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알못 판례 읽기]

회사가 공매로 산 집 전자 열쇠 교체한 직원 ‘유죄’…개인행동 아니고 유치권 사실 사전 인지
유치권 걸린 아파트, 문 마음대로 땄다면…“회사 소유라도 권리행사방해” [법알못 판례 읽기]
[한경비즈니스 칼럼=안효주 한국경제 기자] 소유권이 먼저일까, 유치권이 먼저일까. 다른 업체가 유치권을 갖고 있는 동산이나 부동산을 매매할 때 맞닥뜨릴 수 있는 문제다. 유치권은 채권을 제대로 회수하지 못한 유치권자가 채권이 변제될 때까지 물건이나 부동산을 점유하고 인도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다. 쉽게 풀어 설명하면 ‘빚을 되돌려 받지 못하는 대신 어떤 물건을 갖고 있을 수 있는 권한’이다. 제삼자가 해당 물건을 달라고 해도 주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회사의 대표가 아니라 직원이 개입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직원이 타 업체의 유치권을 침해했다면 한 개인이 저지른 일탈로 봐야 할까. 타인의 유치권을 무시하고 회사 소유 아파트를 무단 침입·훼손한 회사 직원에게 형법상 ‘권리행사방해’ 혐의를 적용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본인의 회사가 경매로 사들여 소유권을 갖게 됐다고 해도 아파트에 행사되고 있는 다른 회사의 유치권이 우선한다고 봤다. 해당 직원이 회사 업무를 총괄한다는 점을 고려해 실질적으로 대표가 한 행위와 다름이 없다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최근 대법원 제2부(주심 김상환 대법관)가 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A 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유죄 취지로 서울남부지법에 돌려보냈다고 밝힌 사건이다.


서울남부지법 “유치권이 우선…권리행사방해죄 맞아”

A 씨가 관리부장으로 일하고 있던 회사는 2018년 10월 경기 부천의 한 아파트를 공매로 사들였다. 이 아파트는 현대산업개발이 다른 업체로부터 공사 대금을 받지 못한 대신 2015년부터 유치권을 행사하고 있는 물건이었다.


A 씨는 같은 해 11월 해당 아파트 출입문에 게시된 ‘유치권 행사 공고문’을 손으로 뗐다. 이 공고문은 현대산업개발 소유였다. 또 드릴을 사용해 현대산업개발이 설치해 놓은 전자 열쇠를 부수고 안에 들어가 새 전자 열쇠를 설치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이 아파트 출입문에는 현대산업개발이 유치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취지의 공고문이 2015년 초부터 게시돼 있었다. 또 공매 입찰을 진행한 인터넷 사이트에서도 감정평가서를 통해 현대산업개발이 유치권을 행사 중이라는 사실이 기재돼 있었다.


1심 재판부는 A 씨에게 권리행사방해죄·문서손괴죄·건조물침입죄가 있다고 봤다. 이를 토대로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사회 봉사 80시간도 명령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피해자 회사가 해당 아파트에 유치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 회사 소유의 문서를 손괴하고 피해자 회사가 관리하는 건조물에 침입했으며 피해자 회사의 권리 행사를 방해했으므로 유죄”라고 판단했다.


2심에서 “권리행사방해 무죄다”→대법 “유죄 맞다”

