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장 떼고 내뱉어라”…분위기 조성은 리더 몫

“회의를 할수록 회의(懷疑)가 든다.”

매일같이 회의를 하면서 매일같이 회의에 젖어드는 대한민국 직장인들.

바꿀 수 없을까. 이젠 회의에도 혁신이 필요하다.
[SPECIAL REPORT] 잘나가는 회사는 어떻게 회의할까
임모(31) 대리는 중소기업에서 일한다. 기업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기 때문에 빠른 의사 결정, 민첩한 실행 등을 기대하며 입사를 결정했다. 기대와 달리 그는 반드시 준비하고 참석해야 할 회의들이 너무 많아 하루 업무 시간을 회의에 다 쏟아붓는다. 허구한 날 결론이 나지 않는 회의에 불려 다니는 통에 정작 주어진 업무를 처리하다가 야근하기 일쑤다. 끝없는 회의로 에너지가 완전히 고갈됐다.

임 대리가 처한 현실은 사실 많은 직장인들이 공감하는 경험이다. 시도 때도 없이 열리는 회의, 주제도 목표도 모르는 회의, 결론도 없이 길어지기만 하는 지루한 회의, 리더만 말하고 참가자들은 침묵하는 회의를 하면 할수록 회의(懷疑)를 느끼는 게 직장인들의 현실이다.

회사의 성과를 결정짓는 데 빠질 수 없는 중요한 ‘회의’, 잘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회의 문화를 바꿔 회사 분위기마저 바꾼 기업들을 살펴보자.


회의를 놀이처럼
“어? 지금 밑장빼기하는 거 다 봤어요.”(좌중 웃음)

“이 사람들이 사기 친 거예요.”

“자, 자~, 정답 발표하겠습니다. 8974!”

“와~!”

무슨 상황일까. 오프라인 놀이·게임 기획 전문 업체인 ‘놀공발전소’의 회의 현장이다. 말이 회의지 노는 것이나 다름 없다. “시끄럽게 하며 노는 것 같아도 이게 다 회의예요.” 놀공발전소의 대표 피터 리가 말했다. 최근 한 대기업의 의뢰를 받은 이들은 해당 기업의 가치를 담은 게임 프로젝트를 제작 중이다. 지금 회의는 본격적인 게임 개발에 앞서 놀공발전소 전 직원이 페이퍼 프로토타입으로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고 함께 이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자리다.

이게 다가 아니다. 놀공발전소는 ‘막 던지는 미팅’의 대가다. “‘막하는 얘기니까 대충 들으세요’라는 말을 많이 해요. 공놀이 하듯 서로 쉽고 재미있게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발견’에 포커스를 둔 거죠. 회의 준비도 못하게 해요. 회의 자료를 준비하고 내 아이디어에 대해 시간을 쓰면 쓸수록 내가 하는 말과 의견에 집착하게 되거든요. 그러면 아이디어가 채택되지 않을 때 기분이 나빠지거나 위축되기 때문에 회의가 자연스럽지 못해요.”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는 와중에 중심을 잃지 않는 리더의 역할도 중요하다. 그래서 회의의 총정리는 리 대표의 몫이다. 또 당장 아이디어가 채택되지 않더라도 언젠가 회사를 위해 꼭 쓰인다는 것을 발제자에게 인지시키는 것도 놓치지 않는다. “없어지는 아이디어는 없다”는 게 리 대표의 생각이다. 놀공발전소에서 개발 업무를 하는 이창신 씨는 “이런 회의 분위기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웃음) 이제는 막 던지면서 많은 아이디어가 나온다는 걸 모두가 안다”고 말했다.

일본의 도요타 본사의 임원 회의도 이에 못지않다. 이곳은 만담의 장이다. 여기에는 ‘자유롭게 탁 터놓고 얘기하는 회의’를 지양하는 도요타 아키오 사장의 뜻이 담겼다. 특히 매주 화요일 열리는 임원 회의는 더욱 그렇다. 각 부서 간 대표권을 가진 임원들끼리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서로의 방향을 파악하고 맞추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이른 아침 열리는 이 회의는 U자가 아닌 원형 테이블에서 진행된다. 직위에 관계없이 섞여 앉아 동등한 입장에서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토론 주제는 없다. 때마다 공유할 테마를 선택해 프리 토크 형식으로 회의를 진행한다. 그래서 회의 자료도 없다. 회의 자료를 만드는 데 쏟아붓는 시간 낭비를 줄이라는 뜻도 담겼다. ‘결정은 3초 이내’라는 규칙을 정해 신속한 결정을 내린다.

