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들 “황금 알 잡아라” 사활 건 혈투…재계 2·3세 경쟁도 ‘치열’

면세점 ‘8조 원 쩐의 전쟁’ 막 올랐다
# 중국인 부부가 인천국제공항(이하 인천공항) 면세점 안의 한 스위스 시계 브랜드 매장에 들어서자 직원들이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반긴다. ‘취향’까지 알고 있는 단골손님의 등장이다. 이날 부부가 시계 한 개를 사는 데 쓴 돈은 약 8000만 원. 해당 브랜드 직원에 따르면 “한 달에 두어 번도 더 오는 중국인 단골손님들이 전보다 많이 늘었다”고 했다.

# 시내 면세점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광저우에서 온 중국인 모녀는 강남의 한 면세점에 있는 프랑스 명품 숍에 들러 7000만 원어치의 가방을 사며 ‘큰손 고객’을 입증했다. 브랜드 관계자는 “매출의 절반 이상이 요우커(遊客:중국인 관광객)를 통해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쇼핑을 위해 한국을 찾는 중국 신흥 부호들의 얘기다. 지난해 요우커가 한국에서 쇼핑에 쓴 돈은 9조 원, 2020년이면 더 많은 요우커가 몰려 쇼핑에 쓰는 돈은 30조 원을 넘을 것으로 한국관광공사는 전망했다. 특히 요우커들이 선호하는 ‘면세점’은 현재 업계 최대 호황기를 맞았다. 한국면세점협회에 따르면 면세점 매출 규모는 2010년 4조5000억 원에서 작년 8조5000억 원으로 4년 만에 2배 성장했다.

면세점 사업에서 ‘돈맥’을 찾은 대기업들은 면세점 투자에 사활을 걸고 뛰어들고 있다. 투자와 운영비용이 높은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면세점 쟁탈전이 시작됐다.

세계 최대 규모인 인천공항 면세점이 ‘새 주인’ 찾기에 나서 대기업들이 대거 몰리고 있다. 오는 2월 인천공항 면세점 사업권의 계약 기간이 종료된다. 이에 따라 인천국제공항공사는 신규 사업자 선정에 나섰다.


“가족끼리 왜 이래” 재계 2·3세 ‘각축전’
지난 1월 15일 인천국제공항공사 등에 따르면 최근 열린 ‘제3기 면세 사업권 입찰 설명회’에 현 입점 업체인 롯데·신라면세점은 물론 신규 입점을 노리는 신세계(신세계면세점)·한화갤러리아타임월드(갤러리아백화점)·SK네트웍스(워커힐면세점) 등 국내 유통 대기업이 빠짐없이 참석해 신규 사업자 입찰에 참여할 의지를 보였다. 해외 대기업으로는 세계 면세 업계 1위 DFS그룹과 2위 듀프리도 있다. 이들 중 8개 기업만이 사업권을 획득한다.

이 가운데 신규 사업자로 유통 공룡인 ‘신세계’가 나서며 묘한 경쟁 구도가 나타났다. 사촌 오빠인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과 기존 사업자인 사촌 동생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과의 경쟁이 불가피해진 것이다.

현 입점 업체인 신라면세점은 재입점을 자신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입찰 결과 면세 영업장 운영 업체가 늘어나면 수익성이 한계에 이를 것으로 우려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 해 동안 인천국제공항공사에 매출 2조 원의 3분의 1이 넘는 6000억여 원을 임차료로 내고 인건비 등 영업비용을 빼면 사실상 적자이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이번 입찰의 최저 수용 금액(임차료 하한선)이 지금보다 15%나 오른 만큼 이익을 기대하기 어려워졌다는 계산이다.
‘비싼 자릿세’로 적자를 본다고 한들 정 부회장의 의지는 쉽게 꺾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신세계는 서울 시내에 면세점을 한 곳도 두지 못한 상황이다. 이 때문에 신세계의 인천공항 입성은 신세계로서는 반드시 잡아야 할 ‘대어’나 다름없는 것이다. 정 부회장은 면세점 사업을 위해 조금씩 보폭을 늘려 왔다. 2012년 부산 해운대 파라다이스호텔 면세점을 인수하면서 첫 물꼬를 텄고 2014년 김해공항점을 개점하면서 면세점 사업 확장에 나섰다.

