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충청은행 인수로 ‘우량’이미지 얻어…보람 추가 합병하며 사세 확장

“인수 권유한 이헌재 부총리가 고맙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의 후폭풍이 몰아치던 1998년 6월 29일은 국내 금융사(史)에서 빼놓을 수 없는 날이다. 은행은 망하지 않는다는 ‘은행 불사(不死)’의 신화가 깨졌다. 이날 새벽 해가 밝기를 더해 가던 오전 6시 50분, 당시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은 대동·동남·동화·경기·충청은행의 퇴출을 발표했다.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 기준인 8%에 미달한 이들 은행은 은행 경영 평가 결과에서 승인을 받지 못했다. 최초로 은행이 ‘퇴출’된 것이다.

이 위원장은 이들 5개 퇴출 은행을 받아 줄 5개 은행을 미리 정하고 ‘짝짓기’를 해 놓았다. 대동은행은 국민은행이, 동남은 주택이, 동화는 신한이, 경기는 한미가, 충청은행은 하나은행이 인수하기로 정해졌다.

이에 대해 반발이 거셌다. 이들 피인수 은행들은 각각 본점에 모여 일자리를 보장하라며 농성을 벌이는 것은 물론 이들 은행을 ‘접수’하러 온 경찰들과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충청은행도 마찬가지였다. 정부는 신속하게 은행 퇴출을 마무리 지으려고 전산실 등을 확보하기 위해 공권력을 투입했다. 그러자 직원들 수백 명이 본점에 모여 회사를 봉쇄하고 강력히 반발했다. 이날 오전 7시 대전 오류동 충청은행 본점에 하나은행과 금융감독위원회 인수팀이 도착했지만 전산실 문이 잠겨 있었다. 직원들은 전원 사직서를 제출한 상태였다.

본점뿐만 아니라 지점 직원들은 입금 내용 등이 적힌 전산 자료 등을 담은 상자와 금고 출입문 등을 챙겨 잠적했다. 인천지점의 한 대리는 자신의 차를 지점 출입문으로 몰아 경비원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 전국 지점의 업무가 마비된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6월 28일 밤 이미 충청은행 임직원들은 직원 1475명의 퇴직금과 급여 등 520억 원을 개인 계좌에 ‘자체 배분’해 놓은 상태였다. ‘영생’의 존재인 줄로만 알았던 은행이, 자신들의 은행이 퇴출이라는 운명을 받아든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충청은행은 1968년 자본금 1억5000만 원의 충남 지역 연고 지방은행으로 출범했다. 지역 기반이 취약해 만년 하위권에 머물렀던 은행이었다. 1997년 말 BIS 비율은 7.05%, 퇴출 기준인 8%를 밑돌았다.

지역 연고 기업인 한화그룹이 대주주로서 지분 16.55%를 갖고 있었다. 금풍실업그룹이 11.74%를 가진 2대 주주였다. 2~4% 정도를 갖고 있는 개인 주주들도 많았다. 이들 충청은행의 대주주들은 거액의 대출을 사적으로 받은 것으로 퇴출 후 드러났다. 대주주인 한화그룹은 약 4300억 원을 대출 받았는데, 거의 대부분이 무담보 신용 대출이었다. 담보가 있더라도 실질적이지 않은 서류상 담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화그룹 계열 사 중 한 곳은 3억6000만 원이 든 정기적금을 담보로 무려 1149억 원을 대출받았다. 금풍실업그룹도 1000억여 원을 대출 받으면서 담보를 30% 정도만 제공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충청은행 여신 담당자는 “금풍실업의 주력 업종이 물엿이었는데 1000억 원대 여신이 정상이겠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충청은행이냐 충북은행이냐
부실 특혜 대출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충청은행 내에는 임직원 간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았다. 투서가 쉴 새 없이 오고 갔고 임원들이 중도 하차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충청은행 또한 다른 지방은행과 마찬가지로 서울 지역 대기업과 무리한 거래를 하다가 직격탄을 맞았다. 내부가 곪은 상황에서 외형을 확장하기 위해 서울로 진출했지만 우량 기업을 빼앗아 오지 못하고 부실기업만 떠안았다. 그 후 불어 닥친 IMF 위기로 부실 여신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담보를 거의 챙기지 못했던 기아·벽산·해태·한보 등 기업들이 연쇄 부도로 떨어져 나갔다. 충청은행의 부실은 당시 1년 만에 5배나 늘어났다.

