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희룡·조윤선 등 명사들의 ‘사부곡’…돈보다 값진 ‘아버지의 유산’

문득 돌아보니, 아버지를 닮은 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어디 외모나 성격뿐일까. 삶에 대한 태도나 내 인생의 방향을 이끌고 온 가치관, 하다못해 사소한 생활 습관까지 아버지와 닮았다는 것을 순간순간 느낀다. 아버지란 단어에 ‘원망과 고마움’이 동시에 묻어나는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많은 가르침을 준 ‘고마운’ 분이지만 그만큼 두렵고 낯설어서 ‘원망스럽'기도 한 분이다. 한경비즈니스는 2006년 3월부터 2013년 10월까지 명사들과 아버지의 추억담을 털어놓은 ‘아! 나의 아버지’를 시리즈 기사로 담았다. 그중 아버지에 대해 애틋함이 묻어난 열 편의 글을 발췌했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아버지를 향한 절절한 마음, 아마도 그건 우리 시대를 살아 낸 ‘모든 아버지와 아들들’의 이야기일 것이다.


언제나 믿고 기다려 주신 뜻
원희룡 제주특별자치도 지사

아버지의 인생은 신앙과 농사일로 압축된다. 아버지는 감귤 농사로 우리 남매들을 키우셨다. 소박하게 땅을 가꿔 여섯 남매를 다 키워 내신 부모님. 독실한 신앙과 노동으로 평생을 살아오신 부모님을 떠올린다.

공부해서 대학에 진학해 서울에 온 뒤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유기정학 처분을 당하고 구로공단에서 낮에는 공장 노동자로 일했고 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아버지는 자랑스러워하던 아들이 수배 중인 운동권이 됐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으셨다. 수소문 끝에 아버지는 야학으로 찾아오셨다. 임시 교실로 사용하고 있던 창고에 붙여진 시간표를 한참 바라보셨다고 한다. 수업이 시작되고 학생들이 몰려오자 천장에 올라가 내 수업을 들으셨단다. 학생들과 아들이 창고 교실을 빠져나가고 아버지는 천장에서 내려와 아들을 만나지 않고 편지 한 장만 남긴 채 고향으로 가셨다. “네가 하는 일이 잘못된 일인지는 잘 모르겠고 다만 하나님께 맡길 뿐이다.” 몇 년 뒤 사법시험에 수석 합격했을 때 찾아 온 기자들에게 아버지는 그날의 일화를 들려주셨다. 아버지는 늘 그렇게 묵묵히 나를 믿어주셨다.


더 다가가고 싶은 ‘ 4형제 버팀목’
윤은기 한국협업진흥협회 회장

한마디로 아버지는 엄했기 때문에 다정다감하게 대화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우리 형제는 지금도 아버지를 무서워하거나 어려워한다. 아버지는 시골에서 농업학교를 마친 후 시험을 치러 군청 공무원이 됐다. 관존민비 시절, 그리고 유교 사상이 남아 있던 시절 박봉인 말단 공무원이지만 공직에 큰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던 차에 6·25전쟁이 터지면서 일대 사건이 발생했다. 공산군이 점령하자 공무원 신분 때문에 사형선고를 받고 수용됐다. 하루하루 집행 날짜를 기다리던 중 인민위원회 간부로 있던 외할아버지 친구의 아들을 만나 겨우 목숨을 건졌다.

지금도 어릴 적 출근 시간이 생각난다.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운전하셨고 퇴근 후에는 곧장 집으로 오셨다. 집에 와 가사를 돕지는 않았다. 화단에 물을 뿌리는 정도였고 늘 조용히 앉아 계셨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버지에게 집은 가장 안전한 피난처였던 것 같다. 생사의 기로를 넘어온 후 사람들을 가려서 사귀는 편이었고 다소 경계심이 컸던 것으로 기억된다. 전쟁 중 평소 알고 또 믿고 지내던 이들이 서로 밀고하고 죽이고 하는 걸 체험했기 때문이다. 이 또한 전쟁이 남긴 비극이다.


아버지의 유산
정태섭 연세의대 강남세브란스병원 교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말에 일본에 유학, 광복 후 교육계에 몸담으셨다. 시골에서 명문 집안 출신으로 세도가 집안의 어머니와 만나 결혼하셨지만 청렴한 교육자인지라 유산은 별로 남기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내가 막내여서인지 초등학교 다닐 때 꼭 무릎에 앉히고는 옛날 고사, 다양한 과학 이야기 등을 재미있게 들려 주셨다.

