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 주도 글로벌 금융 시스템 고착화…개방·협업의 디지털 생태계 조성해야

세계경제 ‘유동성 함정’에 빠지다
글로벌 금융 위기는 최근 한 세대에 걸쳐 진행됐던 민간과 시장 주도의 금융 자유화에 찬물을 끼얹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돌이켜 보면 당시의 급박한 상황에서조차 대안이 없다는 데 회의감이 짙었다. 그러나 7년이 지난 지금도 세계경제는 여전히 엄청난 규모의 ‘공적 링거 장치’에 의존하고 있다. 미국에 이어 유로와 일본마저 가세하면서 이제 모든 세계 주요국들은 헤어 나오기 힘든 유동성 함정 속으로 스스로 깊이 빠져든 셈이다. 소위 양적 완화(QE)는 급격한 시장 충격을 완화시켰다는 측면이 부각되지만 그 이상으로 장기간에 걸쳐 부작용이 나타나는 독성이 강한 처방이다.


정부 관리 체제, 이상 징후 포착 어려워
부연하자면 초저금리의 시장 안정으로 자산시장에 다시 거품 신호가 나타나고 있다. 위기 이후 대차대조표 크기를 6배나 불린 미국 중앙은행(Fed)의 초과지급준비금에 부과되는 이자는 초저금리로 무력화된 단기 정책 수단을 억지로 확보하는 비용으로 볼 수 있다. 역레포(RRP) 금리가 실질적인 단기 정책 금리로 활용되는 현실은 현 위기 대응 모드가 정책 경로를 심각하게 왜곡한 사실을 대변하고 있다.

Fed의 전·현직 의장 간의 논쟁은 현 대차대조표 크기에 관한 시각 차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유효한 정책 수단으로 부각돼 온 재정 정책마저 엄청나게 늘어난 채무 부담으로 제구실을 하기 힘들게 됐다. 급한 김에 모든 수단을 총동원했지만 정상화하기도 안 하기도 어려운 외통수에 봉착함에 따라 비상조치의 피해는 생각보다 크고 장기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본적인 옥석을 구분하는 기능이 무시되면서 금융 시스템의 근간이 훼손된 결과 현재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은 글로벌 유동성의 팽창이다. 과잉 유동성은 최근 들어 파괴적이고 위험한 효과를 본격적으로 행사하기 시작했다. 반면 금융 시스템의 핵심 기능인 자금 중개는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다. 돈을 무제한으로 풀지만 갈 곳으로 가지 못하고 다시 안전한 Fed의 은신처로 되돌아오거나 투기적 기회만 부추기고 있다. 유통 속도나 통화승수 모두 바닥을 기고 있는 것이 그 방증이다.

반면 시장 위주로 작동하던 시스템은 이제 정부가 지속적으로 개입하고 조정해야 돌아가는 관 주도의 금융 시스템으로 고착화됐다. 자유방임주의를 신봉했던 미국 경제의 금융 시스템이 명실상부한 정부 주도의 시스템으로 전락한 것이다. 민간의 과도한 탐욕과 레버리지를 견제하는 측면은 바람직하지만 관 주도로 금융 시스템이 작동하게 되면 그 피해는 더욱 커지게 된다. 문제는 정부 관리 체제 하에서는 이상 징후를 포착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근본 개혁 없는 상시 개입으로 위험이 누적되고 시장이 잘 돌아가지 않아도 위기 징후를 발견하기 힘들게 된다. 조용히 질식 상태로 전락하기 쉬운 것이다.

게다가 현 글로벌 유동성의 근간 자체에는 불완전 자산이 내포돼 있다. 이에 따라 통상적인 안전 자산과 수칙은 이제 위험을 키우는 부작용이 더 커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정부가 아무리 유능하다고 해도 계기판 없이 비행하는 것과 같은 정무적 차원의 투자가 대세로 자리 잡게 되고 경제적 효율성을 기대하기 어려워진다. 어떤 방식으로라도 금융 시스템이 시장 중심의 민간 주도로 복원돼야 하는데 그 과정이 순탄하지 않은 것이다. 금융의 핵심 부문이 괴멸되는 것을 막으려다가 세계경제가 근본이 망가진 금융 시스템을 물려받게 됐고 그 결과 장기 침체의 중병을 피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이미 저성장과 실업의 장기화, 신규 참여가 어려운 노동시장의 고용 여건 악화, 자산 버블로 부익부 빈익빈의 가속화 등 구조적으로 심각한 상황들을 목도하고 있다.

