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은행 통합 지연 ‘속앓이’… ‘5년 독립 경영’ 조항 탓 난항

‘M&A 강자’ 하나금융의 마지막 퍼즐
“‘애물단지’를 왜 인수해 가지고…. 지금까지 기다렸다가 차라리 민영화 매물로 나와 있는 우리은행을 샀으면 좋았을 텐데.”

요즘 금융권에서 나오는 얘기다. 사겠다는 회사가 없어 팔지 못하고 있는 우리은행을 누가 산다는 걸까. 다름 아닌 한국외환은행을 인수한 하나금융그룹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하나은행과 외환은행 통합에 진통을 겪고 있는 하나금융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조그만 단자회사로 출발해 보람·충청·서울·외환은행을 연달아 합병하며 한국의 4대 금융회사로까지 커 온 하나금융의 인수·합병(M&A) 역사는 하나·외환은행 통합 문제로 골치를 썩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부터 출발하자.

2010년 11월 25일 하나금융은 당시 외환은행을 소유하고 있던 론스타와 지분 매매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4년 반이 다 되도록 하나금융의 외환은행 합병 작업은 ‘현재 진행형’이다. 물론 현재의 외환은행은 하나금융이 지분 100%를 들고 있는 완전 자회사다. 하지만 하나금융은 하나은행과 외환은행이 ‘투 뱅크’ 체제로 갈라져 있는 한 인수 작업이 완전히 마무리된 게 아니라는 생각이다.


통합 발목 잡은 2·17 합의
두 은행이 따로 떨어져 각자 장사를 잘하고 돈을 잘 벌면 문제가 없다. 하지만 외환은행의 지난해 순이익은 3651억 원에 불과했다. 2011년 1조6000억 원 넘게 나던 이익이 4분의 1 토막 났다. 하나은행의 순이익도 예전 같지 않다. 이 상황에서 하루빨리 두 은행을 합쳐 시너지를 내는 것은 김정태 하나금융그룹 회장의 숙원 사업이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다. 외환은행 노동조합이 반대하기 때문이다. 6조 원이 넘는 돈을 주고 100% 지분을 산 피인수 회사를 합병이 노조의 반대로 좌절된 상황이다. 이 상황의 중심에는 하나금융이 외환은행 노조와 맺은 ‘2·17 합의’가 있다.

지난해 7월 3일 여름 장맛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었다. 김정태 회장이 하나금융그룹 담당 기자들을 불러 모았다. 김 회장은 이날 열흘 이상의 긴 해외 출장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기로 돼 있었다. 아침에 귀국해 잠시 쉰 후 간담회를 소화하는 강행군이었다. 김 회장은 이 자리에서 “하나은행과 외환은행의 통합을 논의할 때가 됐다”고 운을 떼었다. 통합을 하겠다는 게 아니라 통합을 논의해 보자는 조심스러운 접근이었다. 통합 논의에 불을 붙여 보자는 간담회 개최 목적도 당일까지 ‘보안’을 유지했다.

이 같은 ‘저자세’는 무엇보다 외환은행 노조와 맺은 ‘2·17 합의’ 때문이었다. 이 합의는 누가 뭐래도 현재까지 하나은행과 외환은행이 통합을 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다. 2012년 2월 17일 하나금융지주와 외환은행, 외환은행 노동조합이 금융위원회 중재를 통해 맺은 2·17 합의는 ▷하나금융지주의 자회사로 편입된 이후에도 외환은행은 별도의 독립 법인으로 존속하며 ▷자회사 편입 5년 경과 후 상호 합의를 통해 하나은행과의 합병 등을 협의할 수 있다는 것을 요지로 한다.

앞서 말한 대로 하나금융은 2010년 11월 25일 이미 론스타와 외환은행 지분 매매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외환은행 노조는 하나금융이 외환은행을 인수하는 것에 강한 반감을 표했고 하나금융은 이 때문에 금융위원회의 승인을 곧장 얻어내지 못했다.

당시 외환은행 노조는 “하나금융에 외환은행을 매각하는 건 외국 사모 펀드인 론스타의 ‘먹튀’를 방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조의 주장에 시민 단체와 정치권이 가세하고 외국자본에 대한 사회적 반감이 뒤섞였다. 이른바 ‘론스타 먹튀 논란’은 사회적인 문제로 확대됐다.

