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 전략]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 것이 세상 이치…다양한 가치와 이해관계를 엮어 내야 [한경비즈니스 칼럼=박찬희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 카리스마 넘치는 최고경영자(CEO)가 최고의 인재들과 짜내는 정교한 전략 계획과 이를 일사불란하게 실천하는 성실한 관리자들. 경영학 책에 흔히 나오는 이야기다.
그런데 실제로 기업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이런 ‘훌륭한’ 회사를 본 적이 없다. 멍청한 경영자가 아집과 독선 혹은 무지에서 비롯된 황당한 생각을 찍어 누르는 한심한 경우는 일단 논외로 하더라도 기업 안팎의 다양한 가치관과 엇갈리는 이해관계 속에서 과연 어떤 전략이 타당한지 판단 자체가 어려울 수 있다.
실제로 전략을 실천하는 사람들 역시 나름의 생각이 있고 이해관계가 있는 데다 서로 촘촘하게 어깨동무하고 눈치 보는 ‘월급쟁이 신공’을 작동하면 전략을 위한 기초 정보 자체가 왜곡된다. 거창한 계획 역시 작은 부분에서 조금씩 망가지다가 결국 흐지부지된다.
경영자 마음대로 안 되는 세상
섬유 수출로 시작해 정밀화학과 반도체로 사업을 확대하며 세계적 기업집단이 된 A그룹의 가상 사례를 생각해 보자.
창업자의 아들로 30년째 그룹을 이끌고 있는 K 회장은 정밀화학과 반도체를 직접 키워낸 유능한 경영인이다. 나름 탄탄한 지배 체제와 실적을 보여주지만 A그룹과 K 회장의 사정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애써 젊은 인재들을 선발하고 영입해 해외 유수의 컨설팅 회사와 만들어 낸 신사업 전략에 대해 회사 안팎의 시선은 복잡하다. K 회장 혼자 ‘내가 옳다’고 돌파하기엔 세상이 결코 만만하지 않다.
K 회장은 에너지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해외 사업을 확대하려고 한다. 몇 년 전부터 아들이 맡아 온 신설 회사를 해외 에너지 사업의 창구로 삼아 새로운 틀에서 추진하고 싶지만 연기금을 비롯한 재무적 투자자들은 상속 작업을 위한 계열사 지원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한다.
채권단과 투자자들은 재무적 안정성에 대해서도 우려를 제기하는데 ‘토사구팽’을 걱정하는 기존의 섬유·무역 부문의 반발까지 소재로 삼아 힘을 보탠다.
해 오던 사업에 집중하자는 소박한 생각이지만 ‘핵심 역량’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되면서 회사 일에 별 관심이 없던 말 많은 사람들의 ‘여론’이 되기도 한다.
A그룹은 섬유·정밀화학 등 기존 사업에서 현금을 확보하며 규모를 줄여 가려고 하지만 새 정부는 경기와 고용을 위해 과감한 시설 투자와 고용 확대를 요구하고 있다.
정치권과 시민 사회 역시 한목소리로 기존 사업들에 대해 노동자 보호와 함께 지역 사회와 협력 업체들에 대해 적극적인 배려를 요구하고 있다. 에너지 해외 사업은 새 정부의 정책 기조는 물론 정치권과 시민 사회의 요구에도 부합하지만 그렇다고 기존 사업들에 대한 ‘정의롭고 따뜻한 경영’의 요구를 접어주지는 않는다.
회사 안팎의 주장들도 나름의 논리가 있는 데다 이해관계가 단단하게 뭉쳐 있어 물러설 공간이 별로 없다. 정책 생태계를 이루는 전문가, 시민 사회, 정치권의 요구는 수많은 사람들의 속사정이 얽혀 형성된 것이고 노조나 협력 업체의 요구도 다르지 않다.
K 회장은 미래 가치를 주장하지만 노조와 협력 업체는 그 미래의 불확실성을 들어 반박할 것이다. 상속 작업이라는 시선, 그리고 ‘핵심 역량에서 벗어난 사업’이라는 유식한 비판에 재무적 안정성도 걱정이라는 내부 사정까지 얹으면 스토리는 더욱 탄탄해지고 ‘사회적 책임과 공존공영’이라는 거부하면 나쁜 사람이 되는 명제까지 더해지면 여론의 장에서 뭇매를 맞게 된다. 대중의 정서와 눈높이가 여기 맞춰지면 정치권과 시민 사회를 설득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미래 산업과 에너지 정책 때문에 A그룹의 주장을 들어주던 정부 당국자들도 난감해진다.
