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드라마 강타한 ‘아버지 열풍’…세대 간 소통 계기 될까

“사랑한다” 한마디면 되는데…
“니가 필요로 하는 순간까지 나는… 니 아버지니까.”

KBS2 주말 드라마 ‘가족끼리 왜 이래’에서 욱하는 성질을 참지 못하고 깽판을 친 아들 대신 합의금을 갚은 아버지가 내뱉은 대사다. 그런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전하는 또 하나의 대사가 있다. “사랑을… 사랑이라 말하지 않으면… 사랑인 줄 모른단다.”

미디어가 ‘6070세대(60~70대)의 아버지’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한평생 가족들을 위해 희생하며 살아왔지만 점점 발언권을 잃고 초라해져 가는 이 시대의 아버지들에게 ‘말 걸기’를 시작한 것이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미디어를 넘어 현실 속에서 ‘내 아버지’를 이해하고 마음을 나눌 기회 말이다. 지금 이 시대가 ‘아버지’에 주목하는 배경은 무엇일까. 어색하기만 한 아버지와 자식들 사이의 거리감을 좁힐 방법이 과연 있을까. 윤대현 서울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이남옥 서울부부가족치료연구소장, 정덕현 문화평론가와 함께 ‘우리 시대 아버지의 자화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드라마 속 아버지, 발언권이 없다
사회 최근 영화 ‘국제시장’, KBS 주말 드라마 ‘가족끼리 왜 이래’ 등이 큰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이 같은 ‘아버지 열풍’의 배경은 무엇인가요.

정덕현 문화평론가(이하 정덕현) 사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미디어에 늘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아버지 열풍이 다른 것은 6070 아버지 세대의 감정과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웠다는 데 있습니다. 이는 뒤집어 보면 그만큼 가정 내에서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이들이 소외돼 있었다는 방증입니다. 지금까지 6070 아버지 세대에 대한 이야기가 빈약했기 때문에 현재는 상업적으로 더 힘을 갖게 된 거죠.

윤대현 교수(이하 윤대현) ‘인정받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6070 아버지 세대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누구보다 가족들을 위해 희생하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분들이 아닙니까. 한창때는 성실히 일함으로써 자신이 존재감을 찾았는데, 나이가 든 이후에는 사회적인 지위도 약해집니다. 가족들에게 인정받고 싶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죠. 더욱이 문제는 고령화입니다. 수명이 길어지면서 이 같은 ‘상실감’을 감당해야 할 기간도 길어지고 있는 겁니다. 인정받고 싶은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이지만 지금의 6070 아버지 세대가 특히 ‘공감’에 목마를 수밖에 없는 이유죠.

사회 요즘 미디어에 나타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 대부분이 비슷합니다. 가족 내에서 존재감도 없고 발언권도 적은 인물로 그려집니다.

정덕현 지금까지 드라마나 소설 등에서 아버지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를 보려면 어머니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살피면 됩니다. 1991년 방영된 MBC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와 2010년 방영된 SBS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만 비교해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이 뭐길래’의 엄마는 권위적인 대발이 아빠 앞에서 큰소리 한 번 못 치고 늘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런데 ‘인생은 아름다워’에서는 아들의 동성애가 밝혀졌을 때 엄마가 적극적으로 아들을 품습니다. 아빠는 그저 엄마의 의견을 지지해 주는 역할일 뿐이죠. 2008년에는 심지어 엄마가 휴업을 선언하는 ‘엄마가 뿔났다’는 드라마도 있지 않았습니까. 불과 20여 년 사이에 어머니와 아버지의 역할이 얼마나 크게 바뀌었는지 보여주는 겁니다.

