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춘의 국제경제 심층 분석]
-암호화폐 시대, ‘고용 창출’ 목표 등 통화정책 변화 필요…‘화폐개혁’ 논의 필요성 커져
‘현금 없는 사회’ 부르는 암호화폐…힘 받는 ‘화폐개혁론’?

[한경비즈니스= 한상춘 한국경제신문 객원논설위원 겸 한국경제TV 해설위원] 페이스북이 전 세계에서 통용될 수 있는 독자 암호화폐인 ‘리브라(Libra)’를 내년 1월부터 발행한다고 발표했다. 한때 최고점 대비 절반 이하로 떨어졌던 각종 암호화폐 가격이 상승세로 돌아섰다. 각국 중앙은행은 반대하고 있는 가운데 이제는 암호화폐 시대에 맞춰 변신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가장 먼저 중앙은행 목표부터 암호화폐 시대가 전개될 것에 맞춰 수정해야 한다는 요구다. 전통적으로 중앙은행 목표는 물가를 안정시키는 데 있다. 밀턴 프리드먼과 같은 통화론자들은 ‘천사와의 키스’만 할 것을 주장해 왔다. 중앙은행이 물가 안정 이외의 다른 목표를 추구하는 것은 ‘악마와의 키스’라고 할 정도로 금기시(taboo)해 왔다.

하지만 세계경제에서 온라인과 모바일 거래 수단의 발달로 물가는 추세적으로 안정돼 왔다. 날로 격화되는 경쟁을 이기기 위해서는 최종 상품의 가격 파괴로 ‘월마트 혹은 스마트폰 효과’가 보편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국가의 물가는 중앙은행이 설정한 물가 목표 선을 밑돌고 있다. 암호화폐 시대가 전개되면 물가는 더 안정될 것으로 예상된다.
◆기준금리 결정, ‘법치’보다 ‘인치’

그런 만큼 중앙은행은 물가 안정만 고집하기보다 고용 등과 같은 다른 목표를 추진해야 한다. ‘악마와의 키스’가 ‘천사와의 키스’로 대접받을 수 있는 시대가 됐다는 의미다. 이미 미국 중앙은행(Fed)은 2012년 12월부터 물가 안정과 고용 창출을 양대 책무로 설정해 통화정책을 운용하고 이다. 벤 버냉키, 재닛 옐런, 제롬 파월로 이어지는 전·현직 Fed 의장은 후자에 더 무게를 두고 통화정책을 운영해 왔다.

금융 위기 이후 전·현직 Fed 의장의 이런 시각을 보다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최적통제준칙(optimal control rule)’이다. 이 준칙은 Fed의 양대 책무를 달성하기 위해 두 목표로부터의 편차를 최소화하는 정책금리 경로를 산출해 통화정책을 운영하는 방식이다. 특히 고용 목표에 도움이 되면 물가가 일시적으로 목표치를 벗어나는 것도 허용해야 한다는 방침이다.

‘현금 없는 사회’ 부르는 암호화폐…힘 받는 ‘화폐개혁론’?

Fed는 ‘테일러 준칙’과 ‘수정된 테일러 준칙’에 의해 산출된 적정 금리를 토대로 통화정책을 운영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두 준칙도 단순히 물가상승률에 성장률을 더해 금리의 적정성을 따지는 피셔 공식과 달리 중앙은행이 물가와 성장 등 여타 거시경제 목표 가운데 어느 쪽에 더 중점을 뒀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금융 위기 이후 제로 금리(유럽과 일본은 마이너스 금리), 양적 완화와 같은 비정상적인 대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회복에는 한계를 맞고 있다. 이런 여건에서 종전의 ‘테일러 준칙’과 ‘수정된 테일러 준칙’은 한계가 크게 노출되는 만큼 ‘최적통제준칙’으로 통화정책을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금융 위기 이후 전·현직 Fed 의장의 주장은 어떤 경우든 물가 목표치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다른 준칙과는 대조적이다. 통화론자는 특정국이 금리 등을 변경할 때 ‘통화 준칙(monetary rule)’에 따를 것을 주장한다. 이를테면 한국은행의 인플레 목표선이 2%일 때 이보다 물가가 올라가면 자동적으로 정책(기준)금리를 올려 안정시켜야 한다는 것이 이 준칙의 핵심이다.