이런 충청은행이 퇴출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다만 정치적인 문제가 있었다. 충청권에는 충청은행 외에 충북은행이 있었다. 경영 실적과 건전성은 충북은행이 나았다. 하지만 당시 정부는 자유민주연합과의 선거 연대로 승리한 김대중 정부였다. 공동 여당인 자민련의 텃밭인 충남을 기반으로 하는 충청은행을 퇴출시키기가 부담스러웠다.

충남 도민들은 정권이 자신들의 ‘뒤통수’를 쳤다고 생각할 게 뻔했다. 실제로 충청은행의 퇴출 소문이 들려오자 정치권과 주주, 지역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하고 로비하기도 했다. 이는 조금씩 먹히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한때 충청은행 대신 충북은행이 퇴출 대상에 포함되기도 했다.

이번엔 충청은행이 강하게 반발했다. 부실 정도가 훨씬 심한 충청은행이 살고 자신들이 죽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들고일어났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청와대는 “원칙대로 하라”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다시 충청은행의 퇴출이 결정됐다.

퇴출 은행이 공표되기 이틀 전인 6월 27일 이헌재 위원장은 당시 김승유 하나은행장을 불렀다. 충청은행을 맡아 인수하라는 ‘통보’를 하기 위해서였다. 김 행장은 버텼다. “노(No)”라고 외쳤다. 생긴 지 7년밖에 되지 않은 하나은행이 덩치가 훨씬 큰 충청은행을 인수할 여력이 없다는 주장이었다. 당시 ‘우량 은행’으로 알려져 있던 보람은행과의 합병도 논의되던 시점이어서 부담이 되기도 했다. 외국자본과의 합작도 버티는 근거가 됐다. 당시 외자가 간절하던 시기에 하나은행은 국제금융공사(IFC)와의 합작을 합의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자산이 약 62조3000억 원으로 은행권 1위였던 외환은행도 충청은행 인수 대상으로 꼽혔다. 하지만 외환은행도 코메르츠은행과의 합작을 이유로 거부했다. 은행권에서는 당시 외환은행이 충청은행 인수를 끝까지 거부할 수 있었던 이유로 홍세표 전 외환은행장의 출신 배경을 꼽기도 한다. 홍 전 행장은 현재 박근혜 대통령의 이종사촌, 즉 육영수 여사의 조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처조카여서 ‘힘’이 있었다는 후문이다.

김승유 행장은 임원 회의를 거듭하며 6월 28일 오후 5시까지 장고했지만 거부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인수를 지시하고 전 직원을 비상소집해 밤 10시부터 충청은행이 있는 각 지역에 직원들을 투입했다.

억지로 인수한 충청은행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도움이 됐다. 단기적으로는 부실 여신이 늘어나고 반발하는 직원들을 껴안기 쉽지 않았지만 당시만 해도 신생 은행이었던 하나은행이 지금의 ‘빅 4’ 은행으로 성장하는 첫째 발판이 됐다. 단자사를 전신으로 한 서울 위주 은행에서 진정한 시중은행(전국적 영업망을 갖춘 은행)으로 발돋움하는 데 충청권이 교두보가 된 것이다.

일단 충청은행을 인수하면서 자산이 35조8213억 원으로 늘어나며 10위권 은행으로 올라섰다. 자기자본은 9244억 원으로 8위가 됐다.

몇 년 전 김승유 하나금융 전 회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금은 인수를 권유한 이헌재 전 부총리가 고맙다”고 말했다. 충청은행을 인수하면서 하나은행이 정부 공인 우량 은행으로 인식됐고 이 같은 이미지가 영업에 큰 도움이 됐다는 것이다.

다행히 퇴출에 반대하던 충청은행도 차츰 반발을 누그러뜨리고 업무에 복귀하기 시작했다. 퇴출 발표 후 약 2주가 지난 7월 10일 충청은행 노동조합은 1400여 명의 전 직원이 업무에 복귀해 인수인계 작업을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인수 작업이 급진전되기 시작했다.

