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리주의 가치는 ‘행복 추구 권리’…행복해지면 인성은 저절로 좋아진다

‘인성’을 가르치려고 하지 마라
도덕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이 인격적 주체로 살아가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의무를 따르거나 규범의 명령을 준수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때로는 적법하지만 비인간적인 행위도 있다. 과연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고 갈등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도덕적으로 산다는 것은 그저 온순하게 주어진 의무를 따르고 규범을 준수하는 것이 아니다. 왜 도덕적으로 살아야 하는지, 무엇이 도덕적 삶인지, 내가 살고 있는 세상과 사람들이 어떠한 도덕적 이념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등에 대해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고민하고 갈등하면서 그것을 극복해 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도덕적 선택 앞에서 고민과 갈등을 부담스러워하거나 외면할 게 아니라 진지하게 성찰하고 논의함으로써 보다 나은 자아를 정립해야 한다. 그러니 윤리적 혹은 도덕적 고민과 갈등은 소중한 보석과도 같은 것이다.


희망 없는 사회가 진짜 문제
최근 병영 사고 등을 통해 인성 교육이 강조되고 있다. 군에서 일어나는 사고의 가장 큰 이유로 꼽는 것이 바로 잘못된 병영 문화와 그릇된 인성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진단이 잘못되면 처방도 그릇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제대로 치료할 수 없다. 군에서 내놓은 대안이라는 게 사병들의 사고가 계급 간의 갈등 때문이라며 이병과 병장을 없애겠다고 한다. 젊은이들이 군에서 사고를 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병영 문화나 그릇된 인성 때문도, 나약해서도 아니다. 삶의 희망이 도저히 보이지 않기에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한 삶을 보여주고 그 희망을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마련해 주면 이 문제는 상당 부분 해소된다. 예전 우리가 더 열악하고 복무 기간도 긴 군대 생활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제대 후의 삶이 주는 희망과 믿음 때문이었지 인성이 좋아서도, 계급 간 갈등이 없어서도 아니었다.

아마도 올해부터 병영과 예비군 훈련장은 말할 것도 없이 교육기관 등에서 인성 교육 강연들이 우후죽순으로 증가할 것이다. 도덕적으로 행동한다는 건 주체적이고 자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본적 사회 규범의 수행과 고결한 인격의 수양에서 오는 것이지 인성 교육에서 가르쳐질 게 아니다. 그 도덕조차 고리타분한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으니 더더욱 문제다.

공리주의는 분명 매력적인 도덕규범이다. 무엇보다 현대산업사회에서 공리주의만큼 큰 설득력을 갖는 도덕규범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대부분의 현대 국가들이 공리주의적인 태도를 선택한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공리주의는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그것은 바로 다수의 횡포에 의한 도덕적 타락을 합리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흔히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의 피해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어느 정도 타당해 보인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다수결 원칙에도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리주의는 치명적 약점을 지녔다. 바로 공리적 처벌이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키고 그것을 정당화하게 되면 어떻게 본능적으로 강한 사람, 돈 많은 사람, 학식이 있는 사람이 돼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어떤 방법도 마다하지 않게 된다. 은연중 대부분이 이런 식으로 처리하는 일들이 많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부도덕한 일이다. 사실 힘세고 돈 많고 배운 게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을 보살펴야 할 도덕적 의무 같은 게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소수의 약자의 희생을 담보로 다수의 강자가 행복하겠다는 것은 파렴치와 다르지 않다. 이 문제에 대해 가장 예리하게 비판하고 대안을 제안한 이는 바로 존 롤스였다. 그는 기존의 윤리학들이 주로 도덕 혹은 선의 문제에만 집착했을 뿐 정작 그것이 어떻게 작동되고 어떤 구체적 규범을 구성하는지에 대해서는 등한시한 결과 공리적 처벌과 같은 비윤리적인 결과들이 속출하게 됐다고 비판했다. 그는 사회적 규범이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공정으로서의 정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리주의의 문제는 바로 그런 공정성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롤스는 누구에게나 공정한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공정한 절차가 마련돼야 한다고 봤다. 심지어 그는 모든 사회적 구성원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그 규범이 자신에게 앞으로 이익이 될지, 손해가 될지 전혀 모르는 상태여야 평등하고 공정한 동의를 얻어낼 수 있다고 봤기 때문에 모든 이가 무지의 장막(the veil of ignorance) 속에서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모두 행복할 권리를 가졌다
롤스는 정의란 ‘정당화될 수 없는 자의적인 불평등이 없는 상태’라고 주장한다. 물론 차등을 무시하고 무조건적인 평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떤 차등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를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절차에 문제가 없다면 차등이나 불평등은 정당화될 수 있다. 다만 누구나 그런 절차에서 똑같은 자유를 보장받고 정의로울 수 있는 믿음을 제공해야 한다. 롤스는 사회의 모든 가치, 즉 자유와 기회, 소득과 부, 인간적 존엄성 등은 기본적으로 평등하게 배분돼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공정하고 정의로운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고 본 것이다. 무엇보다 가치의 불평등한 배분은 그 이익이 사회의 최소 수혜자에게 유리한 경우에만 정의로울 수 있다. 달리 말하면 공리주의가 주장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서 소외되고 박탈된 소수 약자들에게 우선적으로 그 이익을 분배할 수 있을 때 분배적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다른 사람의 자유와 충돌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누구나 최대한 기본적인 자유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인정하고 보장하는 사회만이 정의로운 사회가 될 수 있다. 이것은 공정한 기회균등의 원리와도 상통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그 원천이 되는 모든 일이나 자리에 대한 공평한 기회균등이 주어진 상태에서만 수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불평등이 가장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도 이익이 될 때에만 정당화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에 비춰 볼 때 과연 지금 한국의 현실이 그렇게 작동되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갈수록 탐욕과 억압, 그리고 착취의 고형화가 이뤄지고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기회가 주어져 있고 현실적으로 발생하는 불평등도 사회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이익이 되고 그 모든 절차가 공정하게 이뤄지며 공개돼 있을 때만 허용될 수 있다는 것은 윤리적 규범이나 사회적 공공선으로서의 정의가 단순히 개인의 문제에 국한될 수 없다는 것을 또렷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언뜻 보면 이것은 정치나 사회의 문제이지 윤리의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것은 우리가 대개 윤리라고 하면 개인의 도덕적 신념의 문제이며 동시에 사회적 선에 대한 문제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롤스는 제도적 보완이나 그에 대한 반성이 없다면 결코 그 사회에서 공공선을 달성하는 것은 어렵다고 봤다. 도덕이나 정의의 가장 핵심적인 가치는 자존감(self-respect)의 확립이다.

공리주의의 진정한 가치는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데 있다. 귀족과 부자만 쾌락을 추구할 권리가 있는 게 아니라 평민과 빈민도 행복할 권리가 있다. 그걸 실현할 능력이 지금 부족할 뿐 종자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걸 외면한 채 효용의 원리만 강조하며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만 강조하면 사회가 망가지고 정의도 휴지가 된다.

지금까지의 도덕적 판단은 주로 가정 같은 혈연적 공동체나 학교처럼 비교적 단순한 관계망 속에서 이뤄졌던 것들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복잡한 사회 속에서 생활하고 성찰하고 판단하면서 행동해야 한다. 그것은 다른 이들의 삶에 대한 배려와 이해를 필요로 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다양한 관점을 볼 수 있어야 어떤 행위에 대한 보다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대비도 마련할 수 있다. 인성 교육에 답이 있는 게 아니다. 행복해지면 저절로 인성이 좋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