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알못 판례 읽기]


호텔 운영 업체 복수 노조 사례…교섭대표 노조, 잠정 합의안 소속 대의원들만 알리고 가결
단체 협상에서 소수 노조 ‘패싱’해도 될까… 대법 “공정 대표 의무 위반”
[한경비즈니스 칼럼=이인혁 한국경제 기자 twopeople@hankyung.com] 한 회사에 복수의 노동조합이 있는 곳이 있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에 따라 각 노조들은 교섭대표 노조를 정해 사측과 협상해야 한다. 노조들이 교섭 창구 단일화 논의에 실패하면 전체 조합원 과반으로 조직된 다수 노조에 교섭대표 노조 자격을 부여하는 조항도 있다. 하지만 교섭대표권을 갖고 있다고 해서 사측과의 논의 과정에서 소수 노조를 완전히 ‘패싱’해선 안 된다. 교섭대표 노조는 권한과 함께 소수 노조에 대한 설명과 협의 의무도 동시에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 교섭대표 노조가 소수 노조에 협상 과정을 제대로 알리지 않은 채 합의안을 가결했다가 위자료를 내게 된 사례를 통해 교섭대표 노조의 권한과 의무에 대해 살펴본다.


연봉제 확대 둘러싼 갈등


호텔 운영 업체 세종투자개발에는 세종호텔연합노조(교섭대표 노조)와 세종호텔노조(소수 노조) 등이 있다. 사측은 수년에 걸쳐 연봉제 확대를 시도했다. 2010년 노사 협상을 통해 취업 규칙과 단체 협약을 바꿔 관리직에 대한 연봉제 실시를 규정했다. 2014년부터 3급 이상 직원(과장급 이상)에게 연봉제가 적용되도록 했고 4급 이상 직원(계장급 이상)에 대한 연봉제 실시도 추진했다.


연합 노조와 사측은 2014년 4월부터 같은해 8월까지 10차례의 실무 교섭과 8차례의 본교섭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 연합 노조는 연봉제 확대 등의 내용이 포함된 사측의 요구 사항을 호텔 노조에 전달하고 사내 게시판에 관련 내용을 공지했다. 그러자 호텔 노조는 연봉제 자체를 폐지하고 모든 직급의 직원들에 대해 호봉제로 전환하는 요구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연합 노조와 사측은 4급 직원까지 연봉제를 확대하되 2015년 1월부터 적용하도록 하는 내용의 단체교섭 잠정 합의안을 마련했다. 2014년 8월 임시 대의원회에서 이 잠정 합의안은 만장일치로 가결됐다. 이 과정에서 연합 노조는 호텔 노조에 잠정 합의안을 마련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임시 대의원회에 호텔 노조의 대의원이나 조합원을 참여시키지 않았다.


교섭대표 노조 손 들어준 1·2심


호텔 노조 측이 절차상 문제를 제기하며 소송전이 시작됐다. 호텔 노조 측은 “(사측과 연합 노조가 체결한) 합의서는 교섭대표 노조의 소수 노조와 조합원들에 대한 설명·협의 의무를 위반한 것”이라며 “교섭대표 노조와 사용자는 교섭 창구 절차에 참여한 노조 또는 그 조합원 간에 합리적 이유 없이 차별을 해선 안 된다는 노조법의 ‘공정 대표 의무’를 위반해 법적 효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1심은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재판부는 “사측은 연합 노조에 대해 경영상 어려움 등으로 연봉제 도입이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 설명했고 연합 노조 역시 경영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선 임금 체계를 연봉제도로 변경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에 대해 공감해 정규직 연봉제 규정에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항소심의 판단도 같았다. 2심 재판부는 “당시 교섭대표 노조가 소수 노조의 대의원에게도 대의원회 의결 등에 참여할 권리를 보장해야 하는지에 관해 확립된 판례나 관행 등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며 “이 점에서 불법행위가 성립하기 위한 요건인 고의·과실 등 인정에 어려움이 존재한다”고 밝혔다.