회의는 기업 문화의 결정체다. 가장 강력한 경쟁 무기가 될 수 있다. 회의가 이렇게 중요한 만큼 최고결정권자인 기업의 수장이 회의 문화를 만들어 가는 데 앞장서야 한다. 회의의 생산성은 리더에게 달려 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현대카드·현대캐피탈은 수장인 정태영 사장의 주도 아래 몇 년 새 회의 문화가 눈에 띄게 바뀌었다.
[SPECIAL REPORT] 잘나가는 회사는 어떻게 회의할까
회의의 생산성은 리더에게 달렸다
“현대카드·현대캐피탈 임원 회의에서 계속 발언이 없는 분은 직위에 상관없이 아예 회의에 들어오지 말라고 통보한다. 할 말이나 열정이 없는 사람이 굳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회의 참석은 의견 교환을 위한 것이지 자리 과시용이 아니다.”

“IT 임원이 마케팅을 따지고 브랜드 임원이 재무를 묻고 아이디어를 주는 등 자기 영역과 계급장 상관없는 토론도 고유의 문화이자 성장 동력이다. 그러면서 쌓이는 팀워크가 진짜지 회식에 폭탄주 돌린다고 팀워크가 쌓이지 않는다.”

“‘미친듯이 심플(켄 시걸 지음)’을 실본부장들에게 배부. 작은 집단의 의사 결정, 부분적 실수를 허용하고 큰 그림 그리기, 결정과 실행의 단순화 등은 모든 기업들이 지속적으로 가져야 할 용기다. 용기가 없고 망설임과 책임 전가가 더 우선할 때 기업의 프로세스는 복잡해지고 결국 프로세스에 희생당한다.”

정 사장이 자신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 남긴 회의에 대한 생각이다. 그의 이런 생각은 회사의 회의 문화를 바꿨다. ‘포커스 미팅’이 대표적이다. 획일적인 주간 회의 방식에서 벗어나 2~3개의 안건만 정해 이에 대한 유관 부서의 실무자들이 정 사장과 함께 집중 토론을 벌인다. 회의 전날 참석자들에게 전달되는 자료는 5페이지를 넘지 않는다. 자료에는 회의 주제에 대한 간략한 설명만이 있을 뿐이다. 구체적인 결론은 언제나 치열한 논쟁 끝에 도출된다. CEO의 지시를 받아 적기 바빴던 예전 회의실 풍경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회의 때 좌석 배치도 자유롭다. 흔히 말하는 ‘상석’ 개념에 입각한 ‘서열식 자리 배치 공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신속한 의사 결정을 위해 ‘주간 회의’는 모두 e메일과 전자 결재로 한다. 현대카드의 평사원이 올린 결재 서류가 정 사장의 결재를 거치는 데 소요되는 평균 시간은 8시간이 넘지 않는다. 실제로 정 사장은 임직원들의 업무 관련 e메일에 신속한 답변 메일을 보내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임원 간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한 ‘마켓 플레이스’도 있다. 매달 둘째 주 목요일 50여 명이 넘는 모든 부서의 임원이 노트북과 간단한 서류만 챙겨 본사 컨벤션홀에 모여 한나절 업무를 하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즉석 회의가 열리는 것은 기본이다. 이를 통해 부서 간 협업의 필요성과 담당 임원이 포착하지 못한 문제점이나 장점을 서로 다른 부서에서 크로스 체크(cross check)한다. “조직 내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면 기업은 생각지도 못한 힘을 발휘한다. 이는 한두 명 뛰어난 인재를 영입해 오는 것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게 회의 문화를 바꾼 뒤 현대카드·현대캐피탈 직원들이 느낀 공통점이다.