결국 금융위는 1년 이상 미룬 끝에 논란 속에서 2012년 1월 하나금융의 외환은행 인수를 승인했다. 이때부터 외환은행 노조는 마지못해 협상에 돌입했다. 하지만 외환은행 인수전이 끝났다고 보는 이는 없었다. 한 금융권 인사는 “매각 대금을 모두 지불하고 금융 당국의 승인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금융에는 ‘노조와의 협상’이라는 가장 큰 난관이 남아 있었다”며 “주주권보다 ‘노치(勞治)’와 ‘정치 논리’가 앞섰던 사례”라고 말했다.

외환은행을 꼭 인수하고 싶었던 하나금융은 노조와의 협상에서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 ‘5년 독립 경영’이라는 유례없는 내용이 들어간 배경이다. 게다가 김석동 당시 금융위원장까지 이 합의서에 서명했다. 서명뿐만 아니라 손을 맞잡고 사진까지 찍었다. 합의서의 구속력이 배가된 이유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하나금융 내부에서도 이 합의문에 대해 전례 없는 내용이라는 반발이 많았다”며 “반면 하나금융의 인수를 극렬하게 반대하던 노조는 만족해하며 사인했다”고 말했다.

이후 이 합의는 하나금융으로서는 두고두고 걸림돌이 됐다. 하나금융이 외환은행 잔여 지분 40%를 인수할 때나 해외 법인을 통합할 때도 노조는 ‘노사정 합의’를 지키라며 2·17 합의를 내세웠다. 그때마다 김정태 회장 등 경영진은 “합의 정신을 반드시 지킬 것”이라며 끌려 다닐 수밖에 없었다.


유례없는 ‘5년 독립 경영’ 조항
2014년 7월 3일 김정태 회장의 ‘통합 논의’ 발언이 있고 나서도 노조는 즉시 반발했다. 근거는 역시 2·17 합의였다. 서울역에서 수천 명의 노조 조합원들이 참여한 대규모 집회를 열고 “하나금융이 2·17 합의를 위반하려고 한다”며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됐다”고 선언했다. “논의를 해 보자”는 하나금융의 ‘읍소’에도 “현시점에서 통합 논의는 합의서 조항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며 합의 위반을 전제로 한 어떤 요구에도 응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하나금융으로선 복장이 터질 노릇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 쐐기를 박은 것은 다름 아닌 금융위였다. 신제윤 전 금융위원장은 2014년 7월 7일 국회 정무위원회 업무 보고 자리에서 “하나은행과 외환은행 통합은 노조와의 합의가 전제돼야 한다”고 말했다. 외환은행 노조위원장 출신인 김기준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의 질의에 대한 답변이었다. 합의서도 부담스러운데 금융 당국까지 반대편에 선 상황. 이제 노조의 변화 없이 하나금융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하나금융은 포기하지 않았다. 최고경영자(CEO) 인사까지 결단을 내리며 최선을 다했다. 8월 말 김종준 당시 하나은행장은 “하나은행과 외환은행 통합이 가시화하는 시점에 ‘백의종군’하겠다”고 선언했다. 사실상의 사퇴 의사 표시였다.

속사정은 이렇다. 김 전 행장은 그해 4월 금융 당국으로부터 ‘문책 경고’에 해당하는 중징계를 받았다. 과거 저축은행 사태 당시 미래저축은행에 부당하게 지원했다는 결론이었다. 문책 경고를 받으면 당장 사퇴하지는 않아도 되지만 연임이 불가능해진다. 이전까지 문책 경고를 받고 계속 행장직을 수행한 전례는 없었다. 사실상 금융 당국의 사퇴 권고로 보고 스스로 물러났기 때문이다.