기존 사업에 돈을 댄 채권단과 투자자들도 만만치 않다. 승계 작업 의혹이나 재무적 안정성에 대한 우려를 넘어서려면 확실한 현금 확보가 필요한데 이는 투자와 고용을 확대하라는 정부 당국의 요구나 기존의 이해관계가 절실한 노조, 협력 업체의 주장과 배치된다. 만약 K 회장이 ‘공존공영’의 요구에만 대책 없이 고개를 숙인다면 채권 회수와 주가 하락으로 금융 조달에 문제가 생길 수 있고 경영진에 대한 견제와 압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채권자와 투자자들로서는 K 회장이 정책 생태계 전반의 요구를 제대로 풀어내지 못해 사업이 엉망이 되면 원금 확보도 어려워지니 이것도 곤란하다.
속사정을 모르면 되는 일이 없다
K 회장은 ‘백절불굴’의 창업 정신은 고사하고 한 발짝도 움직이기 어려운 앞뒤 꽉 막힌 상황이 답답하다. 촘촘하게 얽힌 이해관계에 사업을 모르는 사람들의 막연한 말과 생각이 아교처럼 스며들어 뒤엉키고 굳어 가는 판이 어이없기도 하다. 하지만 남의 돈을 썼으면 그 말을 들어야 하고 세상의 틀에서 살며 힘을 얻으려면 맞춰 주며 설득하는 수밖에 없다.
겉보기엔 절대적 경영권을 행사하는 조직의 속사정도 심란하기는 마찬가지다. 1980년대 한국 대학을 인수한 재일교포 이사장은 당시 개발이 덜 됐던 강남 외곽으로 학교를 이전하려고 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 진척이 없고 토지 매입이 제대로 안 되는 사이에 땅값이 올라 이전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학교 주변에 하숙집·음식점·약국을 운영하거나 부동산을 갖고 있는 주요 보직자들과 직원들이 서로 눈치 보며 말 맞춰 핑계를 대며 시간을 끈 결과다. 대학의 의사 결정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미룰 수 있고 방학이라는 피난 기간도 있는 데다 실무 직원이 인허가 서류 하나만 부실하게 내도 몇 달은 훌쩍 지나가니 조직 구석구석을 알지 못하는 이사장은 넋 놓고 바보가 된 셈이다. 대학 개혁을 요란하게 떠든 다른 이사장도 나중에 알고 보니 학교에 웅크리고 수십 년을 눈칫밥으로 버틴 ‘보직 전문’ 교수들의 권세놀이에 이용만 당했더라는 얘기도 있다.
나름의 가치를 위해 사심 없이 헌신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그 ‘가치’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신념이 강하면 설득이 더 힘들 수도 있다. 그리고 뜻있는 가치보다 당장의 이익이 급하거나 소속 집단의 이익에 순응할 수 없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 따라서 다양한 가치와 실타래처럼 엉킨 이해관계를 이해하고 풀어내는 통찰력과 실행 능력이 없는 전략은 경영학 단어들만 잔뜩 늘어 놓은 문서놀이에 불과하다.
앞에서 본 K 회장의 답답한 사례에도 실마리는 있다. 에너지 사업에 대한 투자 유치를 통해 상속 승계를 위한 편법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줄 수 있고 기존의 채권자와 투자자에게 돈 벌 기회를 만들어 주는 방법도 가능하다. 사업 조정 대상인 회사의 임직원에게 실익이 돌아가는 구조를 짤 수도 있다(이미 여러 성공 사례가 보고된 바 있다).
시설 투자와 고용 확대를 요구하는 정부 당국에는 미래 가치와 경제에 주는 영향을 설득하고 정치권과 시민 사회의 ‘따뜻한 경영’의 요구도 고개 숙여 듣고 명분을 살리는 지혜도 필요하다. 나름의 담론을 통해 직접 대중을 설득해 풀어갈 수도 있다. 세상은 이런 노력들이 쌓이면서 바뀐다.
통일신라 말기로 추정되는 비석에는 ‘왕도가 무너져 벌거벗은 힘이 판치는 세상’을 한탄하는 글이 나온다.
혹자는 당나라 과거에 급제해 나름 명성을 얻고 귀국한 최치원이 헝클어진 나라꼴을 안타깝게 여기며 쓴 것이라고 추정하는데 다르게 보면 가문과 혈통으로 짜인 통치 체제가 무너지고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춘 집단들이 이합집산하며 패권을 만드는 달라진 세상에서 설 자리를 잃은 ‘문사(文士)’의 시대착오적 한탄에 불과하다. 경영학 책에 나오는 ‘정교한 전략 계획과 일사불란한 실천’ 역시 주워들어 외운 이론에 현실을 짜 맞추는 유식한 억지일 뿐이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310호(2021.01.04 ~ 2021.01.10)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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