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 떠난 김정희를 저버리지 않은 제자…세한도에 고마운 마음 담아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를 볼 때마다 결기와 단호함을 느낄 수 있다. 아마도 문인화의 백미를 꼽으라면 단연 이 작품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림 자체는 단색조의 수묵으로 간결하다 못해 어설퍼 보이지만 일부러 선택한 듯한 마른 붓질이 빚어내는 단단함은 그 어느 그림에서도 찾기 쉽지 않다. 긴 화면에는 집 한 채와 그 좌우로 지조의 상징인 소나무와 잣나무가 두 그루씩 대칭을 이루며 지극히 간략하게 묘사돼 있을 뿐 나머지는 텅 빈 여백으로 남아 있다. 가로로 긴 지면에 가로놓인 초가와 지조의 상징인 소나무와 잣나무를 매우 간략하게 그린 이 작품은 김정희가 지향하는 문인화의 세계를 잘 보여준다.이렇게 극도의 생략과 절제는 추사 김정희의 신세이며 동시에 그의 결기 그 자체다. 그래서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숙연하고 처연하다. 갈필로 형태의 요점만을 간추린 듯 그려 내 한 치의 더함도 덜함도 용서하지 않는 까슬까슬한 선비의 정신이 필선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
이상적을 푸른 소나무에 비유
제목인 ‘세한도’는 ‘논어’에서 따왔다. ‘날씨가 차가워진 후에야 송백의 푸름을 안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也)’가 그것이다. 선비의 기개와 의리를 강조한 내용이다. ‘세한도’는 김정희가 1844년 제주도 유배 당시 그린 것이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그가 59세 때 그린 작품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그림에서 추사 김정희보다 이 그림을 받은 이상적(李尙迪, 1804~1865년)이라는 인물에 주목해야 한다. 이 그림의 진짜 주인공은 바로 이상적이기 때문이다. 김정희는 지위와 권력을 잃어버렸는데도 사제 간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물심양면 지극정성으로 자신을 도와주고 지켜주는 제자이며 역관인 이상적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이 그림을 그려 줬다.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상 가도 정승이 죽으면 문상 가지 않는다는 세태를 비웃 듯이 이상적은 단 한 번도 스승 김정희에게 소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지극히 대했다. 유배지에서 외로울 스승에게 수많은 책과 용품들을 꾸준히 보냈다. 역관인 그가 마음만 먹었으면 막대한 부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치부(致富)보다 스승이 원하는 것을 구하는 데 그 돈을 다 썼다. 여간한 일이 아니다. 김정희는 그런 이상적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해 그려 준 것이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그림의 제목 바로 옆에 ‘우선시상(藕船是賞)’이라고 적혀 있다. ‘우선(이상적의 호) 보시게나’라는 고마움이 그대로 묻어나 있다. 그러므로 이 그림의 주인공은 바로 우선 이상적이라는 인물이다. ‘세한도’는 초라한 판잣집에 소나무와 잣나무 고목이 옆에 서 있는데 유배지의 환경을 표현한 것이며 고목이라고 할지라도 사계절 푸른 생명력을 유지한다는 선비의 지조를 표현한 것이다. 제자의 은공이 고마워 그를 송죽에 비유한 것이다. 초라한 판잣집은 추사 자신을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면 그 소나무들 잣나무들이 자신을 지켜주고 있다는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눈이 온 뒤에 더 푸르른 생명력이 돋보인다고 했으니 제자에 대한 상찬이 간결하면서도 깊다. 이 그림에는 김정희 자신이 추사체로 쓴 발문이 적혀 있어 그림의 격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일반 세상 사람들은 권력이 있을 때는 가까이 하다가 권세의 자리에서 물러나면 모른 척하는 것이 보통이다. 김정희가 절해고도에서 귀양살이하는 처량한 신세인데도 이상적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이런 귀중한 물건을 사서 보내주니 그 마음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공자는 ‘세한연후(歲寒然後) 지송백지후조(知松柏之後凋)’라고 했으니, 이상적의 정의야말로 추운 겨울 소나무와 잣나무의 절조라고 느꼈을 것이다. ‘세한도발(歲寒圖跋)’을 읽어보면 그 절절한 고마움과 애틋함이 가득하다.
그 가운데 압권은 바로 다음 구절이다.
“지금 그대도 내게 이전에도 더함이 없고 이후에도 덜함이 없다. 그러나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 게 없다면, 이후의 그대는 성인의 칭찬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今君之於我由前而無可焉. 由後而無損焉. 然由前之 君無可稱 由後之君 亦可見稱於聖人也耶).”
중국 지식인과의 교량 역할
김정희가 ‘세한도’에 이런 글을 따로 쓸 정도이니 이상적이 김정희를 어떻게 대했는지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김정희는 제주도 유배 중임에도 변함없이 천만리 타국에서 귀한 서적을 구해다 주며 정의를 다하는 제자 이상적에게 감격해 송백과 같은 사람이라며 ‘논어’의 한 구절과 이를 표현한 ‘세한도’를 선물했다.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스승 추사가 진심 어린 마음으로 그려 보낸 선물을 받은 제자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림과 함께 적어 놓은 글을 받아 본 이상적은 수도 없이 읽고 또 읽었을 것이다. 가슴으로 준 스승의 선물을 마음으로 받은 제자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상적은 이 그림을 받고 감격해 스승의 발문 뒤에 자신의 심정을 글로 적었다. 물론 김정희는 제자 이상적에게 이 그림을 그려 주면서 또 다른 의도를 갖고 있었다. 자신의 처지를 중국의 지인들에게 알려 자신을 구명해 줄 힘이 되기를 은근히 바랐던 것이다. 이상적은 스승의 숨은 뜻까지 읽어냈다.
이상적은 제주에 귀양 간 김정희와 청나라 지식인을 계속 이어 준 교량 역할을 담당했다. 이상적은 ‘세한도’를 받은 해 동지사 이정웅을 수행해 연경에 갔는데, 이듬해 정월 중국인 친구 오찬이 베푼 재회 축하연에서 청나라 명사들에게 그림을 보여줬고 그 그림과 글을 보고 감탄한 지인 16명이 제발을 적었다. 이상적은 이것을 현지에서 한 축의 두루마리로 표구해 가져왔다. 아마도 그 명사들은 이 그림을 보면서 비단 김정희만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림을 받은 이상적의 사람됨을 읽었을 것이고 그의 존재에 대해 고마워했을 것이다.
이상적은 역관이었기에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는데 그는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던 추사를 위해 수시로 청나라에서 들여온 서적과 예물을 보내 스승의 외로운 마음을 위로했다. 추사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제주도에서 쓸쓸히 늙어 가는 처지에 청나라에서 가져온 최신 서적을 선물로 받고 제자의 마음 씀씀이에 감격한다. 어지간한 정성으로는 어려운 일일 뿐만 아니라 대역 죄인으로 몰려 귀양 간, 그야말로 끈 떨어진 갓 신세인 사람에게 그러기는 더더욱 어렵다. 그의 인품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세한도’ 이 한 폭의 그림에는 지조와 의리를 중히 여기는 전통 시대의 진정한 인품을 느낄 수 있다. 그림을 그린 김정희만 볼 게 아니라 진짜 주인공 이상적을 기억해야 하는 까닭이다.
김경집 인문학자, 전 가톨릭대 인간학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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