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은 예술가 아닌 혁명가…과학과 예술의 융합 이뤄 내

‘직관·상상력’의 힘을 기르자
우리는 여전히 백남준을 ‘한국이 낳은 위대한 세계적 예술가’로 여기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실제로 그의 작품을 많은 한국인이나 한국 기업이 소장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의 진가가 제대로 평가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그는 단순히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로만 평가될 수 없다. 위대한 현대 예술가 그 이상이다. 그는 위대한 혁명가다.

백남준(白南準, 1932~2008년)은 1960년대 플럭서스 운동의 중심에 서서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공연과 전시로 큰 충격과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플럭서스(Fluxus)는 1962년 조지 마키우나스(George Maciunas)가 처음 사용하고 선언문을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변화·움직임·흐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귀족병’에 걸려 있는 상업화된 문화 모두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가 백남준이다. 또한 비디오 아티스트로 알려졌지만 그가 전공했던 것은 현대음악이었다. 그가 일본의 도쿄대에서 제출한 졸업 논문은 아놀드 쇤베르크(Arnold Schoenberg)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1956년 독일로 유학을 떠나 뮌헨대와 프라이부르크 음악학교, 쾰른대에서 현대음악을 전공했다. 이런 학문적 배경은 백남준 예술의 진면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실제로 그는 일종의 음악적 영감을 토대로 작업을 시작했다. 훗날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 가운데 하나가 첼리스트 샬럿 무어맨을 첼로 삼아 연주하는 퍼포먼스였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에게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1958년 전위음악가 존 케이지(John Cage, 1912~1992년)와의 만남이었다. 그 만남은 백남준의 인생과 예술에 대전환을 이끌었다. 존 케이지는 기존의 음악적 정의를 거부했고 ‘불확정성의 음악’, ‘우연성의 음악’을 강조하며 음악에 대한 당혹스러울 정도의 혁신을 시도했다. 백남준은 ‘존 케이지에 대한 헌정(Homage a John Cage)’을 공연하면서 바이올린을 내리쳐 박살내는 해프닝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연주회에서 객석의 관객들의 넥타이를 가위로 잘라 그들을 기겁하게 만드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넥타이를 자르고 피아노를 두들길 수도 있다는 도발은 많은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고 급기야 경찰이 출동하기까지 했지만 눈 밝은 사람들은 그 의미를 직관했다. 이 사건은 케이지가 주장한 우연성과 불확정성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 공연을 통해 평생의 예술적 동지인 요셉 보이스(Joseph Beuys, 1921~1986년)와 인연을 맺게 됐다.


백남준의 해프닝이 아니라 성찰을 보라
백남준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예술에 대한 근원적 정의를 바꿔 놓았고 표현의 범위를 혁명적으로 확대했다. 백남준은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동료들과 함께 광범위하게 작업했다. 1973년 ‘글로벌 그루브(Global Groove)’에서는 존 케이지와 앨런 긴즈버그(Allen Ginsberg)의 작품을 활용했다. 이러한 그의 작업 방식은 예술 창작에 대한 정의와 표현의 범위를 확대했다. 그리고 1974년에는 백남준에게도 상징적인 대표작이 되는 ‘TV 정원(TV Garden)’을 발표했다. 수많은 모니터를 사용해 비디오 설치라는 개념을 도입, 설치미술의 가능성에 새로운 차원을 더했다. 백남준에게 음악이니 미술이니 하는 칸막이는 더 이상 무의미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를 자꾸만 비디오 아티스트라는 대중적 이미지에만 머무르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

