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간 격차 커 일괄 타결 쉽지 않아, 중소기업엔 새 시장 열려

수출 50% 차지…日 뺀 참여국과 이미 FTA
지난 10월 5일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들의 메가 자유무역협정(FTA)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전격 타결되면서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에 대한 관심이 다시 커지고 있다.
RCEP는 2012년 11월 협상 개시 선언 이후 아세안(ASEAN) 10개국 및 아세안과 FTA를 체결한 한국·중국·일본·호주·뉴질랜드·인도 등 6개국이 참여하고 있는 아태 지역의 또 다른 메가 FTA다. 상품·서비스·투자는 물론 전자상거래·지식재산권 등을 포함한 포괄적이고 높은 수준의 FTA 체결을 목표로 하고 있고 2015년 10월 현재 10차 공식 협상까지 마친 상황이다.

동아시아, 역내 생산 네트워크 발달
그간의 협상에서 참여국들은 상품 분야 1차 양허안의 자유화 수준과 서비스 및 투자 분야의 시장 자유화 방식을 중심으로 논의를 이어 갔다. RCEP는 2015년 연내 협상 완료를 계획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협상 진행 속도는 다소 느린 편이다. 이는 참여하는 국가가 많을 뿐만 아니라 경제 규모와 발전 수준에서 국가 간 상당한 격차가 있어 분야별 시장 자유화 원칙을 합의하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한국은 지난해 최대 교역국인 중국 그리고 교착 상태에 있던 영연방 3개국(호주·캐나다·뉴질랜드), 아세안 회원국 중 주요 수출국인 베트남과의 양자 FTA를 마무리 지으면서 RCEP 협상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됐다. RCEP가 체결되면 한국은 여러 측면에서 긍정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무엇보다 교역과 투자 기반이 보다 안정적으로 구축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2000년 이후 한국과 RCEP 참여국 간 교역 현황을 살펴보면 한국의 전체 수출입에서 RCEP 참여국이 차지하는 비율은 각각 40%를 웃돌고 있다. 2009년부터 대RCEP 참여국과의 무역수지가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돼 그 규모가 계속 커지고 있다. 특히 이들의 비율이 2014년 전체 수출의 50%를 넘어 한국의 주요 수출 시장으로서 그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RCEP로부터의 수입 비율은 2010년 이후 다소 감소했지만 여전히 40% 이상을 차지한다. RCEP 내 국가들이 천연자원을 비롯한 원자재와 중간재의 공급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RCEP가 발효되면 한국은 보다 안정적이고 규모가 커진 수출입 시장을 확보하게 된다. 특히 국내 중소기업들이 새롭게 진입할 수 있는 거대 시장이 열린다.
현재 한국은 일본을 제외한 RCEP 참여국과 양자 FTA를 모두 체결한 상태다. 하지만 다른 FTA에 비해 수출 활용률은 낮은 편이다. 관세청에 따르면 2013년 기준 타 FTA의 수출 활용률이 80% 내외인 반면 한·아세안 FTA와 한·인도 FTA의 수출 활용률은 각각 38.7%와 42.9%에 불과했다. 이는 FTA의 이행에 장애가 되는 여러 장벽들이 존재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RCEP는 동아시아 지역 내에 다수의 양자 FTA가 존재해 나타날 수 있는 ‘스파게티 볼 현상’을 완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RCEP를 계기로 단일 원산지 규정이 적용되고 관련 제도 및 절차가 통일될 수 있다면 역내 거래비용이 크게 감소된다. 동아시아는 다른 지역에 비해 역내 생산 네트워크가 잘 발달한 만큼 RCEP와 같은 메가 FTA를 활용해 생산 활동 자체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통해 장기적으로 국내 신규 기업의 시장 진출 활성화와 수출 품목의 다양화를 기대할 수 있다.

