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재일 교포 사업가로 모국 투자, 롯데호텔 건립부터 ‘특혜’ 논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맨손으로 거대 기업을 일궈 낸 전설적 기업인. 그러나 설립부터 온갖 특혜와 편법을 동원해 커 온 기업. 최근 형제간 경영권 분쟁으로 도마 위에 오른 롯데그룹 그리고 창업주 신격호 총괄 회장을 바라보는 상반된 두 시선이다. 광복 직전 혈혈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롯데제과를 일본 최대의 제과 회사로 키워낸 것이 전자라면 호텔롯데부터 롯데백화점 설립, 최근에는 제2롯데월드 개장에 이르기까지 한국롯데의 성장 스토리는 후자에 가깝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창업한 시대적 배경, 광복에서 한일 국교 정상화 때까지 이어진 단절의 역사, 국가 주도 개발주의가 낳은 정경 유착 등 오늘날의 롯데는 역사와 시대가 낳은 태생적 한계와 이점을 모두 끌어안은 채 성장했다.

신 총괄 회장은 1922년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에서 태어났다. 일제의 군국주의가 한창 꽃피우던 시절, 대개가 그랬듯이 신 총괄 회장의 집도 가난한 농가였다. 부친인 신진수에 비해 신 총괄 회장의 진가를 먼저 알아본 이는 큰아버지인 신진걸 씨였다고 한다. 언양보통학교 시절 평범한 성적에 그쳤던 조카를 상급 학교인 울산농업보습학교에 진학시킨 것도 큰아버지였다.


문학도를 꿈꾼 조선인 고학생
농업학교를 졸업한 신 총괄 회장은 열여덟 나이에 노순화 씨와 결혼했고 경남도립 종축장에서 기수보로 일하며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기수보는 양털을 깎고 돼지 오물을 치우며 사료를 주는 게 임무였다. 그야말로 허드렛일이었다.

신 총괄 회장이 일본행을 결심한 것은 바로 이즈음이다. 더 이상 가난에 찌들어 살 수 없다는 생각에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아버지의 반대를 피해 어머니에게만 알린 채 가출을 감행한 그의 수중에는 사촌형이 마련해 준 83엔뿐이었다. 당시 시골 면 서기의 두 달 치 월급이다.

일본에 도착한 신 총괄 회장은 와세다고등공업학교(와세다대 전신) 화학과에 입학했다. 본래 문학도를 꿈꿨다가 이공 계열을 선택한 것은 태평양 전쟁의 징병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인 고학생’ 신분으로 온갖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던 그에게 기회가 온 것은 1942년이었다. 신 총괄 회장의 성실성을 높이 평가한 하게미쓰라는 노인이 6만 엔을 지원하며 군수용 커팅 오일 제조 공장 설립을 의뢰한 것이다. 당시 회사원의 월급이 80엔인 시대였으니 6만 엔은 대단한 거금이었다.

커팅 오일은 기계를 자를 때 사용하는 선반용 기름이다. 그러나 공장을 제대로 가동하기도 전에 미군의 폭격으로 모든 것을 잃고 만다.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신 총괄 회장은 다시 한 번 하게미쓰 씨를 찾아가 자금을 빌렸다. 하루 4시간만 자는 강행군을 벌인 끝에 사업도 점차 번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장 가동 1년 반 만에 또다시 미군의 폭격으로 쑥대밭이 돼 버렸다.

두 번이나 폭격과 화재로 모든 것을 잃었지만 신 총괄 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1946년 학교를 졸업한 후 도쿄 인근의 군수공장 기숙사 터에 ‘히카리(光)특수화학연구소’를 세웠다. 상호는 거창했지만 취사용 솥에 비누와 포마드 같은 생활용품을 만드는 사업이었다. 조악한 품질임에도 패전 직후 생활 물자 부족에 시달렸던 시기여서 만드는 족족 팔려 나갔다. 사업 시작 1년 반 만에 하게미쓰 씨에게 진 빚을 다 갚고 집 한 채를 따로 선물했을 정도였다.


제철소 설계까지 끝냈지만 무산
패전국에 주둔한 미군 병사들이 씹던 추잉껌은 가난한 일본인들에겐 최고의 선물이자 간식거리였다. 비누에 이어 화장품으로 재미를 보던 신 총괄 회장도 친구의 권유를 받아들여 껌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껌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일본 전역에 껌 제조사만 400여 개에 달했다. 신 총괄 회장은 위생과 안전을 위해 전문 제약사까지 고용하고 포장 공장까지 따로 세우는 등 품질에 심혈을 기울였다. ‘시게미쓰(신 총괄 회장의 일본식 이름)가 만든 껌이 제일 좋다’는 입소문이 나자 도쿄 일대의 과자점 주인들이 줄을 섰다. 껌으로 대박을 친 히카리연구소가 롯데의 모체가 된 순간이었다. 회사명을 롯데(LOTTE)로 정한 것도 이 무렵이다.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탐독했던 신 총괄 회장이 여주인공 이름인 ‘샤롯데’에서 따 왔다. ‘입 안의 연인’이란 슬로건 역시 신 회장의 아이디어였다.
폭격에 두 차례 잿더미…‘껌’으로 열도 석권
껌으로 사세를 넓힌 신 총괄 회장은 초콜릿에 뛰어들며 다각화에 나섰다. 스위스 출신의 전문가 막스 브라크를 영입해 공장 설계부터 원료 선택, 제품 생산 등 모든 것을 일임했다. ‘원가에 신경 쓰지 말고 최고의 제품을 만들라’는 말에 원료의 혼합·가공·포장까지 일괄 작업이 가능한 공장이 들어섰다. 1964년 1월 ‘롯데 가나 밀크초콜릿’을 내놓은 롯데는 당시 업계 1위였던 메이지와 모리나가를 제치며 일본 최고의 제과 업체로 성장했다.