백남준의 가장 위대한 성과는 다양한 넘나들이를 통해 음악뿐만 아니라 미술의 역사를 바꿨다는 점이다. 미술은 회화든 조각이든 공간을 차지하는 예술이다. 그러나 시간이나 움직임을 담지 못한다. 반대로 음악은 공간을 담지 못한다. 그것을 깨기 위한 무수한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엔지니어 출신 조각가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Calder, 1898~1976년)가 몬드리안의 추상 작품을 모티프로, ‘키네틱 아트(kinetic art)’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해 모빌로 움직임을 표현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기계적이고 우연적 움직임을 나타낼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백남준은 TV라는 ‘새로운 캔버스’에 주목했다. 그것은 이전까지의 미술에서 꿈도 꾸지 못했던 ‘시간과 동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은 쾌거였다. 그것을 ‘콜럼버스의 달걀’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 선택은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는 일찍이 “콜라주가 유화를 대체하듯이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체할 것”이라고 예언했고 자신이 그것을 입증해 보였다. 비디오 아트, 그리고 백남준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의 미술의 혁명가였다. “자연이 아름다운 이유는 아름답게 변해서가 아니라 단지 변하기 때문이다”라는 백남준의 말은 그 변화를 담을 수 있다는, 즉 시간과 동작을 미술로 표현할 수 있다는 대담한 상징이기도 했다. 백남준은 붙들 수 없는 시간의 조각들을 묶어 공간을 구성하고 그 안에서 시간의 길이와 깊이, 순간성과 영원성, 정형성과 비정형성을 동시에 구현했다. 더 나아가 그는 단순히 새로운 매체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인간과 삶의 근원적 문제인 시간을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하고 성찰하게 한 위대한 철학자였다. 그래서 그에게는 ‘시간을 지휘하는 예술가’라는 칭호가 헌정됐던 것이다. 그는 전기공학자이며 발명가이고 기술자로서 대중 우상인 TV를 임의적으로 조작한 최초의 예술가다. 그것은 위대한 혁명이었다.


닫힌 시각을 깨뜨려 준 혁명가
필자가 개인적으로 백남준의 예술에 전율을 느낀 것은 1984년에 있었던, 뉴욕·파리·베를린·서울을 연결하는 최초의 위성중계 작품 ‘굿모닝 미스터 오웰(Good Morning, Mr. Orwell)’이었다. 세계 최초의 쌍방향 방송이며 TV는 쌍방향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선언이었다. 미술품은 고유한 작품이 단 하나밖에 없다. 그래서 작품이 희소하고 비싸다. 앤디 워홀이 꽃피운 팝아트는 실크스크린으로 수많은 작품을 복제해 누구나 가질 수 있게 했다지만 그것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백남준은 전 세계인이 어디에 있든지 동시에 같은 작품을 감상할 수 있고 소유(녹화)할 수 있다고 대담하게 선언한 것이다. 그것은 세계 민주주의(global democracy)의 가능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백남준이 1984년에 이 작품을 기획한 것은 조지 오웰의 ‘1984’의 비관주의를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를 선언한 것이었다. 백남준은 이후 이 작품을 3부작 연작 시리즈로 제작, 1986년 제2편 ‘바이 바이 키플링(Bye Bye Kipling)’을, 1988년에는 제3편 ‘손에 손 잡고(Wrap around the World)’를 연달아 발표했다. 그는 위대한 세계인이었다. 그게 백남준 예술의 진면목이다. “예술가의 역할은 미래를 사유하는 것이다”라는 그의 말은 그 어떤 예술가의 말보다 묵직한 울림을 갖는다. 그래서 그는 철학자이며 과학자다.

백남준이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 가운데 하나는 그의 과학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과 적절한 지식의 습득이었다. 이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흔히 과학과 예술은 친해질 수 없는, 소원한 관계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백남준은 바로 그 점을 명확하게 인식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직관 능력이었다.

과학과 예술의 진정한 힘의 원천은 ‘직관과 상상력’이다.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만 다를 뿐이다. 그리고 철학은 그것들을 삶과 사유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논리적 서술이다.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것들을 따로 떼어 각자 따로 놀게 만들어 서로 넘나들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전문가 바보’만 만들어 낸 우리의 속도와 효율의 교육 패러다임 때문이다. 전문적 지식의 습득만을 강조하고 수월성(excellency)만 중시하는 기능적 교육에만 머물러 있는 한 우리의 미래는 어둡다. 예전처럼 교육이 나라의 발전을 지탱해 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망치게 하지 않으려면 바뀌어야 한다. 미술·음악 따로, 과학 따로, 철학과 문학 따로, 그렇게 제각각 독립된 분야로만 다루는 방식은 이미 21세기 후반을 기점으로 한계를 드러냈다.

자유·직관·상상력을 극대화하는 게 바로 진짜 혁명의 근원이다. 예술과 과학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 그것을 서로 넘나들게 할 수 있을 때 상상력도 창의력도 생긴다. 융합은 그래서 위대하고 우리가 당면한 가치다. 다시 백남준을 인용해 말하자면 “불확실성 없는 창조란 있을 수 없다”. 틀을 깨고 열린 눈으로 세상과 삶을 봐야 한다. 그 인식적 힘이 바로 직관이다. 그리고 진짜 직관의 힘은 두루 아는 바를 가로세로로 자유롭게 넘나들게 하면서 서로 결합할 때 생긴다. 백남준의 예술에서 그 점을 배워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