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동떨어진 막연한 기대…실제 준비는 자료 조사에 그쳐

[이제는 ‘넥스트 잡’ 시대] “70세까지 현재 연봉 80% 받고 싶다”
은퇴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누군가에게 은퇴는 ‘쉼’과 ‘안식’이다. 누군가에겐 ‘인생 2막’을 여는 출발점이다. 공통점은 인생 여정에서 누구나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한경비즈니스는 직장인 300명을 대상으로 ‘직장인의 직업의식, 넥스트 잡’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은퇴 후 직업’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과 준비 상황 등을 물었다.

은퇴 후 직업에 대한 직장인들의 의식 조사를 실시한 배경은 달라지는 사회에 있다. 한국은 고령사회로 접어들고 있다. 2018년 65세 이상 인구가 14% 이상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평균수명은 길어지고 있다. 일하지 않기엔 남은 노후 기간이 너무 길다. 2016년 정년 60세를 의무화하긴 했지만 한국고용정보원에 따르면 근로자가 주된 일자리에서 은퇴하는 연령은 54세다. 국민연금 수령 연령은 61세, 기초연금 수령 연령은 65세다. 반면 이들의 자녀 세대는 ‘삼포 세대’로 불린다. 취업과 결혼이 이전 세대에 비해 늦어지고 있다. ‘장수 리스크’, ‘평생 현역’ 등의 용어가 등장하는 이유다.


넥스트 잡은 선택 아닌 필수
은퇴 이후를 바라보는 시각을 확인함으로써 우리 시대가 직면한 현실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 결과 ‘이제는 넥스트 잡 시대’로 요약된다. 설문 조사 결과 은퇴 이후 가장 필요한 것은 ‘일자리’로 나타났다. 현재의 은퇴 설계가 연금을 비롯한 ‘재무 설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은퇴 이후 삶의 핵심은 일 그 자체에 있다는 결론이다. 그러나 직장인들이 느끼는 필요성에 비해 실제 준비는 ‘미흡’한 것으로 나타났다. 자신의 미래에 대해 ‘막연한 낙관’을 하고 있었다. 정부가 중·장년의 재취업과 창업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지만 ‘생계형 일자리’에 그치는 경우가 많은 현실과 대비된다. 이 또한 생각에 머무를 뿐 실제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하고 있는 경우에도 대부분이 ‘자료 조사’에 그쳤다.

우선 ‘은퇴 후 넥스트 잡 필요성’에 대해 묻는 질문에 필요하다는 응답이 93%로 절대 다수였다. 불필요하다는 응답은 2%에 그쳤다. 5%는 모르겠다고 답했다. 연령대별로 보면 30대에서 60세 이상까지 모두 90% 이상 필요하다고 답했다. 은퇴 후 일자리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는 공감대가 전 연령대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권도형 한국은퇴설계연구소 대표는 “은퇴 후 연금으로 살아가는 방식도 있지만 연금이나 금융 상품만으로는 채울 수 없기에 일을 통해 수입원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식이 확산되고 있다”며 “100세까지 제2의 인생을 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잡’이며 이것이 은퇴 설계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다.
[이제는 ‘넥스트 잡’ 시대] “70세까지 현재 연봉 80% 받고 싶다”
‘넥스트 잡이 필요한 이유’로는 생계 유지가 42.3%로 첫손에 꼽혔다. 이어 자녀로부터의 경제적 독립(용돈벌이)이 39%, 자아 성취 17%, 가족 부양 1%순이었다. 경제적인 이유가 83%에 달한다. 은퇴 후 취미 활동을 통한 자아 성취보다 가정을 영위하기 위한 경제활동에 무게중심이 크게 쏠린 데는 ‘소득 공백기’ 우려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국민연금 등 공적 연금 수령 시기는 65세부터다. 은퇴 이후 소득이 중단된 상태에서 자녀 학업, 결혼 등의 대형 이벤트를 치러야 하는 부담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정규직으로 재취업하고 싶다’
‘은퇴 후 언제까지 일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응답자의 50%가 70세까지 일하고 싶다고 답했다. 60세 정년 의무 나이보다 10년 정도 더 많은 나이다. 80세까지가 24.2%로 뒤를 이었고 65세까지가 18.7%였다. 또한 ‘넥스트 잡으로 가장 선호하는 형태’는 재취업이 52%로 가장 많은 선택을 받았다. 재취업(52%)·창업(22.7%)·귀촌(21.3%)순으로 창업과 귀촌은 비슷한 응답을 받았다. ‘넥스트 잡으로 우선시하는 조건’은 고용의 안정성(52.3%), 여가 시간(18.3%), 적성(16%), 연봉 수준(11.7%)이 차지했다. 고용의 안정성은 비정규직·프리랜서가 아닌 조직에 적을 두고 활동하고 싶다는 바람을 뜻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질문한 ‘재취업 시 원하는 고용 형태’에 대해 정규직이 63%로 절대 다수를 차지했다. 프리랜서(22.3%)·비정규직(7.3%)·아르바이트(3.7%)·기타(3.3%)가 뒤를 이었다. 종합해 보면 ‘70세까지 재취업을 통해 정규직으로 안정적으로 일하고 싶다’는 결론에 이른다.