일본에서 성공한 재일 동포 사업가 신격호가 모국인 한국 투자에 나서기로 결심한 것은 1964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였다. 단돈 1달러, 1엔의 외자에 목말랐던 한국 정부는 재일 동포 기업인들의 한국 투자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당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이던 장기영 한국일보 창업주는 신 총괄 회장에게 군수산업 투자를 종용했다. 하지만 당시 신 총괄 회장은 이미 기간산업 중 제철 산업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 때마침 친분이 있던 일본 가와사키제철의 이사노 사장도 제철업을 적극 권했다. 신 총괄 회장은 가와사키제철에 용역을 줘 설계 도면, 사업 목적과 내역, 자금 조달 방법, 세부 운영 계획까지 상세히 밝힌 ‘제철 공장 건립안’을 한국 정부에 제출했다. 그러나 제철업만은 국영기업으로 운영하겠다는 방침에 막혀 좌절됐다. 그 후 설립된 곳이 포항제철, 지금의 포스코다.

1967년 제철소 대신 한국롯데제과를 세운 신 총괄 회장은 당시 대표이사 회장에 자신이 아닌 유창순 씨를 추대했다. 유창순 씨는 1951년 한국은행이 도쿄지점장으로 부임했을 때부터 제일 교포 ‘큰손’인 신 총괄 회장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유 씨는 한국은행 총재(1961), 상공부 장관(1962), 경제기획원장(1973), 제15대 국무총리(1982)를 지내며 정·관·재계에 막강한 인맥과 영향력을 자랑하는 거물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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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 시절인 1981년에는 중앙정보부 출신의 하태준 씨를 호남석유화학 사장으로, 건설부 장관 이낙선 씨를 롯데그룹 부회장으로 영입했다. 1990년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 씨의 장인이자 이광학 전 공군참모총장의 딸을 며느리로 둔 김웅세 씨를 롯데물산 사장으로 영입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이 대통령과 고려대 경영학과 동기 동창인 장경작 롯데호텔 전 사장의 인연이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다.


일본 ‘우파 거물’과 남다른 인연
정·재계 거물들과 인맥을 쌓고 이를 사업에 활용하는 전략은 이미 일본에서부터 시작됐다. 기시 노부스케 일본 전 총리와의 인연이 대표적이다.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총리를 역임한 기시 씨는 일본 정계 우파의 거물이었다. 신 총괄 회장은 기시 씨와의 인연을 시작으로 하토야마 초대 자유민주당 총재였던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 무렵부터 고노 이치로, 이시이 고지로 씨 등 일본 정계 실력자들에게 거액의 정치 헌금을 내줬다. 기시는 아베 신조 현 총리의 외조부다.

주특기인 제과와 식품에서 터를 잡은 한국롯데의 폭발적인 성장은 1975년 착공해 1979년 10월 완공한 호텔롯데로부터 시작됐다. 신 총괄 회장은 1973년부터 시작된 정부의 관광 진흥 정책에 따라 반도호텔·아서원·국립도서관의 땅을 사들여 지상 38층, 지하 3층, 1020개 규모의 객실을 갖춘 초대형 관광호텔을 지었다.

정경 유착과 특혜 논란의 시발점도 롯데호텔부터다. 박정희 대통령의 호출로 청와대를 방문한 신 회장에겐 “국제적인 호텔을 만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반도호텔 민영화에 나선 정부는 1974년 공개경쟁 입찰을 벌였고 롯데가 단독으로 응찰해 낙찰 받았다. 인수가는 42억 원이었다.

롯데호텔은 소공동에 있던 국립중앙도서관 터까지 자리를 넓혔다. 국립도서관은 남산어린회관 자리로 밀려났다. 2만3135㎡(7000평)에 달하는 토지 매입 과정에선 단 한 푼의 세금도 내지 않았다. 당시 외자도입법 덕분이었는데, 정부는 한국에 투자하는 외국자본에 대해 부동산 취득세·재산세·소득세·법인세를 5년간 면제해 줬다. 당시 신 총괄 회장은 한국 국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10년 이상 거주해 ‘시게미쓰 다케오’라는 일본 이름으로 혜택을 받았다. 백화점 건설도 특혜였다. 당시 서울시는 강북 지역 개발을 억제하기 위해 서울 시내 안에 백화점 설립을 금지했다. 롯데는 이를 비켜 가기 위해 롯데백화점이 아닌 롯데쇼핑센터라는 이름으로 허가를 받았다. 지금까지도 롯데백화점의 정식 법인명이 롯데쇼핑인 이유다.

잠실 롯데월드 건설도 전두환 정권 하의 특혜로 가능했다. 당시 정부는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잠실 개발을 앞두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롯데가 선택됐다. 롯데는 그때도 외자도입법을 활용해 사업 승인 계획을 재빠르게 따낸 것으로 전해진다. 인구·교통 영향 평가와 주변 지역 측량, 지하수 조사 같은 작업들은 한 달 만에 모두 끝났다.

이명박 정부 때 허가를 받은 제2롯데월드 건설도 특혜 시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인근의 서울비행장을 이용하는 항공기의 안전 문제로 끝내 허락되지 않았던 제2롯데월드는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9년 활주로를 3도 정도 조정하는 것으로 정리되며 123층에 이르는 초고층 빌딩이 들어서게 됐다.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참조= ‘청년 신격호(이지출판, 서진모)’, ‘신격호는 어떻게 거인 롯데가 되었나(성안북스, 김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