하지만 물가 이외의 고용 등 다른 목표 달성에 도움이 된다면 기준금리를 변경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 최적통제준칙에 따른 금리 결정 방식이다. 통화론자의 시각에서 보면 ‘악마 중의 악마와의 키스’인 셈이다. 전통적으로 물가 안정을 중시하는 유럽중앙은행(ECB)도 ‘법치(法治)’보다 ‘인치(人治)’에 의한 기준금리 결정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현금 없는 사회’ 부르는 암호화폐…힘 받는 ‘화폐개혁론’?

◆화폐개혁 전제 조건, ‘경제 안정’

각국 국민의 화폐 생활도 급변하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현금 없는 사회가 닥치고 있는 점이다. 오히려 국가의 공식적 화폐인 법화(法貨·legal tender)를 갖고 있으면 부패와 탈세 등의 혐의로 의심받는, 즉 케네스 로코프 하버드대 교수가 주장한 ‘현금의 저주(curse of cash)’ 단계까지 이르고 있다.

화폐개혁의 필요성이 증대되고 논의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실제 추진한 국가도 의외로 많다. 미국은 20달러·50달러·100달러짜리를 새롭게 도안해 2013년 발행했다. 이듬해 일본은 20년 만에 1만 엔·5000엔·1000엔짜리 신권을 선보인데 이어 2015년 중국, 작년 말에는 인도네시아가 신권을 내놓았다.

화폐 거래 단위를 축소하는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한 국가도 있다. 터키·모잠비크·짐바브웨·북한 등이 대표적인 국가다. 작년 11월 인도는 전체 화폐 유통 물량의 86%를 차지하는 구권 500루피와 1000루피를 신권 500루피와 2000루피로 교체하는 변형된 화폐개혁 조치를 발표했다. 같은 시점에 베네수엘라도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그 어느 국가보다 한국도 암호화폐 투기가 심하다. 투기 광풍 뒤에 버블이 터지고 심한 후유증에 시달리는 것은 자본주의의 피할 수 없는 길이다. 부패도 심하다. 최순실 게이트를 계기로 기득권에 대한 혐오증도 최고조에 달한다. 문재인 정부도 기득권을 개혁하고 부패를 청산해 정의롭고 깨끗한 사회를 구축해 달라는 국민의 촛불 열망 속에 태어났다.

법화 시대에는 화폐개혁을 추진하는 것만큼 국민의 관심이 높은 것이 없다.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하면 더 그렇다. 특히 경제활동 비율이 놓은 대기업과 부자, 권력층일수록 저항이 크다. 이 때문에 경제가 안정되고 국민의 공감대가 형성돼야 어떤 형태든 화폐개혁의 추진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선진국은 이런 전제 조건 성숙 여부를 중시했지만 신흥국은 부패 청산과 기득권을 손볼 목적으로 전제 조건 충족 여부보다 상황 논리에 밀려 급진적인 방안까지 동원해 추진했다. 이 점이 결과의 차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이명박 정부 때 도입했던 5만원권을 폐지하자는 등 화폐개혁 논의가 고개를 들고 있다.

우리 국민의 화폐 생활이 변하는 만큼 화폐개혁도 논의하고 필요하면 추진할 수 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다른 신흥국처럼 상황 논리에 밀려 추진하면 실패로 끝나고 엄청난 후폭풍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다. 국민(주로 부자와 기득권층)도 화폐개혁은 무조건 반대하면서 암호화폐 투기와 같은 돈 버는 데는 앞장서는 이중적인 태도를 버려야 한다.

schan@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31호(2019.07.01 ~ 2019.07.07)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