여섯 살 때인가 아버지가 태양의 흑점을 망원경으로 관측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던 생각이 떠올라 1993년 강남세브란스 병원에서 천체망원경을 갖춰 놓고 13년간 청소년과 어린이 환자들에게 천체 관측 행사를 열었다. 최근에는 의학 전공 분야인 영상의학의 X선을 이용해 ‘X-레이 아트’를 시작, 제법 주목받는 작가가 됐다. 이제 느끼는 것이지만 아버지는 유산을 돈이나 물질로 내려주신 게 아니라 어려서부터 무릎에 앉히고 계속 이야기해 주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과학과 예술을 직접 해 볼 수 있게 하는 등 능력으로 남겨 주신 것 같다.


차라리 아버지가 간첩이었다면…
김지룡 작가·문화평론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에게 물었다. “국가의 주권은 누구에게 있어요?” 당시는 박정희 독재 정권 시절이었다. “인민에게 있다.” 깜짝 놀라 일어나 앉았다. 아버지가 간첩 같아 보였다. 한동안 고민했다. 아버지를 경찰서에 고발할 것인지 말 것인지…. 실업자로 돈을 벌어오지 못하는 아버지, 가족에게 애정 표현도 잘하지 않는 아버지, 생활 전선에 뛰어든 어머니를 도와주지 않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보다 포상금이 더 매력적이었다. 오랜 고민 끝에 신고하지 않기로 했다. 아버지가 간첩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간첩이라면 간첩다워야 하는데 아버지는 너무 게을렀다.

의사였던 증조할아버지가 돈을 많이 번 덕택에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대학물까지 먹었고 당시의 많은 지식인들이 그렇듯 사회주의자였다. 아버지는 석탄공사에서 근무했다. 사무직이었던 아버지는 노조 결성 활동을 했다. 그 일로 아버지는 회사에서 쫓겨났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취직이 불가능한 상태가 됐다. 그래도 이해할 수 없었다. 회사에 다니지 못한다고 해서 일을 못하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인텔리 출신이라는 체면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내게 무척 많은 것을 남겼다. 무능한 남자가 되지 말아야겠다는 게 내 인생의 주된 테마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어머니와 함께 리어카를 끌었다. 아홉 살 때 섭씨 영하 10도에 리어카를 끌었는데 뭐가 두렵겠는가.


‘살아실제 섬기길 다하여라’
성선녀 성우·웰빙스피치센터 원장

내가 어렸을 적 기억하는 아버지는 대단히 낭만적인 분이었다. 평생 술과 담배를 좋아했고 술이 거나하게 취한 날 밤에는 온 동네 사람들이 아버지가 들어오는 것을 알 정도로 동네가 떠나가라 노래를 부르셨다. “홍도오야~우지 마라 오오빠아가 이이있다~” 노랫소리가 들리면 우리 식구는 자다가도 모두 일어나 아버지를 맞이했다. 그 뒤에는 온 식구가 아버지 성화에 못 이겨 갑자기 노래자랑을 하곤 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키 순서대로 줄을 세운 뒤 노래를 부르게 했다.

아버지는 고등학교 영어 선생님이셨는데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대단히 엄격하셨다고 한다. 영어 교과서를 집필하느라 차가운 겨울밤 밥상을 책상으로 해 아랫목에 놓고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 매일 밤 글을 쓰시던 모습은 평생을 두고 나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아버지는 매일 같이 쉬지 않고 알아들을 수 없는 멋진 소리로 영어책을 읽으셨는데, 그래서 어린 시절 나는 아버지가 선생님이라는 게 대단히 자랑스러웠다.


남도를 사랑한 ‘소설가 오유권’
오윤 한양대 법학과 교수
아버지는 황순원 선생의 추천으로 1955년 ‘현대문학’에 등단한 이후 줄곧 남도 농민에 대한 소설만 쓰셨다. 우리 현대 문학 사상 가장 많은 단편을, 그것도 농민문학으로 쏟아냈던 만큼이나 아버지는 남도의 생활을 사랑하셨다. 그런 아버지가 1968년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오겠다는 결심을 하신 것은 자식들 교육 때문이었다. 이후 아버지는 문단에서의 교유 범위가 넓어지고 작품 활동도 왕성하게 하셨지만 그런 시절이 오래 가지는 못했다. 아버지에게 서울은 순수문학에만 전념하면서 생활을 하기에 무척 힘든 곳이었다. 아버지와 고향이 그리울 때는 옛 자취가 남아 있는 영산포 생가를 찾곤 한다. 허름한 채로 남아 있는 생가에는 호롱불 밝혀 가며 문학을 공부하고 창작에 열중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서려있다. 지금은 바로 옆에 마을을 가로지르는 아스팔트길이 생겨 마치 벼랑에 걸쳐 있는 것 같은 생가를 보면, 가슴이 찡해 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타고난 천재성과 불굴의 노력으로 농민문학의 한 획을 그으신 아버지의 자취로는 너무나 초라하다.


