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등 무리한 확장으로 그룹 동반 몰락…40년 인연 GM에 인수 ‘새 출발’

[역사를 바꾼 자동차 M&A 명장면] ‘세계 경영’ 신기루 속에 사라진 대우차
“조선 등 주력 계열사를 매각하겠습니다. 사재 1조3000억 원을 포함해 13조 원의 그룹 자산을 채권단에 맡기고 자동차 사업에 투입하겠습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구조조정안을 읽었다. 자신이 평생 일군 기업과 재산을 내놓겠다는 내용이었다. 제조업과 수출로 회사를 키워 1970년대 샐러리맨들에게 ‘살아있는 신화’라는 평가를 받던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었다. 1999년 7월, 30여 년 동안 급속도로 몸집을 불린 재계 2위 대우그룹이 무너졌다. 그룹이 해체되는 단초가 된 것은 다름 아닌 당시 국내 2위 자동차 업체였던 대우자동차. ‘세계 경영’이란 기치를 내걸고 신흥국 기업 중 최대 다국적기업이 된 대우그룹에 자동차는 성장의 동력이자 패망의 원인이었다.


새한자동차, 한국 최초의 승용차를 만들다
대우자동차의 뿌리는 1955년 김창원 씨가 설립한 신진공업사다. 초반엔 6·25전쟁 당시 미군의 망가진 차량을 수리하던 차량 정비 업체로 시작했다. 수리와 함께 군용 차량을 개조해 판매하다가 실질적으로 자동차를 만들게 된 것은 1963년 11월 새나라자동차를 인수하면서부터다. 새나라자동차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발표 직후인 1962년에 재일 교포인 박노정 씨가 만들었다. 인천 부평에 공장을 세우고 닛산 블루버드를 KD(Knock Down:반제품) 방식으로 수입해 조립한 뒤 판매했다. 이 차가 현대식 공장에서 만든 한국 최초의 승용차다. 하지만 이 회사는 결국 정치 자금 조달과 연계됐다는 의혹을 남긴 채 설립된 지 9개월 만에 외자 부족 등을 이유로 문을 닫았다.

새나라자동차를 인수한 신진자동차는 당시 정부가 인정한 국내 유일의 승용차 제조업체였다. 정부는 신진차에 국산화에 힘쓸 것을 요청했지만 신진차는 도요타와 기술제휴하며 퍼블리카·코로나 등의 KD를 수입해 조립만 했고 기술 개발엔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이에 정부는 현대차·아시아차·기아차에도 승용차 사업을 추가로 허가했다.

도요타 차량만 만들던 신진차는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가 대만·한국과 거래하는 업체와는 사업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대외무역 정책’을 발표함에 따라 더 이상 자동차를 만들 수 없게 됐다. 중국의 눈치를 본 도요타가 한국에서 철수했기 때문이다. 국산화 준비를 갖추지 못한 신진차는 기술력을 갖추기보다 글로벌 1위 업체인 제너럴모터스(GM)와 손잡았다. 이때 지분 50%를 GM에 넘기면서 회사명을 GM코리아로 바꿨다. GM과의 인연은 1972년부터 시작됐다.

GM과의 합작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매년 75만 달러의 경영 지도료와 매출액의 3%를 로열티로 지급해 이익을 거두기 어려웠다. 현대차가 고유 모델 포니를 개발했지만 GM코리아는 쉐보레 1700을 조립하는 데 그쳤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일쇼크가 닥치자 연비가 좋지 않은 차들의 판매가 급감했고 GM이 여기에 해당됐다. 결국 GM코리아는 1976년 산업은행 관리체제로 들어갔다. 회사는 GM과의 관계를 유지했지만 사명은 새한자동차로 바꿨다.

김우중 전 회장은 1967년 서른 살의 젊은 나이에 대우를 창업해 부실기업들을 인수하며 몸집을 키웠다. 1978년엔 산업은행이 보유한 새한자동차 지분 50%를 인수하며 자동차 업계에 뛰어들었다. 대우그룹이 1982년부터 경영권을 잡게 되면서 사명을 대우자동차로 변경했다. 당시 1980년 중화학 공업 합리화 조치로 현대차와 함께 두 회사만 승용차를 만들 수 있게 되면서 많은 이익을 남겼다. 하지만 여전히 고유 모델이나 독자 엔진을 만들기보다 해외 업체들의 모델 도입에 힘썼다.