최근 현대카드·현대캐피탈의 최대 화두는 ‘단순화(Simplification)’다. 비즈니스와 기업 문화에서 거품을 걷어내고 핵심 가치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각 본부마다 전담 직원을 지정하고 이들로 구성된 ‘워킹 그룹’을 조직했다. 이 워킹 그룹은 직원들의 아이디어를 발굴, 취합하고 개선 방안 도출을 주도한다.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 임직원은 언제든지 사내 인트라넷 ‘심플리피케이션(Simplification)’ 코너에 자신의 생각을 올릴 수 있다. 지난 3월 말에 문을 연 이 코너에는 두 달여 만에 1만 건을 돌파했다.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고 피로도를 낮출 수 있는 일이기에 많은 임직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타이머로 회의 시간 측정…넘기면 ‘아웃’
직원들이 앞장서 회사의 회의 문화를 바꾼 경우도 있다. 대웅제약이 최근 실시한 ‘111 회의’ 캠페인이 대표적이다. 대웅제약은 2007년, 2013년 두 차례 대웅제약 직원들을 대상으로 회의 만족도 조사를 했다. 회의 소집부터 마무리까지 회의 과정 전반에 대해 조사를 펼쳤는데, 조사 결과 ‘회의 전 의제와 자료 공유’, ‘회의 시작과 종료 시간 준수’ 항목이 두 번의 조사에서 모두 가장 낮게 평가됐다. 어떤 내용으로 회의하는지에 대한 자료와 의제가 미리 공유되지 않고 참석자가 지각하거나 회의가 길어져 예상 회의 시간이 지켜지지 않는 것이 주요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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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제약 직원들은 이러한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회의 문화 바꾸기에 나섰다. 그것이 바로 ‘111 회의’ 캠페인이다. 이것은 ‘회의 자료 공유는 1일 전까지, 회의 시간은 1시간 이내, 회의 후 결과 공유는 1일 이내’에 하자는 뜻이다. 회의실에 예정된 회의 시간이 되면 알람이 울려 회의 시간을 준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회의 타이머와 회의실 이용 기록부’가 비치돼 있다. 회의실 이용 기록부는 회의실의 원활한 활용을 위해 비치됐다. 회의가 제시간에 시작해 제시간에 끝나지 않으면 그다음 예정된 회의들이 줄줄이 피해를 보기 때문이다. 또 회의실 이용이 111회의 원칙대로 잘 이뤄지고 있는지 확인하는 절차이기도 하다. 회의실 예약자는 이용 기록부를 작성하면서 회의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자가 진단을 할 수 있다. 대웅제약 관계자는 “불필요하게 길어지는 회의 때문에 시간 관리에 애로 사항이 많았는데 ‘111회의 캠페인’이 시작된 후론 정해진 시간 내에 효율적으로 결론을 도출하는 시스템 때문에 회의 시 집중력이 부쩍 높아졌다는 게 내부 평가”라고 말했다.

회의 시간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직장 내에서는 ‘회의실 쟁탈전’이라는 웃지 못할 신직장 풍속도도 생겨났다. 사적인 사무 공간은 사라지는 반면 회의는 급증해 너도나도 회의실을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돼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업들은 다양한 해결책을 시도하고 있다. 엔씨소프트는 아예 회의 공간을 확대했다. 회사 전체를 회의실처럼 쓸 수 있게 바꾼 것. 엔씨소프트 사옥의 사무실이나 휴게실 외벽을 자세히 보면 화이트보드 역할을 겸하는 것으로 돼 있다. 언제든지 생각날 때마다 회의실에 가지 않고도 펜을 들고 토의를 하거나 의견을 나눌 수 있게 한 것이다. 창의적 사고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나온다는 점을 고려한 작품이기도 하다.

소프트웨어 회사인 제니퍼소프트는 길어지는 회의 시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재미있는 발상을 했다. 회의실 의자를 불편한 것으로 비치한 것이다. 그래야 회의를 짧게 끝낼 수 있기 때문이다. 네이버 역시 간략하고 효율적인 회의를 위해 일부러 회의실 의자를 불편한 것으로 두었다. 온라인 게임 회사 한게임의 기획자들도 회의실에 모여 토론하기보다 사무실을 연결하는 중앙 복도나 휴게실에 모여 짧은 ‘스탠딩 회의’로 업무를 처리한다. 사전에 회의 자료를 숙지하고 모여 선 채 신속하게 의사 결정을 하는 방식이다. 스탠딩 회의를 하면서 회의 시간이 15분 이내로 줄었다.

‘회의 문화가 일류 조직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조직을 가장 빨리 알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회의에 몇 번 참석해 보는 것’이라는 말도 있다. 회의를 하는 방식과 수준에는 그 회사의 모든 것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잘 정리된 주제와 간단명료한 토론은 물론 회의에 대한 구성원들의 가치관과 마인드 개혁까지 이뤄낸다면 경쟁이 치열한 시장 속에서 앞서나가는 기업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글 김보람 기자 boram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