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알못 판례 읽기]
-정년퇴직자 자녀 특채 등과는 성격 다르다 판단…희생 보상·약자 보호로 ‘실질적 공정’에 기여
산재 유족 특별 채용은 ‘채용 반칙’에 해당 안 돼…1·2심 뒤집은 대법
[한경비즈니스 = 남정민 한국경제신문 기자] 1985년 2월 A 씨는 기아자동차에 취직했다. 여러 공장과 연구소 등에서 일하던 A 씨는 2008년 현대자동차로 옮겨 일하게 됐다. 같은 해 A 씨는 급성 골수성 백혈병을 진단받았다. A 씨는 목형이나 석고 모델로 금형 틀을 만든 후 그 틀에 액체를 부어 굳힌 뒤 금형을 만드는 일을 했다. 작업 과정에서 A 씨는 유리 섬유와 시너·도료 등을 주로 사용했는데 1990년대 한국에서 사용됐던 시너와 도료에는 발암 물질인 벤젠이 56%까지 함유돼 있었다. 벤젠은 신체 기관 중 골수 손상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A 씨는 2년 뒤인 2010년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A 씨의 유족들은 근로복지공단에 유족급여 등을 신청했다. 근로복지공단은 노동자가 업무상 재해를 당했을 때 재해자 당사자와 유족들에게 각종 산재보상금을 지급한다. 역학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A 씨의 벤젠 누적 노출량과 급성 골수성 백혈병은 업무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고 A 씨 유족들은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휴업 급여와 요양 급여, 유족 및 장의비 등 총 1억 8000여 만원을 받아냈다.

◆1·2심 “업무 능력 상관없이 뽑는 건 과도한 혜택”


문제는 그다음부터 시작됐다. A 씨 유족들이 단체협약에 따라 “업무상 재해로 사망한 A 씨 가족 중 한 명을 특별 채용하라”고 주장한 것이다. 기아자동차의 단체협약 제27조와 현대자동차 단체협약 제97조에 따르면 ‘업무상 재해로 사망한 조합원의 직계 가족 1인에 대해 결격 사유가 없는 한 요청일로부터 6월 이내 특별 채용하도록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A 씨의 자녀 등은 “현대자동차는 채용 의무를 이행하라”며 소송을 냈다. 이와 함께 회사 측에 손해 배상 책임도 물었다. 재판의 쟁점은 손해 배상 책임보다 단체협약 쪽이었다. 산업 재해로 사망한 자녀를 특별채용하라는 단체협약이 실제로 유효한지 아닌지 여부를 가려야 한다는 것이다. 산재 유족 특별 채용은 ‘현대판 음서제’로 불린다. 그 어떤 이유에서든 취업에서 ‘특권’은 용납되지 않아야 한다는 뜻에서다. 1·2심은 이러한 산재 유족 특별 채용이 민법 제103조가 규정한 ‘사회 질서’에 위반된다고 판단했다. 민법 제103조는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 질서에 위반한 사항을 내용으로 하는 법률 행위는 무효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마디로 해당 단체협약이 공정한 채용 질서에 반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8월 27일, 1심과 2심을 모두 뒤집고 “A 씨 자녀를 특별 채용하라”는 판단을 내렸다.

1·2심의 판단은 같았다. 한마디로 산재 유족 특별 채용은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1심 재판부(당시 서울중앙지법 제16민사부)는 우선 판결문 서두에 회사가 기업 활동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동력을 재배치하는 것이 불가피하며 그 인사권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사용자의 고유 권한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또한 기업 경영과 인사에 관한 사항은 원칙적으로 단체교섭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 사건 단체협약은 (직원의) 업무 능력과 관계없는 조건으로 불특정한 사람을 노동자로 채용할 것을 강요하는 규정”이라며 “사용자의 고용 계약 체결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청년 실업난을 언급하며 해당 단체협약이 민법 103조에 반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최근 청년 실업이 큰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고 20~30대 청년들이 기회의 불공정 속에서 좌절감과 분노를 유례없이 크게 느끼고 있다”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취업 기회 제공의 평등은 종전보다 엄격한 잣대에 의해 평가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산재 유족 특별 채용은 사실상 일자리를 물려주는 것을 제도화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며 “사실상 귀족 노동자 계급의 출현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어 우리 사회의 정의 관념에 반한다”고 설명했다. 해당 회사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대기업으로 그곳에 많은 청년들이 취업하길 꿈꾼다면 더욱 그렇다는 말도 덧붙였다.