이는 은행이 ‘올 스톱’되면서 업무에 복귀하라는 지역 여론이 거센 데다 하나은행이 ‘당근’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하나은행은 50% 이상의 직원을 재고용하겠다고 밝힌 데 이어 충청은행을 하나은행의 지역사업본부제로 전환해 가능한 한 많은 점포와 직원을 흡수하겠다고 선언했다. 특히 이 본부를 순수 충청은행 출신들 중심의 독립채산제로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이름 또한 충청하나은행으로 정했다. 하나와 충청은행은 진통 끝에 그렇게 합병에 이르렀다.


파생 상품 투자 손실로 애가 탄 보람은행
보람은행과의 합병은 충청은행을 인수하기 전부터 기정사실화되던 것이었다. 보람은행에서 먼저 하나은행과의 합병을 공공연히 언론에 흘려 왔기 때문이다. 보람은행 측은 6월 29일 다섯 개 은행이 퇴출되기 전인 5월 말~6월 초부터 “하나은행과 보람은행 사이에 두 은행의 합병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며 “이르면 이달 안에 두 은행이 합병을 결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은행에 대한 IFC의 자금 제공 관련 이사회가 끝나면’이라는 구체적인 전제도 함께였다.

중간에 고비가 있긴 했다. 1998년 7월 하순 조흥은행이 보람은행에 합병을 전격 제의하면서다. 조흥은행은 당시 보람은행의 대주주인 LG그룹에 합병을 제의했고 다른 대주주도 동의하면서 하나·보람은행 간 합병이 불투명해지는 듯했다. 하지만 당시 신속한 합병이 필요했던 보람은행이 다시 적극적으로 하나은행과 협상에 나서면서 급물살을 탔다.
“인수 권유한 이헌재 부총리가 고맙다”
당시 두 은행의 합병은 다섯 곳 퇴출 은행의 합병과 달리 우량 은행 간의 결합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보람은행에는 하나은행에 합병을 먼저 제안할 정도로 급한 사정이 있었다. 1998년 금융권을 뒤흔들었던 동남아 역외 펀드 파생 상품 투자 손실 사건에 휘말리면서다.

이 사건은 1997년 SK증권이 설립한 ‘다이아몬드펀드’가 국내에서 모집한 300억 원과 JP모건으로부터 빌린 5300만 달러를 파생 상품에 투자하면서 벌어졌다. 이 파생 상품은 1년 만기의 인도네시아 채권에 투자해 인도네시아 통화가치가 엔화에 비해 상승하면 차익을 투자자에게 지급하지만 그 반대면 원금을 모두 잃고 원금의 4~5배에 달하는 금액을 물어내야 하는 구조였다. 이때 JP모건은 다이아몬드펀드에 돈을 빌려주면서 보람은행과 투자 원금을 보장하는 ‘총수입 스와프 거래(TRS:Ttotal Return Swap)’ 계약을 했다. 손실에 대해 보람은행이 지급보증해 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때 아시아 통화 위기가 불어 닥쳤다. 생각지도 못한 태국 위기가 현실화되면서 아시아 통화가치가 대폭락했다. 보람은행은 큰 손실을 볼 수밖에 없었고 결국 하나은행과의 합병을 추진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렸던 것이다. 금융권의 한 인사는 “당시는 철저한 리스크 관리도 없이 고수익에 목을 매던 게 현실이었다”며 “국제금융 상황에 대한 제대로 된 판단 없이 욕심을 내다가 큰 손실을 본 케이스”라고 회상했다.

다행히 보람은행과의 합병 후 화학적 결합은 큰 무리가 없었다는 평가다. 보람은행 또한 단자회사인 한양투자금융과 금성투자금융이 합병돼 1991년 은행으로 전환된 곳이었다. 하나은행과 역사가 거의 같은 은행이었다. 자연히 기업의 문화와 직원들의 사고가 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두 은행이 합병하면서 내세웠던 ‘하나가 되었습니다, 보람이 커졌습니다’라는 문구는 지금도 최고의 합병 캐치프레이즈 중 하나로 꼽힌다.


박한신 한국경제 금융부 기자 hansh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