항소심은 또 연합 노조 등이 호텔 노조 측의 의견을 수렴하려는 절차도 취했다고 봤다. 호텔 노조 측이 호봉제 전환을 요구하는 의견을 제시한 점, 연봉제에 대한 회사의 요구안을 사내 게시판 등에 공지한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그러면서 호텔 노조 측의 ‘호봉제 역제안’을 두고 “이처럼 연봉제를 폐지하자는 의견은 실현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재판부는 또 “연봉제의 내용은 4급 이상의 직원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내용으로, 연합 노조 소속 조합원에게만 유리한 지위를 인정하고 호텔 노조 소속 조합원에 대해서는 차별적이고 불리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사정을 종합할 때 원고 측의 공정 대표 의무 위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대법 “재량권 범위 일탈”


하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교섭대표 노조가 단체 교섭 과정의 모든 단계에서 소수 노조에 대해 일체의 정보 제공 및 의견 수렴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고 해서 절차적 공정 대표 의무를 위반했다고 단정할 것은 아니다”면서도 “기본적이고 중요한 사안에 대한 정보 제공 및 의견 수렴 충분히 거치지 않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엔 공정 대표 의무 위반을 인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사건에서 연합 노조가 재량권을 일탈했다는 게 대법원의 최종 결론이었다. 대법원 재판부는 “단체 교섭 과정에서 중요한 사항인 잠정 합의안에 대해 자신(연합 노조)의 대의원들에게만 알리고 대의원회의 결의 절차를 거쳤을 뿐 호텔 노조에 대해 설명하고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를 전혀 거치지 않은 것은 교섭대표 노조가 갖는 재량권 범위의 일탈”이라고 지적했다.


다만 대표권이 없는·호텔 노조 대의원이 연합 노조 대의원회 결의에 참여할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은 차별로 볼 수 없다고 판결했다.

돋보기


과거 이런 판결도…
“교섭대표 노조에만 사무실·신입교육시간 배정은 차별”


과거에도 사측·교섭대표 노조와 소수 노조 사이 갈등이 소송전으로 비화한 다양한 사례가 발생했다. 단체교섭권을 보유하고 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소수 노조를 합리적 이유 없이 차별해선 안 된다는 것이 대체적인 판결 경향이다.


2018년엔 교섭대표 노조에만 사무실을 제공한 것은 위법한 차별이라는 취지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바 있다. 당시 대법원 재판부는 “다른 노조에는 물리적 한계나 비용 부담 등을 이유로 사무실을 전혀 제공하지 않는 등 행위는 합리적 이유에 따른 차별이라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 “노조의 존립과 발전을 위해 일상적인 업무가 이뤄지는 공간의 중요성을 고려하면 교섭 대표 노조에 사무실을 제공한 이상 다른 노조에도 일률적·비례적이지는 않더라도 상시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사무실을 제공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덧붙였다.


신입 사원 교육 시간을 교섭대표 노조에 유리하게 배정해선 안 된다는 하급심 판례도 있다. 한 보험 회사가 신입 사원 교육 시간으로 교섭대표 노조에 50분, 소수 노조에 10분을 배정하자 소수 노조가 반발해 소송을 제기한 사건이다. 2014년 서울행정법원은 “신입 사원의 교육 시간에 노조 설명회 시간을 부여하는 것은 노조 제도와 관련 법령의 이해와 노조에 대한 홍보, 가입 안내 등을 위한 것”이라며 “소속 노조원 수에 따라 교육 시간이 달라질 것은 아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또 “오히려 소수 노조가 조합의 규모 확대를 위해 신입 사원이 집결해 있는 교육 과정에서 자신들을 홍보할 필요성이 더욱 높아 보인다”고 설명했다.


타임오프제(근로 시간 면제 제도) 한도를 교섭대표 노조와 소수 노조에 차별적으로 부여하는데 대한 문제 제기도 있었다. 교섭대표 노조와 소수 노조의 타임오프 비율이 조합원 수 비율보다 지나치게 높은 것은 잘못이라는 법원 판례도 있다. 가령 교섭대표 노조의 조합원 수가 소수 노조보다 10배 많은데 타임오프 한도가 20배 많다면 잘못이라는 것이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305호(2020.11.30 ~ 2020.12.06)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