김 전 행장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완주’를 선언했다. 당연히 금융 당국은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보이지 않는 사퇴 압박도 가했다. 그렇게 4개월여를 버티던 하나금융과 김 전 행장이 ‘백의종군’ 의사를 밝힌 것을 두고 금융권에서는 “금융 당국에 보이는 성의”라는 해석이 나왔다. 외환은행 노조에 메시지를 보내는 의도도 있었다. 통합을 추진하는 상황에서 김 전 행장 이후 후임 하나은행장을 선임할 수는 없었다. 자연스레 통합 은행장은 외환은행에서만 30여 년을 일한 김한조 외환은행장으로 굳어지는 그림이었다. CEO 자리를 양보한다는 의미다.
‘M&A 강자’ 하나금융의 마지막 퍼즐
그러나 통합 후 CEO 자리에 누가 오를지는 노조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외환은행 출신이 행장이 된다고 외환은행이 사라지지 않는 건 아니었다. 꿈쩍도 하지 않던 노조를 대화 테이블로 끌어낸 건 ‘당근’이 아니라 ‘채찍’이었다. 외환은행 노조는 9월 3일 임시 조합원 총회를 개최했다. 지방의 조합원까지 상경하는 대규모 행사였다. 외환은행 측은 ‘이때다’ 싶었다. 총회에 참석한 직원 898명에 대한 징계 절차에 착수했다. 근무지를 ‘무단이탈’해 은행을 찾은 고객들에게 불편을 줬다는 이유였다. 동시에 노조가 협상 테이블에 나온다면 징계를 철회할 수 있다는 의사도 내비쳤다. 대립 끝에 조합원을 사지로 내몰 수 없었던 노조는 결국 “대화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노사 대화 후에도 바뀐 것 없어
하지만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전엔 협상장 밖에서 노사가 평행선을 달렸다면 이제는 안에서 대립하는 것뿐이었다. 노조는 급할 게 없었다. 가을도 다 지나고 해가 바뀌도록 진전이 없었다. 지루한 대치만 이어졌다.

잠시였지만 하나금융에 ‘한 줄기 서광’이 비치기도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최선을 다한 하나금융의 노력이 금융위를 움직인 것이다. “노조 합의가 필요하다”던 금융위가 “하나금융은 할 만큼 했다”며 하나금융의 통합 승인 신청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비쳤다.

하나금융이 이를 놓칠 리 없었다. 신제윤 당시 위원장이 “법과 원칙에 따라 (통합을) 결정하겠다”며 합병 승인 의사를 밝히자 1월 19일 통합 예비 인가를 신청했다. 6개월 넘게 끌려 다니던 하나금융이 주도권을 찾아오는 순간이었다. 다급해진 외환은행 노조는 1월 한파 속 금융위 앞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그러나 결국 2·17 합의의 위력이 더 셌다. 하나금융의 단꿈은 ‘2주몽(夢)’으로 끝났다. 법원이 이 드라마에 등장하면서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지난 2월 4일 외환은행 노조가 제기한 ‘통합 절차 중단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다. 5년간 독립 경영을 보장한 2·17 합의 당시와 지금의 회사 상황이 현저하게 달라졌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노사 합의를 지켜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반전이었다. 법원은 2·17 합의에 대해 “노조와 외환은행, 외환은행의 1인 주주인 하나금융 사이에서 경영권과 주주권에 관해 체결한 것”이라며 유효성을 인정했다. 또 합의서가 당시 노조와 장기간 대립 끝에 금융위의 중재 아래 작성됐다는 점을 강조했다. 법원의 판단에 따라 하나금융은 오는 6월 30일까지 하나은행과 외환은행 합병을 위한 금융위 인가 신청이나 주주총회 개최 등의 행위를 할 수 없게 됐다.

하나금융에 불어 닥친 후폭풍은 컸다. 이우공 당시 하나금융지주 부사장 등 통합을 주도하던 임원 3명이 자진 사퇴했다. 법률 자문을 받던 대형 로펌 두 곳 중 한 곳과의 계약도 해지했다.
더 땅을 칠 노릇인 것은 법원에 이 가처분 신청에 대한 판단을 빨리 내려 달라고 요청한 게 외환은행 노조가 아닌 하나금융이었다는 것이다. 금융위가 예비 인가 신청 승인에 부담을 덜 느끼도록 노조가 신청한 가처분에 대한 판단을 빨리 구해 ‘털고’ 가겠다는 의도였다. 후폭풍은 법원 판단이 무조건 ‘기각’일 것이라고 속단한 대가였다.

이 드라마는 어떻게 끝날까. 이제 5월이다. 법원의 중단 명령 효력이 다하는 6월 30일이 다가온다. ‘시즌 2’ 시작이 임박한 것이다. 아니, 이미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하나금융과 외환은행 노조는 현재 만남을 재개했고 의견을 조율 중이다.


박한신 한국경제 금융부 기자 hansh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