이남옥 소장(이하 이남옥) 이 같은 일이 드라마나 영화 속 얘기만은 아닙니다. 현실에서도 그렇게 느끼는 아버지들이 적지 않습니다. 가족문제 전문가로서 의견을 말하자면 엄밀히 말해 이는 ‘아버지’와 ‘자식’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머니도 빼놓고 말할 수 없다는 겁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식들을 사이에 두고 삼각관계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면 쉽습니다. 영화 ‘국제시장’에서도 자녀들은 모든 문제를 어머니하고만 얘기합니다. 아버지와 자녀가 말다툼이라도 할라치면 어머니가 나서서 자식 편을 들고 아버지의 입을 막는 장면도 나옵니다. 어머니가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 어머니와 자식들을 한 편으로 묶게 되고 결과적으로 아버지는 자식들과 더 멀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자녀와 친해지고 싶다면 아내에게 먼저 잘 보이라고 얘기합니다. 아무리 자녀들을 붙들고 있어봤자 아내에게 밉보이면 좋은 반응을 얻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좋은 아버지는 좋은 어머니가 만든다’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사회 이와 같은 ‘아버지 부재 현상’은 사회적으로도 심각한 문제 아닌가요.

이남옥 사실 ‘아버지 부재 현상’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자녀들은 기본적으로 어머니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어머니와 더 친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어머니와 자녀들’이 친해질수록 아버지는 더 외로워지는 겁니다. 그러나 아버지 부재 현상이 심각해진다면 당연히 문제가 되겠죠. 아버지의 모델이 사라진다는 얘기니까요. 가족 상담을 하다 보면 실제로 이 같은 문제를 호소하는 아버지들이 정말 많습니다. 한번은 어느 기업체의 임원과 상담하게 됐습니다. 부하 직원들에게 하도 소리를 질러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막상 이분과 얘기를 나누다 보니 그 삶이 그렇게 치열하고 눈물겨울 수가 없었습니다. 해외에 나가 보름씩 밤을 새워 가며 불가능한 일을 성취했다는 얘기를 할 땐 본인도 어찌나 자랑스러워하던지…. 그만큼 6070 아버지 세대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러니 가족들에게 고함을 치는 사람이 회사에서도 고함을 치고,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왕따’가 되는 겁니다.
“사랑한다” 한마디면 되는데…
윤대현 지금 아버지 세대의 삶을 돌이켜 보면 가장 중요한 사명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이었습니다. 열심히 살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게 그들의 신념입니다. 그런데 열심히 살았지만 지금 그들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가족들마저 자신의 고생을 몰라주는 듯합니다. 자신의 희생을 보상받을 길이 없는 겁니다. 문제는 사람의 기억이란 게 참 황당하다는 겁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죽기 전 ‘10년간을 어떻게 보냈느냐’에 따라 자신의 평생에 대한 기억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겁니다. 인생의 노년기를 맞은 아버지 세대가 가족들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평생을 ‘실패했다’고 잘못 판단할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반대로 지금부터라도 가족들과 좋은 관계를 회복한다면 평생을 행복했다고 기억할 확률도 가능성이 겁니다.


아버지와 대화, 감정을 나눠라
사회 실제로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6070세대의 아버지들은 주로 윽박지르거나 고함을 치는 모습으로 자주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이남옥 아버지들이 ‘소통’에 얼마나 미숙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죠.상담 중에 자녀들에게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 보라고 하면 재미있는 결과가 나옵니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매우 구체적이고 정서적인데 비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두루뭉술하고 추상적입니다. 어머니와는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을 나누는 대화가 많은데 아버지와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떤 가치관을 가져야 하는지’ 등을 주로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이 아버지와 대화하기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정치 얘기를 주제로 삼는다면, 둘 중 한 사람은 틀렸다는 결론이 나야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버지가 무조건 옳다’고 말하는 게 좋은 방법은 아니라는 겁니다. 아버지와 정치를 주제로 얘기를 나누더라도 ‘정서적 공감’이 바탕이 돼야 한다는 거죠. 그렇게 서로의 감정을 나누기 시작하는 게 중요합니다.

정덕현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녀 세대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아버지 세대와 자녀 세대의 화법이 그만큼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겠죠. 예를 들어 아버지와 말다툼이 있다고 합시다. 자녀는 아버지의 의견이 왜 틀렸는지 말하는데, 아버지는 ‘자녀가 자신에게 대든다’는 자체에 화가 납니다. 이럴 때 자녀들이 아버지에게 해야 할 말은 “나는 아버지와 생각이 달라”가 아닙니다. 아버지가 얼마나 힘겹게 살아왔는지, 그래서 어떤 생각을 갖게 됐는지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아버지 역시 자녀에게 고함이나 윽박이 아닌 다른 말투로 말을 걸어오게 될 것입니다.


