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삼도 진짜 원조는 조선…우리가 제대로 모르면 ‘남의 것’ 될 수도

과장은 때로는 용기와 자부심을 길러준다는 점에서 필요할 때도 있다. 하지만 때로는 사실을 근거 없이 확대해석해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려는 의도에 의해서도 만들어진다. 그 사례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고려인삼’일 것이다.
인삼은 한국의 대표적 약재로 꼽힌다. 동북아 지역에서 삼을 약용으로 사용된 역사는 매우 오래여서 기원전 30세기부터 민간에서 사용됐다고 한다. 삼(蔘)의 고유한 우리말 이름은 ‘심’이다. ‘동의보감’이나 ‘제중신편’, ‘방약합편’에 인삼이 ‘심’이라고 표기된 걸 보면 그게 상용되던 이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마니’가 산삼을 발견했을 때 “심봤다!”라고 소리치는 것처럼 지금도 산삼 캐는 사람들에게는 그 말이 쓰이고 있다.

조선시대 주세붕이 인삼 재배 시작
인삼 하면 ‘고려인삼(Panax ginseng)’이다. 파낙스(panax)는 그리스어 판(pan : 모든)과 악소스(axos : 치료하다)의 합성어다. 그러니까 요즘 말로 친다면 ‘만병통치’쯤 되겠다. 고려인삼의 학명은 1843년 러시아 식물학자 칼 안톤 메이어가 명명했다. 우리는 고려인삼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우리는 그게 고려시대에 재배되기 시작한 것으로 아는 경우가 많다. 그럴 법도 한 게 인삼의 대표적 재배지 가운데 하나가 바로 개성과 강화이기 때문일 것이다. 개성은 고려의 도읍이었으니 그게 고려시대에 시작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여기서 분명하게 언급할 게 있다. 고려시대에 분명 삼이 존재했고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실제로 원나라의 쿠빌라이 황제가 지치고 힘들 때 고려삼을 복용하고 흡족했다는 기록도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인삼이 아니고 산삼이다.
전국 도처에 삼이 많이 자랐다. 따로 재배할 필요가 없을 만큼 많았던 모양이다. 실제로 ‘세종실록’에 보면 전국에서 103개 군이 산삼을 바쳐 올리는 산삼공출군으로 지정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103개 군이면 전국토의 거의 절반쯤 되는 셈이다. 그러다가 삼을 밭에서 재배할 것을 건의한 게 바로 유학자 주세붕이다. 풍기군수를 지내기도 했고 한국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의 전신인 백운동서원을 세우기도 한 주세붕은 상소를 올려 밭에서 인삼을 재배하자고 건의했다. 산삼의 공납량이 증가하면서 관리들의 가렴주구가 심해지고 그에 따른 ‘삼폐(蔘弊)’가 극심해지자 제한적으로 밭에 삼을 심도록 해달라고 상소함으로써 밭 재배가 공식적으로 시작됐다. 물론 16세기 이전에도 가삼(家蔘)이 있었는데, 전남 화순 동복면의 모악산 주변에서 재배된 동복삼이 질이 높았다고 한다(그래서 최근 화순이 개삼지로 인정받았다). 나중에 황해도 관찰사가 된 주세붕은 동복삼을 개성에 심도록 해 개성 인삼의 모태가 되게 했다. 조선 중엽까지만 해도 삼의 고유한 약효가 약화될 것을 우려해 국가에서 인공 재배를 엄격히 금지했기 때문에 공식적인 재배삼으로서의 인삼의 시작은 이때부터라고 해야 옳다. 그러니 ‘인삼’이 재배된 것은 ‘고려’가 아니라 ‘조선’이 맞다.
그런데도 여전히 고려인삼이란 말이 대표어로 쓰이는 것은 개성이 인삼의 최고 생산지였기 때문이었거나 또는 이미 고려시대에 삼이 약재로 널리 쓰였기 때문에 중국이나 다른 나라에서 고려삼이라는 말을 썼던 게 ‘인삼’에까지 이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인삼은 전 세계적으로 북위 34~48도선에서 재배가 가능하다고 한다. 그런데도 중국이나 미주에서 생산된 인삼은 한국의 인삼에 비해 크기는 월등하게 크지만 효능과 약효는 현저하게 떨어진다.
최인호의 소설 ‘상도’에 보면 이미 당시에 청나라에서 인삼을 재배하고 있었지만 고려삼을 최고로 쳤고 가격에서도 몇 배나 더 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상 임상옥이 자신의 질 좋은 인삼을 담합해 값을 후려치려고 농간을 부리자 과감하게 자신의 삼을 불에 태우며 오히려 청나라 상인들의 애를 태우고 결국 그들이 굴복해 오히려 훨씬 더 비싼 값에 매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만큼 우리의 인삼이 중국인들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임상옥의 인삼을 ‘고려삼’이라고 불렀다. ‘고려’라는 브랜드 가치는 이미 그렇게 그 자체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정작 그 브랜드에 대한 제대로의 의미를 모른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미스김라일락’으로 역수입하는 처지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최고의 브랜드는 과연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 브랜드의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어떤 상태일까. 그걸 모르면 언젠가 다른 누군가가 획 낚아채 가도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한다. 라일락은 알아도 ‘수수꽃다리’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수수꽃다리 말고도 개회나무·꽃개회나무·버들개회나무·정향나무 등 수수꽃다리 속에 속하는 비슷한 나무들도 있다. 그런데 그 모양이 비슷하다 보니 언젠가부터 통틀어 라일락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니 한국이 자생지인 이 나무를 엉뚱하게도 해괴한 이름의 ‘미스김라일락’으로 돈 주고 역수입해 관상수로 즐기는 것이다. 이 꽃나무의 원산지는 북한산 백운대다. 1947년 미 군정청 소속 엘윈 미더가 털개회나무(수수꽃다리) 종자로 12개의 씨를 채집해 미국에 돌아가 7개의 종자가 싹을 틔웠고 그중 2가지가 ‘미스김라일락’이 되어 세계시장을 휩쓸고 있다. 우리가 지키지 못하는 브랜드, 우리도 모르는 브랜드는 그렇게 허망하게 잃을 수 있다.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수수꽃다리만 그런 게 아니다. 산딸나무·원추리·호랑가시나무 등 이미 미국이 자신들의 식물 유전 자원으로 등록했다. 미국이 확보한 1036종의 식물 유전 자원 가운데 1000여 종은 한국에서 채집해 간 것들이다. 이게 뒤숭숭한 미군정 시대여서 그렇다고 위로하고 변명할 수 있는 일일까.
되찾아야 하는 게 잃어버린 이름뿐이겠는가. 지켜야 할 가치와 정신이다. 우리가 지금도 고려인삼이라고 부르고 유커(중국인 관광객)들이 한국에서 가장 많이 구매하는 상품 가운데 하나인 인삼의 원조는 조선이다. 그리고 그 인삼을 시작한 게 바로 진정한 위정자였던 주세붕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백성들의 어려움을 헤아리고 그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과감히 발상을 전환해 삼을 밭에 심도록 해 고통을 덜어준 주세붕 같은 공무원들을 기대하는 것이 연목구어가 아니길 바란다.
김경집 인문학자, 전 가톨릭대 인간학교육원 교수
‘라일락’이 된 수수꽃다리의 슬픈 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