더욱이 위기의 징후가 나타나더라도 굳이 글로벌 차원의 문제를 애써 나서 고칠 만한 시장 유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국력에 바탕을 둔 이전투구식 현대판 환율 전쟁이 오늘도 지속되고 있다. 위기 직후 일사불란하게 정책 공조에 나섰던 각국 정부들은 이제 각자의 계산으로 자국 이익을 지키는 데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이러한 와중에 겉보기보다 훨씬 위험한 상황이 잠복해 있는 것이다. 사실 미국 상장 기업들이 전례 없는 1900조 원에 달하는 현금을 유보하고 있는 현실은 시스템적 문제에 대한 방증이다. 당장의 시장 안정이라는 목표를 위해 민간과 시장 위주 시스템의 운영자와 방식을 정부와 정책 위주로 바꾼 희대의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신흥 시장 금융 주도권 키워야
시장과 민간 주체들이 중개하는 자금의 효율성은 수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고쳐가면서 개선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관료 시스템에 장악된 금융 시스템은 근본적으로 개혁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러한 구도는 글로벌 기준의 대두와 무관하지 않다. 바젤 I이 발표된 이후 III에 이르기까지 세계경제에 혈맥을 공급하는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 기준은 은행들의 핵심 기능을 편협한 기준으로 옭아매 그림자 금융의 양산에 기여하고 있다. 바젤 III는 여전히 은행들 자신의 위험 기피와 은신처 대비만을 강조한다.

글로벌 기준이 세계화의 매뉴얼로 강조된 이후 과연 무엇이 달라졌을까. 이를 가장 충실히 이행한 한국의 현재 모습은 극단적 양극화와 관리 불가능한 충격에 그대로 노출된 자본계정 그리고 대비 차원의 경상수지 흑자 기조다. 당국이 관리할 수 있는 여지가 극도로 제한적인 국제적인 상쇄적 시장(global compensatory market)이 돼 버린 것이다.

안타깝게도 신흥 시장은 고수익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배경에서 자본 유·출입의 확대와 자산 버블 현상으로 사회적 갈등마저 심화될 수 있다. 작금의 상황에서는 지금까지의 조치를 중단하거나 되돌릴 수도 없다. 가짜 유동성이라도 중단 자체가 충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 한계 상황에 봉착한 선진국에서 해답을 찾기보다 현 난관의 극복은 금융 주도권이 없는 신흥 시장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신흥 시장을 중심으로 국제금융 체제에서의 역할을 키워 나가야 한다. 구체적으로 자신들의 자산 기반을 다져 나가면서 글로벌 유동성의 기본으로 인정받는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현실적인 대안으로서 달러 이외의 화폐 표시 자산에 대한 포괄적 안전 자산 편입을 허용해야 한다.

더 이상 시스템 위험을 거론하면서 실제로는 자국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율배반적인 국가 전략은 선진국부터 스스로 중단해야 한다. 결국 지금의 상황은 자국의 생존과 이익 추구를 위해 다른 국가의 입장도 필히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그러지 않으면 세계는 본격적으로 디플레이션과 인플레이션의 양극단 현상이 반복되는 글로벌 유동성의 역습을 맞이하게 된다. 시장의 목소리가 정치적 제약으로 반영되지 못하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글로벌 차원의 리더십에 관한 논의가 경제 안보 차원에서 본격화돼야 한다.

글로벌 유동성의 역습은 지금까지의 단기 처방으로 일관해 온 정책 대응에 대한 거대 시장의 엄중한 메시지다. 아시아는 자체적 경제활동의 결과를 지킬 수 있는 자산 기반 없는 금융 안정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보여주고 있다. 치열한 이전투구 속에서 우리 나름대로의 기준을 다져 나가고 시장과 실력을 키워 나가야 한다. 과거의 틀 안에서만 해법을 모색하지 말고 변화된 환경에서 새로운 연결 시장의 구축과 같은 프로젝트에 대규모 투자가 가능하도록 모두가 협조해야 한다. 바로 옆에 있는 해법을 채택할 경우 작금의 난제는 수월하게 풀릴 수 있다. 결국 현재와 미래의 어려움의 근본 원인은 쉽게 변하기 어려운 우리들의 사고방식이다. 인류는 진정한 집단 지성을 통해 현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 특히 위기 이후 고착화된 관료 위주의 일률적인 조정 방식은 이제 민간과 시장의 역할이 강조되는 분산 구도로 복원돼야 한다. 새롭게 판을 짜면서 성장 동력을 발굴해야 위기 탈출이 가능한 이상 국경으로 분화된 사고방식마저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 그 핵심은 지리적 여건에 상관없이 누구나 거대 시장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개방과 협업의 디지털 생태계 조성 사업이다.


최공필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