2심(당시 서울고등법원 제8민사부)의 판단도 마찬가지였다. 재판부는 “고용정책 기본법 제7조에 따르면 사업주는 노동자를 모집할 때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별, 신앙, 사회적 신분, 출신 지역 등을 이유로 차별해서는 안 되며 균등한 취업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며 “해당 단체협약은 노동자의 능력적 측면에서는 어떠한 요건도 요구하지 아니하고 곧바로 채용 의무를 부과함으로써 과도한 혜택을 부여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대법 “채용 기회에 중대한 영향 없어…유족 특채해야”


하지만 대법원은 이러한 1·2심의 판단을 정면으로 뒤집었다. 회사는 산재로 사망한 노동자의 가족을 노동자로 채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 사건 산재 유족 특별 채용 조항은 민법 제 103조가 정한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 질서에 위반되지 않으므로 효력이 인정된다”고 설명했다.

대법관 13명 중 김명수 대법원장을 포함한 11명은 “이 사건의 산재 유족 특별 채용 조항은 소중한 목숨을 잃어버린 노동자의 특별한 희생에 상응하는 보상을 하고 가족 생계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도록 사회적 약자를 보호 또는 배려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며 “사회적 약자를 배려해 실질적 공정을 달성하는 데 기여하는 조항”이라고 판단했다. 이어 “정년퇴직자와 장기근속자의 자녀를 특별채용하거나 우선 채용하는 합의와는 다르다”고 덧붙였다. 산재 유족 특별 채용이 ‘공정’하지 않다는 비판을 의식한 판단으로 풀이된다. 그뿐만 아니라 “피고들의 사업 규모가 매우 크고 노동자도 많은 반면 이 사건 산재 유족 특별 채용 조항에 따라 채용된 유족은 매우 적다”며 “이러한 특별 채용이 피고들에 대한 구직 희망자들의 채용 기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보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반면 이기택·민유숙 두 명의 대법관은 반대 의견을 냈다. 이 대법관 등은 업무상 재해에 대한 유족의 보호 필요성을 부정하거나 보상을 축소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보호의 방식이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다른 청년 등 제삼자의 희생을 기반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이 대법관 등은 “산재 유족 특별 채용 조항은 구직 희망자들의 지위를 거래의 대상으로 삼은 것과 다를 바 없다”며 “기업의 필요성이나 업무 능력과 무관한 채용 기준을 설정해 일자리를 대물림하는 합의로, 공정한 채용에 관한 정의 관념과 법질서에 위반돼 무효라고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돋보기] 6월 공개 변론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나왔을까?
대법원은 이 사건을 선고하기에 앞서 지난 6월 공개 변론을 진행했다. 원고, 즉 유족 측은 단체협약이 선량한 풍속이나 사회 질서의 한계를 명백히 벗어나지 않는 한 단체협약의 효력은 유효하며 해당 규정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의 관점에서 공정성에도 부합한다고 주장했다. 원고 측 소송 대리인은 “망인은 급성 백혈병을 앓으며 항상 가족들을 걱정했고 그 자녀는 회사로부터 채용을 외면당했을 때 너무 원망스러웠다고 한다”며 “아버지의 빈자리를 대신해 일하는 것이기 때문에 타인의 일자리를 뺏는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이날 원고 측 대리인은 A 씨 자녀의 편지를 읽기도 했다. 원고 측 대리인에 따르면 A 씨 자녀는 “가족들은 아빠가 급성 백혈병으로 허망하게 갈 줄 몰랐고 아빠가 호전돼 회복할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며 “‘고용 세습’이라고 비난 받는 게 답답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피고, 즉 회사 측은 “이 사건 단체협약이 도입됐던 25년여 전과 달리 지금은 일자리 한 자리 한 자리가 중요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현대·기아차의 구직 경쟁률은 심할 때는 700 대 1에 달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어 “현대차는 2013년 7월 생산직 공개 채용을 한 차례 실시한 뒤 채용을 진행하지 않고 있다”며 “그럼에도 2013~2015년 단협으로만 10여 명을 채용한 만큼 이것은 채용의 공정성을 세우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peux@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93호(2020.09.07 ~ 2020.09.13)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