또한 소득은 ‘퍼스트 잡’에 근접한 수준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재취업 후 기대하고 있는 연봉 수준’은 현재 연봉을 기준으로 ‘70~80% 수준’을 받고 싶다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그다음 70~80% 수준(36.3%), 50~70%(30%), 80~100%(21.3%), 50% 이하(7%), 100% 이상(5.3%)으로 조사됐다. 이는 창업에 대한 질문에서도 비슷한 결과를 보였다. ‘창업 후 기대 수익’ 질문에 70~80% 수준이 가장 많은 응답을 받았다.

반면 넥스트 잡을 위한 준비는 미흡한 것으로 조사됐다. ‘현재 넥스트 잡을 위한 준비’에 대해 없다(57%)가 있다(26.3%)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연령대로 보면 40대(67%), 30대(62%), 50대(45.1%), 60대 이상(34.5%)이 넥스트 잡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지 않다고 답했다. 40대까지는 비교적 은퇴 후 직업에 대해 막연하게 생각하다가 은퇴를 목전에 둔 50대 들어서면서 현실적인 문제로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있다’고 답한 이들도 실질적인 준비는 하지 못하고 있었다. 준비의 내용이 소극적인 형태인 ‘자료 조사’에 그치기 때문이다. ‘넥스트 잡을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 물은 결과 자료 조사(33.3%)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기타(31%), 기술 교육(19.3%), 아이디어 개발(16.3%)순이었다. 인터넷 등으로 기본 정보 탐색만을 할 뿐 시간과 노력을 할애해야 하는 적극적인 준비인 교육·개발 등은 매우 낮은 수준으로 조사됐다. ‘은퇴 후 재취업을 위한 노력’을 묻는 질문에서도 자료 조사(42.7%), 기타(23.7%), 기술 교육(17.3%), 취업 박람회 등 구직 정보 수집(16.3%)으로 비슷한 응답을 보였다.


은퇴를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이와 같은 결과에 대해 전문가들은 어떻게 분석할까. 하규수 호서대 글로벌창업대학원장은 “한마디로 아이들이 막연한 장래 희망을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실제 은퇴 이후의 현실은 막연한 핑크빛 전망과 전혀 다른 핏빛이라는 것이다. 하 원장은 “오후 5시 30분쯤 지하철에 있는 상당수가 노는 중·장년들이다. 꿈은 70세까지 정규직으로 은퇴 직전 연봉의 80%를 받고 싶어 하지만 길거리에 서성이거나 카페에 들어가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증권사 애널리스트였던 한 친구는 52세에 2억7000만 원을 받고 직장을 나왔는데, 앞으로 50년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해 한다. 자신 정도 스펙이면 어디서든 불러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나와 보니 6개월간 놀고 있다. 또 다른 친구 중 한 명은 퇴직금 1억8000만 원을 받았는데 열 달 만에 자녀 교육비와 생활비로 1억 원을 썼다”고 말했다.

이제는 ‘넥스트 잡’을 수면 위로 끄집어내야 할 때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권도형 대표는 “금융권에서 시작된 은퇴 설계가 연금 설계로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실제로는 재무적인 것과 비재무적인 것을 포함해 균형 있는 삶을 사는 게 중요하다”며 “하루 세 끼 밥 먹는다고 해서 ‘삼식이’, 쓸리지 않는 낙엽처럼 아내에게 의존한다고 해서 ‘젖은 낙엽’이라고 불리는 게 은퇴 후 대한민국 아버지상이다. 금융권의 공포 마케팅에 비해 지금까지 직업 얘기가 배제된 것이 사실이지만 재무적·비재무적인 이유를 불문하고 은퇴 이후 가장 필요한 것은 넥스트 잡이라는 것을 이제는 수면 위로 띠워 놓고 얘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첫걸음은 ‘인식’의 전환이다. 은퇴 후 직업에 대한 막연한 핑크빛 전망을 하는 데는 ‘낮은 곳으로 갈 수 없다’는 사회적 인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또한 눈높이를 낮출 수 없는 데는 가족도 한몫하고 있는 것으로 지적된다. 하 원장은 “가족들에게 퇴직 사실을 알리지 못하고 한강을 서성이는 이들이 있다. 퇴직했다고 하면 한숨을 푹푹 쉬는 아내가 먼저 바뀌어야 하고 ‘나는 모든 걸 할 수 있는 아버지’라는 짐도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넥스트 잡을 위한 실질적인 준비’다. 은퇴 후 넥스트 잡이 필수라는 것을 인지하고 일찍부터 구체적인 준비에 나서야 한다. 미국에서는 넥스트 잡을 놓고 ‘리빌딩·리에듀케이션’ 운동을 시작했다. 권 대표는 “미리부터 준비하면 철저히 할 수 있고 실패 확률도 떨어지기 때문에 이를수록 좋다고 평소 강연한다”며 “기존의 경력을 살리거나 전혀 새로운 분야를 위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기에 정부 정책에도 보다 장기 비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재 정부 정책은 고용노동부·중소기업청의 산하 기관에 흩어져 있어 컨트롤 타워가 부재한 상황이다.


이현주 기자 charis@hankyung.com