한국, 협상 조정자 역할 가능해
RCEP 참여국들은 ‘2015년 협상 완료’를 목표로 남은 기간 논의에 더욱 박차를 가할 전망이다. 아태 지역에서 미국과 경쟁 구도를 형성해 온 중국은 TPP 타결을 계기로 협상 속도를 더 높이려고 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일본을 제외한 모든 RCEP 참여국과 이미 양자 FTA를 체결해 각국의 협상 전략과 경제적 이해득실을 파악하기에 쉬운 위치인 만큼 참여국 간의 의견을 조율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또한 RCEP와 TPP 협상에 모두 참여하고 있는 아세안 회원국(싱가포르·말레이시아·베트남·브루나이)과 일본·호주·뉴질랜드는 두 협정이 대립하지 않고 서로 생산적인 결과를 낼 수 있게 협력할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RCEP 참여국 간 경제 규모 그리고 양자 FTA별 시장 자유화 정도에 격차가 존재하기 때문에 일괄 타결(single undertaking) 협상 방식으로 참여국의 의견을 모두 수렴할 수 있을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참여국들의 의견 수렴이 계속 지연되면 RCEP는 ‘TPP에 대응하는 동아시아 경제 통합 논의의 한 축’이라는 상징적 의미 차원에 그칠 가능성도 있다.
현재까지 RCEP는 주로 상품 분야의 자유화에 집중해 왔다. 향후 협상에서는 서비스·투자 분야의 자유화 수준을 높이는 데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RCEP의 역내 가치사슬에서 실질적·장기적으로 생산 효율성을 높이고 부가가치를 창출하려면 관세뿐만 아니라 각종 비관세 장벽도 낮춰야 하기 때문이다. 우선 상품 교역 활성화에 필요한 운송·유통·금융서비스 등의 시장 개방이 확대돼야 하며 기타 서비스 분야의 자유화와 연구·개발(R&D), 기술이전 등 투자 관련 제도 개선도 필요하다.

<돋보기>
메가 FTA는 ‘스파게티 볼 효과’ 해결사
자유무역협정(FTA)은 체결국 간 배타적으로 관세를 양허하는 것이기 때문에 원산지 기준 충족 여부를 까다롭게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실무자는 해당 협정이 규정하는 원산지증명서를 수출국 세관에 제출해야 하며 협정문상의 원산지 규정 충족 여부를 증명해야 한다. 또한 수출품의 역내 부가가치 비중을 입증하려면 구매한 원재료와 부품의 원산지를 추적해 증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때문에 실무자의 업무가 크게 늘어난다.
최근 세계적으로 FTA 논의가 활발한데, 이때 FTA 담당 실무자는 모든 FTA 협정을 숙지하고 규정된 절차를 따라야 하는 등 업무 부담이 더욱 늘어난다.
이를테면 한국은 한·싱가포르 FTA를 맺은 뒤 다시 한·아세안 FTA를 맺었다. 한·싱가포르 FTA 실무를 익혔던 직원은 또다시 한·아세안 FTA에 맞춰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스파게티 면발이 꼬여 잘 풀어지지 않는 것처럼 FTA 발효 건수가 많아질수록 복잡성이 커지는 것을 ‘스파게티 볼 효과’라고 한다. FTA의 원래 목적은 관세·비관세 장벽을 없애 수출을 원활하게 하는 것인데 스파게티 볼 효과로 오히려 실무적 비용(인건비, 사후 검증 리스크 등)이 더 커지는 것이다.
하지만 향후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이 발효되면 실무자는 한·싱가포르 FTA, 한·아세안 FTA, 한·베트남 FTA(발효 전), 한·호주 FTA 등을 따로 숙지할 필요 없이 RCEP가 규정한 절차만 따르면 된다. 메가 FTA는 스파게티 볼 효과를 해결하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다만 이처럼 스파게티 볼 효과를 없애려면 RCEP가 한국의 기존 FTA보다 더욱 높은 수준으로 협상이 타결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수출자들은 관세 인하율이 높은 다른 FTA를 적용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금혜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지역무역협정팀 전문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