‘대우(Daewoo)’ 엠블럼 달고 세계로
현대차가 1993년 캐나다 브로몽 공장에서 철수한 뒤 해외 진출에 소극적이었던 반면 대우는 공격적으로 진출했다. 1995년 폴란드에선 GM과 경합해 연산 30만 대 규모의 자동차 회사 FSO를 인수했다. FSO는 폴란드 정부가 1951년 설립한 자동차 회사다. 이 회사의 인수로 김 전 회장은 서방 언론으로부터 칭기즈칸을 빗댄 ‘킴기스칸’이란 별명을 얻었다.

1995~1996년에 동유럽과 동남아를 중심으로 공장을 늘려 갔다. 루마니아·우즈베키스탄·우크라이나·체코·이란·베트남·인도네시아·필리핀 등에 동시다발적으로 생산 공장을 설립했다. 주로 KD 형태의 공장이었다. 대우차가 직접 현지에 진출하기보다 (주)대우와 대우중공업 등 해외 현지법인들이 국내에서 자금을 차입해 자본금을 확보하고 나머지는 현지금융을 이용하는 방식이었다. 대우차의 재무구조가 취약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100%에 가까운 레버리지(leverage:차입)를 일으켜 운영한 셈이다. 1998년엔 국내 100만 대, 해외 100만 대 수준의 생산능력을 갖췄지만 폴란드 FSO를 제외하면 가동률이 30%에도 미치지 못했다.

신차가 나오지 않자 대우차는 1994년 1월 영국 IAD그룹의 워딩 테크니컬센터를 인수해 라노스(소형)·누비라(준중형)·레간자(중형) 등 3차종 개발에 착수했다. 독자 모델인 이 차들은 1996년과 1997년에 출시됐다. 1998년엔 티코 후속인 마티즈를 내놨다. 중소형 승용차 라인업은 어느 정도 마무리한 대우차는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과 대형차로 눈을 돌렸다. 그간 1800cc 이상의 중대형 엔진을 확보하지 못했고 이를 홀덴(GM의 호주 자회사)으로부터 공급받아 수익성 측면에서도 부정적이었다. 당시 이 간극을 채워 줄 수 있는 업체가 매물로 나왔다. 바로 쌍용자동차다. 하지만 대우차의 재정 상태는 좋지 않았다. 결국 1997년 12월 대우차는 쌍용차를 인수했고 이는 악수(惡手)로 작용했다. 대우그룹은 심지어 1998년 8월 기아차 입찰에도 참여했다. M&A는 기업의 부족한 역량을 채워 주기도 하지만 오히려 수렁에 빠뜨릴 수도 있는 양날의 검과 같다. 대우그룹은 후자에 해당됐다.

1997년 말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기업들의 구조조정이 활발하게 진행됐다. 대우차 역시 자금줄이 막혀 심각한 자금난에 빠졌다. 그래서 꺼내든 카드가 1992년 결별한 GM과의 재결합이었다. 지분 50%를 다시 넘기고 70억 달러를 유치한다는 계획이었다. 당시 GM은 오펠의 부진으로 유럽 실적이 좋지 않았고 포드가 중국에 먼저 진출하자 마음이 조급한 상태였다. 하지만 GM은 여러 번 대우차를 실사했음에도 끝내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결국 대우차를 포함한 대우그룹은 1999년 7월 자동차 사업 중심으로 구조조정을 단행하겠다고 발표했다. 대우그룹은 법정 관리를 추진해 보기도 했지만 금융권은 끝내 같은 해 8월 말 워크아웃(재무구조 개선 작업)을 단행했다. 대우그룹의 1999년 6월 말 기준 자산은 총 91조9000억 원. 당시 기준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기업 파산이었다.

상대적으로 탄탄했던 대우의 다른 계열사들은 자동차 사업에 의해 동반 부실 사태를 겪었다. 재무구조가 부실한 상황에 핵심 역량에 집중하기보다 합자나 인수 등 다른 방법만 찾다가 얻게 된 결과였다. 급박한 순간에 칼자루를 쥔 경제 관료들과 대립각을 세웠던 것도 악영향을 미쳤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김 전 회장의 대우그룹이 정권이 바뀐 후 김대중 정부와 이헌재 사단에 의해 해체된 점이다. 김 전 회장은 김 전 대통령의 경제 가정교사와 같았고 대우반도체 대표이사를 지낸 이헌재 경제부총리의 후견인이었다.

