직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우선 코오롱 측이 매장의 위치와 제품 판매 가액을 모두 결정한 점을 근거로 들었다. 코오롱이 주요 업무 내용을 결정했기 때문에 그 지시를 받아 일한 매장 관리자들을 노동자로 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재판부는 “매장 판매 업무에서 매장 위치와 판매 가액은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데, 코오롱 측이 이를 모두 결정했다”며 “사은품 증정 등 판매 촉진을 위한 행사도 코오롱이 계획했다”고 설명했다.


김 씨 등이 제품을 팔 때 코오롱 측이 판매 실적을 꼼꼼하게 관리했다는 점도 재판부의 논리를 뒷받침했다. 업무 수행 과정에서 회사가 상당한 정도로 지휘·감독한다면 이들을 노동자로 봐야 한다는 과거 대법원의 판례를 들었다.


판결문에 따르면 코오롱 측은 김 씨 등에게 달성해야 할 매출액과 매출액 목표를 제시하고 이를 일별·주별·월별로 수치화해 매일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매장 관리자들이 코오롱 제품만 판매해야 했고 매장 직원의 최소 채용 인원수도 코오롱이 정했다는 점도 이유가 됐다. 매장 관리자들이 백화점 영업시간에 맞춰 일한 것도 이들의 노동자성을 인정하는 요건으로 꼽았다.



재판부는 “백화점 판매원들은 매출액에 따라 ‘수수료’를 받을 뿐 기본급이나 고정급은 받지 않았고 해당 수수료에서 근로소득세가 원천 징수되지 않았다”면서도 “이러한 사정만으로 노동자성을 쉽게 부정할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2심·대법원 “마음대로 할인 판매…노동자로 볼 수 없어”



하지만 2심의 판단은 달랐다. 김 씨 등 매장 관리자들을 코오롱 소속 노동자가 아니라고 봤다. 매장 관리자들이 마음대로 할인 판매를 한 적이 있다는 데 주목했다. 또 회사가 매장별 프로모션 행사의 시행 여부를 매장 관리자들과 논의한 바 있다는 사실도 짚었다.



재판부는 “김 씨 등이 코오롱 측 담당 직원에게 대등한 지위에서 제품 판매, 신상품 입고, 제품 홍보 방안 등에 대해 적극적·구체적으로 의견을 피력하고 코오롱 측의 잘못을 지적하기도 했다”며 이에 비춰 봤을 때 김 씨 등 매장 관리자들이 코오롱에 종속된 관계로 보기 어렵다고 했다.


재판부는 “행사 진행 방식과 관련해서도 매장 관리자들은 코오롱 측에 다른 매장의 행사 가격을 조정해 달라고 요구한 바도 있다”고도 지적했다.



일부 매장 관리자가 백화점에서 다른 브랜드의 매장도 동시에 운영했다는 점도 노동자성을 인정하기 힘든 근거로 들었다. 코오롱 소속 브랜드의 대리점도 함께 운영하면서 백화점 매장 관리 직원으로 일한 경우도 있었다. 이에 따라 백화점 매장 운영에 전속되지 않은 것으로 봤다.



대법원도 2심 판결에 잘못이 없다며 상고를 모두 기각했다. 대법원은 “관련 법리와 기록에 비춰 살펴봤을 때 원심의 판단에 노동자성 판단 기준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는 등의 잘못이 없다”고 했다.


매장 관리자들이 백화점 영업시간에 맞춰 일했지만 이는 백화점이라는 공간의 특징일 뿐이며 코오롱 측이 노동 시간을 관리한 증거는 아니라는 2심 판단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상고는 기각되고 상고 비용은 김 씨 등 11명이 부담하게 됐다.


◆[이런 판결도]
노동자성 결정은 형식보다 실질적인 계약 내용에 따라 달라져


백화점 매장 관리자들을 두고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해야 한다는 판결도 있다. 회사 측의 엄격한 지휘·감독 등 노동자성의 인정 기준을 만족한다면 위탁 계약을 했다고 하더라도 노동자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신발 판매사와 위탁 계약하고 백화점 등의 매장을 관리하는 매니저들을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해야 한다는 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지난 2월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13부(부장판사 장낙원)는 신발 수입·판매사인 A사가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부당 해고 판정을 취소해 달라’고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A사는 근로 계약이 아닌 위탁 판매 계약으로 매니저들을 고용하고 이들을 통해 전국 백화점과 아울렛 매장 40여 곳을 관리했다. A사는 매니저들에게 매장을 유지하기 위한 지원금을 일정액 지급하고 이들이 올리는 매출액에 따라 일정 부분 수수료를 가져가도록 했다.

A사는 부산의 백화점·아울렛 매장 매니저로 일하던 B 씨와 재계약 조건에 합의하지 못하자 2017년 11월 계약 종료를 통보했다. 이에 B 씨가 “계약 종료는 부당 해고”라며 노동 당국에 구제 신청을 했다. 중앙노동위원회가 B 씨의 구제 신청을 받아들이자 A사는 이에 불복해 소송을 냈다.



법원의 판단은 중앙노동위원회와 같았다. 형식보다 실질적인 계약 내용을 우선적으로 따져봤을 때 B 씨를 포함한 매장 매니저들은 A사에 고용된 노동자에 해당한다고 본 것이다.



재판부는 A사가 웹사이트를 이용해 목표 매출액과 판매 현황 등을 보고 받은 사실을 통해 노동자성이 인정됐다고 판시했다.


단체 채팅방을 통해 매장 진열 상태 등을 관리한 만큼 노동자인지의 여부를 따질 때 중요 기준 중 하나인 ‘지휘·감독’이 이뤄졌다고 봤다. 단체 채팅방에서 출근 여부 확인이 이뤄진 정황 역시 ‘사용자가 지정한 노동 시간·장소에 노무 제공자가 구속’된다는 요건을 충족했다.


재판부는 수수료 외에 유지 지원금 명목으로 매달 일정액의 돈이 고정적으로 지급된 것도 일종의 ‘기본급’이 지급됐다고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B 씨가 일하는 동안 4대 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재판부는 4대 보험 가입 여부가 노동자성을 해한다고 보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런 사정은 사용자가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임의로 정할 여지가 큰 사항”이라며 “노동자성 인정 여부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B 씨가 노동자로 인정되므로 계약 종료는 해고에 해당하는데 A사가 주장하는 해고 사유가 정당하지 않으므로 부당 해고라고 결론 내렸다.



안효주 한국경제 기자 joo@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90호(2020.08.17 ~ 2020.08.23)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