대중문화 역할, 갈수록 중요
사회 지금의 ‘아버지 열풍’이 6070 아버지 세대의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반영된 결과라면 이를 해소할 방법이 있나요.

윤대현 본디 아버지의 사랑은 내리사랑입니다. 자식들에게 무한한 애정을 쏟지만 그만큼 보상을 받는 것은 어렵다는 겁니다. 어느 정도 아버지 세대들이 자식들에 대한 기대를 접어야 할 부분도 있다는 겁니다. 아버지 세대는 어려서부터 집단주의 사회에서 살아온 분들입니다. 그만큼 자신의 상실감 역시 ‘가족’이라는 집단에서 채우려는 심리가 강합니다. 한마디로 아버지 세대의 ‘홀로서기’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취미든 뭐든 아버지들도 ‘혼자 노는 법’을 익혀야 한다는 겁니다. 아버지 세대에게 ‘취미가 뭐냐?’고 물어보면 돌아오는 답은 두 가지입니다. ‘술을 마시거나’ ‘술도 못 마시거나’죠. 그만큼 아버지 세대의 놀이 문화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사랑한다” 한마디면 되는데…
정덕현 공감합니다. 집단주의적 사고관이 강한 세월을 살아온 아버지 세대는 놀이 문화 또한 ‘집단주의적’입니다. 예를 들어 친구들과 단체로 유원지에서 술을 마시고 춤을 추는 겁니다. 아니면 회사 단합대회 같은 것이나요. 놀이도 ‘조직 문화’ 안에서만 즐겨온 겁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 세대는 취미 생활을 가지는 것도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특히 아버지 세대는 성공 지향적인 사고방식이 강하지 않습니까.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삶이 당연한 분들입니다. 시간을 보내는 것도 일종의 ‘저축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집 안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 자체를 견디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젊은이들 말로 ‘잉여’같은 느낌 자체를 참지 못하는 거죠. 그만큼 현재를 즐기는 데 익숙하지 않은 게 사실이고요. 그런데 찾아보면 아버지들이 취미 생활을 즐길만한 장소가 적지 않습니다. 동네마다 문화센터도 잘 갖춰져 있습니다. 억지로라도 이런 곳을 들러보는 게 좋습니다.

사회 ‘국제시장’이나 ‘가족끼리 왜이래’와 같은 영화나 드라마가 실제로 자녀 세대들이 아버지 세대를 이해하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시나요.
“사랑한다” 한마디면 되는데…
이남옥 저는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6070 아버지 세대의 ‘아버지 모델’과 3040 자녀 세대의 ‘아버지 모델’이 다릅니다. 그만큼 세상이 변하고 있는 과도기란 것이죠. 지금의 아버지 세대와 자녀 세대는 살아온 인생만큼이나 사고방식의 차이도 큽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서적 거리를 좁히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봅니다. 아버지 세대도 자녀 세대도 변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계기’가 필요합니다. 서로를 이해하는 계기 말입니다. 그게 대중문화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대중문화야말로 ‘다른 두 세대’를 이어 주는 데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죠. 아버지들은 늘 ‘아버지다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강박이 있기 때문에 외로워도 외롭다는 말을 못합니다. 미디어가 아버지들이 얼마나 외로운지를 대신 자식들에게 말해 주고 있는 겁니다.

정덕현 그래서 대중문화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국제시장’은 상업적으로 잘 만든 영화지만 6070 아버지 세대의 관점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에서 아쉽기도 했습니다. 아버지 세대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정한 ‘소통’이 시작되려면 자녀 세대의 관점에서도 함께 다뤄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양쪽의 관점을 ‘균형 있게’ 대변하는 드라마나 영화가 더 많이 나온다면 좋을 것입니다.


사회·정리=이정흔 기자 viva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