자립과 노력의 힘을 깨우쳐 주신 분
김성오 메가스터디 사장
아버지는 미자립 시골 교회 목회 활동을 하셨다. 성품이 강직하셔서 가정교육과 신앙 교육에 엄격하시다 못해 무서울 때도 많았다. 아버지는 이웃집에 맛있는 냄새가 나면 우리에게 그 근처에 절대로 기웃거리지 못하게 하셨다. 얻어먹는 거지 근성을 길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혹 손님이 찾아와 먹을 것이 생기기라도 하면 이웃집 아이를 불러 함께 나누어 먹곤 했다. 어린 마음에 나눠 먹는 것이 참 아까운 생각이 들곤 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한글도 제대로 모르는 내게 성경책을 내밀며 하루에 한쪽씩 읽으라고 하셨다. 당시 성경책은 대부분이 한자로 돼 있어 눈앞이 캄캄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다. 막히면 아버지가 한자를 읽어 주고 뜻도 풀어주셨다. 처음에는 그렇게도 읽기 어렵던 것이 시간이 갈수록 수월해지더니 일곱 살이 되자 자연스레 한글을 깨쳤고 한자도 꽤 많이 알게 됐다. 돌이켜 생각하면 아버지는 매일 꾸준히 무엇인가를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알고 내게 이런 가르침을 주신 것이었다.


시골 한의사와 사랑방 손님들
김영현 소설가
이마에 움푹한 흉터가 있고 멋있는 콧수염을 기른 아버지는 전형적인 시골 한의사였다. 담배 연기와 한약재 냄새가 자욱한 사랑방은 언제나 뜨내기손님, 동네의 할 일 없는 늙은이, 이야기꾼들로 시끌벅적했다. 나는 유년 시절을 아버지의 사랑방에서 보냈다. 내가 다섯 살 되던 해에 우리는 동네 어귀에서 동네 안의 새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됐다. 그 때문에 아버지는 빚을 많이 지게 돼 할 수 없이 약 가방 하나만 들고 부산으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나야 했다. 그때 아버지를 따라간 사람이 바로 갓 다섯 살 난 나였다. 막 전깃불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초저녁 무렵이었는데 그때까지 시골의 호롱불만 보아온 나는 불꽃이 피어난 그 정경에 그저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가 이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이십여 년이 지나간다. 대부분의 시간을 아버지를 잊고 살아가지만 어느 순간 어린 아들을 품에 안을 때면 내가 또 아버지의 아들이 되어 안기는 듯한 기분에 싸이곤 한다.


헌신과 도전의 의미 일깨워 주시다
조윤선 대통령 비서실 정무수석
“네 모험심은 아버지한테서 왔구나.” 미국 연수 시절, 연방법원 판사와 점심을 들면서 아버지가 로스앤젤레스로 연수를 오셨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그분이 이렇게 말했다. 미국 연수를 마친 후 나는 졸업식 참석 차 오신 부모님과 짧은 여행을 했다. 여행 책에 나오는 대로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더니 아버지는 “영어를 잘하면 여행이 잘되는구나”라면서 돌연 LA에 있는 대학으로 어학연수를 떠나셨다. 그게 예순여덟 되신 해였다.

전형적인 경상도 분으로 평소 말이 없는 아버지였지만 나는 어릴 때 아버지와 얘기하면서 밤을 꼴딱 새운 적이 많았다. 우리 수다의 주제는 참 다양했지만 그중에서 가장 가슴 찡했던 얘깃거리는 6·25전쟁 때 불과 열대여섯의 나이로 어린 여동생들을 모두 데리고 부산으로 피란을 떠났던 일이었다. 나보다 어린 나이에 어린 동생들의 인생을 책임져야 했다니, 전쟁이란 참으로 사람을 잔인할 만큼 일찍 어른이 되게 하는구나 싶었다.


존경했던 아버지와 지금의 나
양기인 신한금융투자 리서치센터장

부모님은 남의 논을 소작하셨다. 자작이라고는 집 앞의 텃밭이 전부였다. 그러니 그 많은 형제들을 거두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학비를 제때 내 본 기억이 없다. 당시 소작농이 주요 수입원이었던 집안 사정으로 아버지는 엿장수도 하셨다. 겨울철에 하셨는데 요즘 말하는 투잡족이었던 셈이다. 대학 4학년 2학기에 한창 취업 준비를 하던 9월 어느 날,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내게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연락이 왔다. 어떻게 해 볼 경황도 없고 효도 한번 못했다는 죄의식에 안타까움만 더했다. 그렇게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희생만 하시다가 내 곁을 훌쩍 떠나셨다.

내가 부모님을 존경하는 것처럼 우리 집 작은 녀석도 한때 나를 훌륭한 아버지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환상이 점차 깨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요즘에는 컸다고 묻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한다. 그래도 나는 내 자식을 자랑한다. 그래서 오늘도 구두끈을 조여 매고 열심히 뛰고 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이 내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리=이정흔 기자 viva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