2심의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1심 판결과 달리 권리행사방해 혐의는 무죄로 판단했다. 아파트를 실제로 소유한 주체는 주유소이고 A 씨가 해당 주유소의 ‘직원’이라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A 씨가 주유소의 대표가 아니라 영업부장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며 “주유소의 대표와 공모했다는 증거 없이 A 씨가 직원 개인으로서 B 회사에 대해 유치권 행사를 방해했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권리행사방해는 ‘권리의 목적이 된 자기의 물건을 손괴해 타인의 권리 행사를 방해’할 때 적용되는데 회사 소유인 아파트가 A 씨에게 ‘자기의 물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또 “A 씨는 회사의 대표이사가 아닌 관리부장일 뿐인 점에 비춰 보면 대표이사와 공모했다는 증거가 제출되지 않는 이상 권리행사방해죄로 처벌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다시 판결을 뒤집어 A 씨에게 “권리행사방해죄가 있다”고 했다. A 씨의 직무 권한에 비춰 권리행사방해죄로 처벌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대법 재판부는 A 씨가 회사 업무를 전체적으로 도맡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재판부는 “A 씨는 동생이 대표로 있는 주유소에서 관리부장으로 일하며 부동산 관리 등을 포함해 회사 업무를 총괄했다”며 “A 씨의 행위는 주유소로부터 위임받은 직무 권한 범위에 포함되므로 주유소의 대표가 한 일과 다름없다고 볼 수 있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또 “회사의 대표와 상의 없이 저지른 일이더라도 직무 권한 범위 내에서 회사 자산에 가한 행위는 대표가 한 일과 똑같이 법률적 효력이 있다”며 “이를 근거로 권리행사방해에 대해 A 씨는 유죄”라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A 씨에게 권리행사방해죄가 적용됐다.



‘공사 대금’ 문제 시끄러울 때 자주 등장하는 ‘유치권’


유치권은 특히 공사 대금 문제와 관련해 자주 등장한다. 업체들은 수백억 원대의 거래 대금을 제때 받지 못할 때, 거래 회사 소유의 동산이나 부동산에 대해 ‘유치권 카드’를 최후의 수단으로 행사하곤 한다.


지난 6월 삼성중공업 하도급 업체가 공사 대금을 지급하라며 삼성중공업 소유의 해양 설비에 유치권을 행사한 게 대표적인 최근 사례다. 삼성중공업의 협력업체 TSS_GT의 노동자 10명은 거제조선소에서 건조 중인 해양 생산 설비에서 출입구를 막고 공사 대금 지급을 요구했다. TSS_GT 측은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4월 말까지 삼성중공업의 발주를 받아 부유식 해양 생산 설비에서 케이블 포설 작업 등을 했는데 삼성중공업이 대금 약 20억원을 주지 않아 직원 180명이 임금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삼성중공업은 “하도급 업체의 일방적인 주장”이라며 “본 공사에 대한 대금은 모두 지급했다”고 반박한 바 있다.


앞서 지난 4월에는 부산 수영구의 옛 미월드 부지에 대한 유치권을 두고 갈등이 빚어졌다. 4월 1일 밤늦게 부산 수영구 민락동 옛 미월드 부지에서 유치권자인 A 업체와 부지를 최근 매입한 부동산 개발 회사인 T 업체 용역이 서로 대치한 일이 벌어진 것. A 업체 측이 유치권을 주장하며 T 업체의 천공기 반입 등을 막은 게 발단이었다. 이에 T 업체 측이 50여 명의 용역을 동원해 이를 뚫으려는 과정에서 대치가 발생했다. 이날 양측 사이에서는 폭행 등 물리적 충돌은 없었지만 밤새워 신경전이 오간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경찰은 현장에 70여 명을 투입해 질서 유지에 나섰다. A 업체는 2016년 해당 부지 소유주였던 G건설과 토목공사 계약을 한 곳이다. 이 회사는 “당시 구청에 착공계를 내고 부지 측량을 하는 등 공사를 준비하던 중 G건설이 파산하면서 피해를 봤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착공하지 않았지만 전문 인력을 고용, 배치하고 측량 작업에 돌입하는 데 투입된 공사 준비 비용(추산 40억원)을 회수하지 못해 유치권을 주장하며 2년 가까이 현장을 점유해왔다. 그 사이 해당 부지 소유주는 G건설에서 한 종교 재단 소유로 바뀌었다. 지난해에는 T 업체가 이 부지를 사들였다. 지난해 종교 재단이 T 업체에 부지를 매각할 때도 유치권을 해결하기 위해 용역을 동원해 A사 측과 대치하는 일이 발생한 적이 있다.

joo@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301호(2020.10.31 ~ 2020.11.06)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