GM은 1998년 2월 대우차와 지분 협상에 따른 양해각서(MOU)를 체결함에 따라 1999년 11월까지 배타적 협상권을 갖고 있었다. GM의 해외 사업 총괄사장인 휴스는 1999년 12월 13일 비밀리에 한국 정부에 인수 의향서를 보냈다. 대우차 100% 지분 인수, 50억~60억 달러에 달하는 부채를 떠맡지 않겠다는 조건이었다. 협상은 지지부진했고 결국 2000년 6월 국제입찰을 통해 7조7000억 원(쌍용차 포함 가격)을 써낸 포드가 우선 협상자로 선정됐다. 다임러·현대차는 5조~6조 원, GM·피아트 컨소시엄은 4조~5조 원의 가격을 써낸 것으로 알려졌다.

포드는 대우차 인수를 통해 취약한 동유럽과 아시아 점유율 확대를 꾀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파이어스톤 타이어 리콜 사태로 자사주 매입 결정을 하는 등 자금 조달 문제를 겪으면서 대우차 인수를 포기했다. 정부는 이후 새로운 인수자를 물색했지만 어떤 업체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현대차는 기아차를 인수한 직후여서 공격적인 입찰을 할 여력이 없었다. GM도 올즈모빌 브랜드 폐기와 영국 복스홀 루튼 공장 폐쇄 등 구조조정을 단행하던 시기였다.


GM, 매각 또는 철수 가능성 남아 있어
시간은 GM의 편이었다. 2002년 10월 우여곡절 끝에 GM이 대우차를 인수했다. 사명을 GM대우로 변경했다. 처음 대우차와 협상했을 때(50% 지분, 70억 달러)의 14% 수준인 13억6000달러에 매입했다. 이는 채무 인수 금액을 포함한 것이고 실제로 GM이 지불한 금액은 4억 달러에 불과했다. GM으로서는 성공적인 거래였다. GM은 인수 후 10월 17일, 10월 24일 두 차례 유상증자를 했고 그 결과 GM 호주법인인 홀덴이 44.6%, 일본 스즈키가 14.9%, 중국 법인 상하이오토모티브가 10.6%를 보유(2003년 말 기준)하게 됐다. 당시 산업은행의 지분은 29.9%였다.
[역사를 바꾼 자동차 M&A 명장면] ‘세계 경영’ 신기루 속에 사라진 대우차
대우차 인수는 GM의 중국 진출에 큰 교두보가 됐다. 1990년대 말 대우차가 개발한 누비라(국내에선 인수 후 라세티로 변경)는 상하이GM에서 뷰익엑셀이란 이름으로 출시했다. 이 차량은 전체 매출의 70%를 차지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뒀다. 또 중국에서 대우차 마티즈를 스파크로 출시했고 상하이GM의 소형차 중 베스트 셀링 카로 꼽히는 세일은 대우차의 라노스에서 노하우를 흡수한 모델이다. GM은 현재 중국에서 전체 판매 1위 자리를 놓고 폭스바겐과 경쟁 중이다.

중국의 현지 업체인 체리자동차는 대우차의 몰락 과정에서 한몫 톡톡히 챙겼다. 마티즈의 ‘짝퉁’이라고 불리는 QQ를 2003년부터 생산하며 성장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책 ‘미국 바퀴, 중국 도로’의 저자 마이클 던에 따르면 실제로 이 업체는 2001년 대우차가 채권단 관리 하에 있을 때 대만으로 유출된 마티즈 설계도를 입수해 QQ를 만들었다고 한다.

2011년 GM대우는 사명을 한국GM으로 변경하고 판매하는 차량들에 쉐보레 엠블럼을 달기로 결정했다. 1978년 이후 33년 만에 자동차에서 대우라는 이름이 사라졌다. 한국GM은 대우차를 인수한 2002년 이후 지속적인 투자와 함께 12년 동안 판매 실적이 37만7000대에서 196만 대(CKD 포함)로 4배 넘게 늘어났다. 한국GM은 글로벌 GM의 브랜드 폐지 및 공장 폐쇄 등 구조조정 전략에 따라 여전히 매각 혹은 철수 가능성이 존재하는 회사다. 하지만 2010년 KDB산업은행과 GM이 체결한 합의문이 존재한다. 이 합의문에선 한국GM이 영구적 기술 소유권을 확보하고 매각 시 생산 기술과 국내외 판매 권한을 새 주인에게 넘긴다는 내용도 포함했다. 이 조항은 한국의 최초의 승용차를 만든 새나라자동차를 계승한 한국GM의 기업 가치를 유지하는 유일한 보호 장치라고 볼 수 있다. 한국 자동차 산업의 한 축을 차지했던 대우차가 앞으로도 그 명맥을 이어 갈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인 셈이다.


최진석 한국경제 산업부 기자·최중혁 신한금융투자 수석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