‘면세점’을 차지하기 위해 격전을 벌이는 것은 이들만이 아니다. ‘현대가’ 인물들도 눈에 띈다. 유통가 빅 3인 현대백화점의 정지선 회장과 그의 삼촌인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이 ‘서울 시내’ 면세점 진출을 놓고 격돌했다.
면세점 ‘8조 원 쩐의 전쟁’ 막 올랐다
건설업 침체를 벗어나기 위해 서울 시내 면세점에 승부수를 띄운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은 지난 1월 12일 기자 간담회를 열고 “현대아이파크몰이 있는 용산은 발전 가능성과 지리적 강점을 갖췄기 때문에 면세점으로서 서울을 대표하는 관광 랜드마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약 1000억 원을 초기 투자해 아이파크몰의 3~4층 8500㎡ 정도를 면세점으로 꾸밀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어 “3만3050㎡(1만 평) 규모의 인근 부지를 주차장으로 활용하고 남산과 각종 박물관 등 주변 관광 인프라도 활용할 것”이라며 적극적인 면세점 시장 진출 의지를 밝혔다.

정지선 회장의 면세점 사업에 대한 의욕도 이에 못지않다. 정 회장의 진두지휘 아래 면세점 사업 진출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어 유통 업계에서는 현대백화점의 면세점 사업 진출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범삼성가에 이어 범현대가 역시 면세점을 놓고 ‘가족끼리도 양보할 수 없는’ 불꽃 전쟁을 예상케 한다.

면세점 시장의 ‘빅 2’인 롯데와 신라의 전쟁은 ‘제주도’에서 더욱 치열하다. 전쟁의 발단은 이렇다. 롯데는 서귀포시 중문 관광단지에서, 호텔신라는 제주시 연동에서 각각 면세점을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롯데의 서귀포 제주면세점 계약이 3월에 끝나면서 제주도의 면세점 사업 지형이 바뀔 수도 있는 처지에 놓였다. 서귀포 제주면세점은 현재 새 면세점 운영업자 선정 절차를 진행 중인데, 기존 사업자인 롯데와 건설 업체인 부영이 입찰에 참여한 상태다. 롯데 측은 면세점 특허를 받게 되면 국내 최대 규모의 중소기업 전문 면세점 매장을 운영해 그 수익을 제주에 환원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롯데는 이뿐만 아니라 호텔신라 면세점이 있는 제주시 연동에도 면세점을 진출시키겠다고 선전포고했다. 롯데면세점은 지난해 12월 제주시 연동에 있는 롯데시티호텔에 면세점을 운영하겠다는 사업 신청서를 제출한 상태다.


‘장밋빛 전망’ 우려도
한국 유통시장에 불어닥친 면세점 투자 경쟁은 지난 1월 18일 발표된 투자 활성화 대책이 더욱 불을 지폈다. 정부는 서울에 3개(2개 일반 경쟁, 1개 중소 중견 기업만을 대상으로 하는 제한 경쟁), 제주도에 1개(중소·중견기업만을 대상으로 하는 제한 경쟁)의 면세점을 추가 허용한다고 밝혔다.

서울 지역 입찰 참여 예상 기업은 호텔롯데·호텔신라·SK네트웍스·동화면세점을 포함한 신세계·한화갤러리아타임월드·현대산업개발·현대백화점·모두투어 등이 있다. 내년 초에 입찰 공고, 하반기에 라이선스 발급 순서로 진행될 전망이다. 제주도에 새로 들어올 면세점 후보로는 제주관광공사·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 등 지역 공기업들이 입찰 주인공에 오르내린다. 현재 국내 시내 면세점은 서울 6개, 부산 2개, 제주 2개, 울산·창원·대전·대구·수원·청주·아산 각 1개 등 총 17개다. 서울 시내에 신규 면세점이 오픈하는 것은 2000년 이후 15년 만이다.

이처럼 유통 업계 최대 화두가 ‘면세점’이 된 데는 역시 요우커가 자리한다. 실제로 요우커 덕에 지난해 국내 면세점은 약 8조5000억 원의 시장으로 성장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하지만 요우커가 국내 면세점에서 수십조 원을 쓸 것이란 장밋빛 전망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중국을 비롯한 인근 국가의 견제와 경쟁이 만만치 않아 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중국에서 역시 관광업이 살아나는 가운데 면세점 사업도 확장되는 추세다. 특히 중국국제여행사(CITS)는 9월 1일 중국 하이난다오 산야에 ‘세계 최대’ 규모 면세점인 CDF몰을 오픈했다. 공사비만 50억 위안(8290억 원)이 투입된 이 면세점은 300여 개 최고급 브랜드가 입점하며 총면적은 7만2000㎡다. 한국 최대 규모인 롯데월드면세점의 6배가 넘는다. 이 면세점은 고급 호텔은 물론 오락 시설을 갖춰 중국 국내 관광객뿐만 아니라 해외 관광객들에게도 인기를 끌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미쓰코시이세탄·일본공항·아리타국제공항이 올가을 도쿄 긴자에 시내 면세점을 오픈할 예정이다. 대만은 중국과 가까운 진먼 섬에 면세점을 내고 요우커 모시기에 나섰다.


김보람 기자 boram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