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색’ 좋아한 고흐…중국인들에게 노랑은 황제의 색깔

빈센트 반 고흐는 정열의 화가다. 태양의 화가, 빛의 화가다. 노란색은 고흐의 색이다. 고흐는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을 노란색을 활용한 강렬한 터치로 표출한다. 고흐는 노란색을 빼면 세상을 표현해 내지 못한다는 강박관념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고흐에게는 밤의 카페도 노랗고 카페의 테라스도 가스등도 노랗다. 별이 빛나는 밤의 달도 노랗고 까마귀가 있는 보리밭도 노랗다. 자신의 방도 노랗다. 심지어는 고갱과의 불화로 자신의 귀를 면도칼로 잘라 버리고 난 후에 그린 자화상도 노랗다. ‘해바라기의 작가’라는 명성에 걸맞게 그가 그린 해바라기 그림들은 온통 노란색만으로 화면을 가득 채웠다.
서양인들에게 노란색은 태양을 상징한다. 하느님의 빛이다. 왕권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래서 태양신 아폴로의 색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고흐에게 태양의 색, 빛의 색인 노란색은 한줄기 빛처럼 그에게 편안함을 가져다주는 일종의 신경안정제였는지도 모른다.

악마와 배신을 상징하기도
이스라엘의 왕이 될 예수가 태어났을 때 동방박사들이 유황·몰약과 함께 황금을 바쳐 경배했다. 관우는 형님 유비의 행방을 알자마자 어려운 시기 자신을 돌봐줬던 조조의 품을 떠난다. 관인도 내놓고 황금이 쌓인 창고 열쇠도 넘겨주고 미련 없이 길을 나서 조조를 서운하게 한다.
노란색은 꼭 좋은 의미로만 쓰이지는 않았다. 악마를 상징하고 배반을 뜻하기도 했다. 기독교 도상학에서 배신자 가리옷 유다는 노란색 망토를 입은 모습이다. 서양인들에게 노란색은 음란함·매춘·동성애를 뜻하고 황색 저널리즘이 음란하거나 저속한 3류 언론의 대용어가 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중국인들에게 황색은 권위와 부귀와 명망을 의미한다. 오행상으로 중앙 토(土)의 색깔이다. 중앙·중심을 뜻하고 후덕한 대지의 색이고 근원의 색이다. 특히 중국 한족들에게는 그들의 기원이 되는 전설상의 ‘황제(黃帝)’의 상징색이 노란색이 되면서 황색은 ‘황제(皇帝)’의 색이 됐다. 황하의 노란 황톳물조차 중국인들에게는 경외의 대상이 아니었던가.
역대 중국 황제들은 노란색 비단에 황금색 실로 황룡을 수놓은 곤룡포를 입었다. 자금성을 비롯한 황궁의 지붕도 황금색이다. 중국 허베이성 무한에는 황학루라는 건물이 있다. 황학루는 ‘삼국지’ 속의 유명한 전투인 적벽대전이 일어난 양자강 유역 전적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물이다. 황학루도 황궁은 아니지만 지붕은 황색으로 장식돼 있다. 당연히 일반인은 황색 옷을 입을 수 없었다. 원래부터 탈속의 상징으로 황색을 사용했던 승려들만 예외였다. 중국 무협 영화를 보면 소림사 승려들이 황색 가사를 걸치고 있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연전에 필자가 ‘황건적은 왜 노란색 두건을 썼을까?’라는 글에서 밝혔듯이 소설 ‘삼국지’에서 유비·관우·장비의 3형제가 만난 계기는 결정적으로 황건적의 난이다. 황건적을 배후에서 조종한 태평도는 종교적인 결사체에서 출발했지만 결국에는 군사적인 조직이 돼 민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후한 말의 혼란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황건적의 난이다.
황건적들은 노란색 두건을 머리에 둘렀다. 노란색은 자신들이 신봉하는 태평도의 상징이다. 태평도는 앞서 말한 황제(黃帝)의 사상과 노자(老子)의 사상을 결합해 발전한 종교다. 다시 말하면 자신들이 숭배하는 전설상의 지도자인 황제의 색상을 따라 자신들의 두건과 깃발을 황색으로 정했던 것이다.
한편 황제의 사상과 노자의 사상을 결합해 발전한 학문의 경향을 황로지학이라고 부른다. 동한말년 황실의 외척과 환관이 발호하면서 한나라는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고 뚜렷한 망국의 조짐을 보인다. 이러한 권력투쟁의 와중에 황로지학이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외척과 환관의 무리들에게 대항했던 일군의 지식인들을 청류파(淸流派)라고 불렀다.

춘추전국시대 ‘황국’에서 황씨 성 유래
권력과 황금에 눈이 멀어 한나라 종묘사직의 보존에는 관심조차 없는 외척이나 환관들과 달리 청류파는 양심적인 지식인 그룹이었다. 청류파는 기존 체제 수호자들에게 심하게 박해를 받았다. 청류파의 영향력이 되살아난 계기는 황건적의 난이었다. 조정의 간신들은 이미 봉기한 황건적들과 눌려 있던 청류파들이 연합할 것을 두려워해 청류파들의 박해를 중단하고 복권시켰다.
간신배들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시도는 먹혀들었다. 권력을 회복한 청류파 인사들은 돌변했다. 명분도 좋았다. “누란의 위기에 빠진 한나라 조정을 구한다.” 청류파는 자신들과 같은 황로지학을 바탕으로 하는 황건적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권력 앞에서 사상적 원류가 같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소설 ‘삼국지’에는 황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황씨 성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정설은 없다. 춘추전국시대에 초나라에 의해 멸망을 당한 황국(黃國)의 백성들이 나중에 나라 이름을 본떠 황씨로 정했다는 설도 그중 하나다.
연원이 어떠하건 간에 중국의 황씨 성은 아마도 전설상의 지도자 황제 혹은 황하와 연관성이 있을 것이다. ‘삼국지’ 시대 대표적인 황씨로 황충을 들 수 있다. 촉나라의 명장이다. 일흔 살이 넘은 나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탕산을 점령하는 등 뛰어난 공을 세웠다.
조조의 넷째 아들은 조창이다. 셋째 조식이 뛰어난 문학적 자질로 아버지 조조의 사랑을 받았다면 조창은 힘이 장사인데다가 무예가 매우 탁월해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다. 조창은 수염이 금발이어서 ‘황금빛 수염을 가진 사나이’라는 뜻의 황수아(黃鬚兒)라는 별명이 있었다. 조조는 걸핏하면 ‘우리 황수아’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 정도로 조창을 좋아했다고 한다.
조조 사후에 한나라 마지막 황제인 헌제를 몰아내고 황제 자리에 오른 이가 위문제, 즉 조조의 장남 조비다. 조비는 기존 한나라 헌제가 사용했던 연호를 버리고 황초(黃初)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오나라 손권이 황제 자리에 오르면서 사용한 연호는 황무(黃武)였다.
사족: 아무리 황색이 좋다고 하더라고 우리는 황금만능주의에 빠지면 안 된다. 그렇다고 노랭이 수전노가 돼서도 안 된다. 황색 언론에 빠져 헤어나지 못해도 안 된다. 기진맥진해 하늘이 샛노랗게 보일 정도로 스트레스를 방치해서도 안 될 일이다. 우리는 황천(黃泉)에 갈 때까지 건전하고 건강하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
김진국 칼럼니스트, ‘재벌총수는 왜 폐암에 잘 걸릴까?’ 저자
동서양 모두가 사랑한 색, 노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